[복거일 칼럼] AI의 생산성이 예상보다 낮다고?
-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기술의 진화를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들
위험해 보이는 기술은 덮어놓고 막으려 해
이런 태도에 오만 겹치면 규제충동 불거져
복거일 < 사회평론가·소설가 >
위험해 보이는 기술은 덮어놓고 막으려 해
이런 태도에 오만 겹치면 규제충동 불거져
복거일 < 사회평론가·소설가 >
인공지능의 생산성이 예상보다 낮다는 얘기가 자주 들린다. 원래 이런 지적은 정보기술에 대한 투자가 컸던 1980년대에 나왔다. 로버트 솔로가 “컴퓨터 시대는 생산성 통계 말고는 모든 곳에서 볼 수 있다”고 슬쩍 비꼰 뒤, 그것은 ‘솔로 컴퓨터 역설’로 불렸다.
이 역설에 대한 설명은 바로 나왔다. 생산성은 재화의 생산에서 투입(input)과 산출(output)의 비율인데, 그것을 측정하는 데 쓰이는 통계와 척도가 함께 거칠다. 기술 발전으로 재화의 질이 나아지고 새로운 제품이 나오는 것을 반영하지 못한다는 사정이 특히 문제적이다.
미국에서 1000루멘시(lumen-hour)의 값은 1800년엔 40센트였지만 1980년대엔 0.1센트였다. 1800년의 40센트는 지금은 4달러가 넘으니, 조명 값은 2세기 동안에 4000분의 1 이하로 떨어진 셈이다. 더 친숙한 예는 ‘무어의 법칙’이다. 초소형 정보처리장치의 능력 대비 가격은 지난 반세기 동안 빠르게 떨어졌다. 이 덕분에 모든 사람이 단 한 세대 전엔 상상도 못한 정보처리 능력을 갖췄다. 스마트폰의 정보처리 능력이 1960년대 말엽 달에 우주선을 보낼 때 미국항공우주국(NASA)이 갖춘 능력보다 낫다는 얘기가 나온 것이 몇 해 전이니, 이제는 화성에 우주선을 보낼 만하다.
이런 성능 개선은 통계엔 거의 잡히지 않는다. 노드하우스에 따르면 1800년부터 1992년까지 전통적 방식으로 쟀을 때 실질 임금은 13배 올랐다. 성능 개선 효과를 고려하면 970배 올랐다. 정보산업과 인공지능에 대한 투자 성과는 주로 지적 재산의 형태로 나온다. 지적 재산은 아주 작은 추가 비용으로 무제한 복제된다. 자연히, 실질적 생산성과 전통적 통계 사이의 괴리는 더욱 커진다.
노드하우스의 지적대로, 경제 성장이 전통적 통계보다 거의 100배 컸다는 사실은 중대한 함의들을 품을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도, 생활 수준이 높아져서, 가난의 성격이 변했다. 발전된 사회들에서 가난한 사람들이 부유한 사람들보다 훨씬 많이 비만에 시달린다는 사실은 가난이 상대적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자연히, 가난 대신 소득 격차가 주된 사회적 논점이 돼 기회의 평등을 추구하기보다 결과의 평등을 추구하는 성향이 점점 커진다.
이처럼 인공지능의 낮게 보이는 생산성은 충분히 설명됐는데, 근년에 경제사가 로버트 고든이 이 묵은 논점을 다시 끄집어냈다. 그는 1870년부터 1970년까지 일어난 경제 혁명이 인류 역사에서 독특한 사건이며 그런 혁명은 다시 일어날 수 없다고 단언한다. 4차 산업혁명을 이끌어온 인공지능의 중요성도 생산성도 높지 않다는 얘기다.
고든은 1970년 이후의 발전은 “오락, 통신 및 정보의 수집·처리와 관련된 좁은 분야의 인간 활동”에 집중되는 경향을 보였고 그 사실로 솔로 역설이 설명된다고 주장한다. 지금 세상에서 오락이나 통신을 좁은 분야라고 보는 것도 문제적이지만 정보의 수집과 처리를 그렇게 여기는 것은 정보의 본질에 대한 무지를 드러낸다. 삶의 본질이 바로 정보 처리니, 모든 생명체는 유전자들에 들어 있는 정보들을 처리해서 만들어지고 살아간다.
그래서 모든 산업은 정보 처리를 가장 중요한 속성으로 지녔다. 이제 인공지능을 장착해서 자율성을 지닌 기계들이 빠르게 늘어나고 그런 자율 기계들이 상호 작용하는 시대가 닥쳤다. 기계들의 환로(loop)에서 사람의 역할이 점점 줄어드는 것이다. 그런 기술이 혁명적이 아니라면, 무엇이 혁명적인가?
인공지능의 생산성에 대한 비현실적 진단은 기술 진화의 부정적 인식에서 비롯한다. 기술의 본질과 진화의 원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니 위험해 보이는 기술을 덮어놓고 막으려는 것이다. 그런 태도에 자신이 진리를 본다는 오만이 겹치면 모든 사람의 자유로운 판단들이 작용하는 시장을 규제하려는 충동이 나온다.
근자에 로버트 실러가 로봇 발전에 제동을 걸기 위해 세금을 매기자는 주장을 폈다. 유럽 의회가 내놓은 민중주의적 주장을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주류 경제학자가 지지한다는 사실은 기술의 진화에 대한 부정적 태도와 민중주의적 충동 사이의 연관을 괴롭게 보여준다.
복거일 < 사회평론가·소설가 >
이 역설에 대한 설명은 바로 나왔다. 생산성은 재화의 생산에서 투입(input)과 산출(output)의 비율인데, 그것을 측정하는 데 쓰이는 통계와 척도가 함께 거칠다. 기술 발전으로 재화의 질이 나아지고 새로운 제품이 나오는 것을 반영하지 못한다는 사정이 특히 문제적이다.
미국에서 1000루멘시(lumen-hour)의 값은 1800년엔 40센트였지만 1980년대엔 0.1센트였다. 1800년의 40센트는 지금은 4달러가 넘으니, 조명 값은 2세기 동안에 4000분의 1 이하로 떨어진 셈이다. 더 친숙한 예는 ‘무어의 법칙’이다. 초소형 정보처리장치의 능력 대비 가격은 지난 반세기 동안 빠르게 떨어졌다. 이 덕분에 모든 사람이 단 한 세대 전엔 상상도 못한 정보처리 능력을 갖췄다. 스마트폰의 정보처리 능력이 1960년대 말엽 달에 우주선을 보낼 때 미국항공우주국(NASA)이 갖춘 능력보다 낫다는 얘기가 나온 것이 몇 해 전이니, 이제는 화성에 우주선을 보낼 만하다.
이런 성능 개선은 통계엔 거의 잡히지 않는다. 노드하우스에 따르면 1800년부터 1992년까지 전통적 방식으로 쟀을 때 실질 임금은 13배 올랐다. 성능 개선 효과를 고려하면 970배 올랐다. 정보산업과 인공지능에 대한 투자 성과는 주로 지적 재산의 형태로 나온다. 지적 재산은 아주 작은 추가 비용으로 무제한 복제된다. 자연히, 실질적 생산성과 전통적 통계 사이의 괴리는 더욱 커진다.
노드하우스의 지적대로, 경제 성장이 전통적 통계보다 거의 100배 컸다는 사실은 중대한 함의들을 품을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도, 생활 수준이 높아져서, 가난의 성격이 변했다. 발전된 사회들에서 가난한 사람들이 부유한 사람들보다 훨씬 많이 비만에 시달린다는 사실은 가난이 상대적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자연히, 가난 대신 소득 격차가 주된 사회적 논점이 돼 기회의 평등을 추구하기보다 결과의 평등을 추구하는 성향이 점점 커진다.
이처럼 인공지능의 낮게 보이는 생산성은 충분히 설명됐는데, 근년에 경제사가 로버트 고든이 이 묵은 논점을 다시 끄집어냈다. 그는 1870년부터 1970년까지 일어난 경제 혁명이 인류 역사에서 독특한 사건이며 그런 혁명은 다시 일어날 수 없다고 단언한다. 4차 산업혁명을 이끌어온 인공지능의 중요성도 생산성도 높지 않다는 얘기다.
고든은 1970년 이후의 발전은 “오락, 통신 및 정보의 수집·처리와 관련된 좁은 분야의 인간 활동”에 집중되는 경향을 보였고 그 사실로 솔로 역설이 설명된다고 주장한다. 지금 세상에서 오락이나 통신을 좁은 분야라고 보는 것도 문제적이지만 정보의 수집과 처리를 그렇게 여기는 것은 정보의 본질에 대한 무지를 드러낸다. 삶의 본질이 바로 정보 처리니, 모든 생명체는 유전자들에 들어 있는 정보들을 처리해서 만들어지고 살아간다.
그래서 모든 산업은 정보 처리를 가장 중요한 속성으로 지녔다. 이제 인공지능을 장착해서 자율성을 지닌 기계들이 빠르게 늘어나고 그런 자율 기계들이 상호 작용하는 시대가 닥쳤다. 기계들의 환로(loop)에서 사람의 역할이 점점 줄어드는 것이다. 그런 기술이 혁명적이 아니라면, 무엇이 혁명적인가?
인공지능의 생산성에 대한 비현실적 진단은 기술 진화의 부정적 인식에서 비롯한다. 기술의 본질과 진화의 원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니 위험해 보이는 기술을 덮어놓고 막으려는 것이다. 그런 태도에 자신이 진리를 본다는 오만이 겹치면 모든 사람의 자유로운 판단들이 작용하는 시장을 규제하려는 충동이 나온다.
근자에 로버트 실러가 로봇 발전에 제동을 걸기 위해 세금을 매기자는 주장을 폈다. 유럽 의회가 내놓은 민중주의적 주장을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주류 경제학자가 지지한다는 사실은 기술의 진화에 대한 부정적 태도와 민중주의적 충동 사이의 연관을 괴롭게 보여준다.
복거일 < 사회평론가·소설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