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원전·방산·철도… 외국기업만 콧노래
원자력발전, 항공우주, 철도, 방위산업 등 국가전략산업으로 꼽히던 업종에 속한 기업이 줄줄이 위기에 몰렸다. 정부의 탈(脫)원전 정책, 방산비리 수사, 세일즈 외교 상실 등으로 글로벌 경쟁력이 급속도로 추락할 우려가 높아졌기 때문이다. 반면 외국 경쟁업체들은 한국 기업 위기를 기회로 활용하고 있다. 적극적인 ‘네거티브 마케팅’으로 시장 지배력을 강화하는 분위기다.

영국 북서부에 있는 무어사이드 원전 건설 사업을 맡고 있는 뉴젠컨소시엄은 한국전력에 한국형 원자로를 쓰는 것이 가능하다고 통보했다. 2009년 이명박 정부 당시 아랍에미리트(UAE) 원전사업을 따낸 뒤 8년 만에 대규모 수주가 임박한 것이다. 수주가 성사되면 원자로 증기발생기 등 주기기 납품은 두산중공업이, 시공은 현대건설 삼성물산 대우건설 대림산업 등이 맡을 전망이다. 이번 원전 수출은 21조원 규모로 중형 승용차 100만 대, 초대형 유조선 180척을 수출하는 것과 맞먹는 규모다.
위기의 원전·방산·철도… 외국기업만 콧노래
하지만 정부의 탈원전 정책이 이 사업에 찬물을 끼얹었다. 파이낸셜타임스는 “한전 계획이 문재인 정부의 탈원전 정책으로 어려움에 처했다”며 “영국은 탈원전 정책을 표방한 한국과 원전사업을 함께 진행하기를 원하지 않을 수 있다”고 보도했다. 한국이 탈락하면 러시아 로사톰, 중국 상하이전력, 프랑스 아레바 등 해외 원전업체가 수주한다. 2011년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후 ‘원전 제로’를 선언한 일본도 한동안 해외 원전 수주에 어려움을 겪었다.

세계 5대 원전 강국인 한국이 600조원에 달하는 원전 수출 시장에서 주도권을 잃고 그 자리를 중국과 러시아 업체가 메울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원전 설비업체 우리기술의 서상민 전무는 “한국의 원전 가동 중단 소식이 전해지자 중국과 러시아 원전업체들은 잔칫집 분위기”라며 “경영위기에 몰린 국내 원전기업도 수십년간 쌓아온 기술을 중국에 팔려고 시도하고 있다”고 말했다.

위기의 원전·방산·철도… 외국기업만 콧노래
방산업계는 정부가 출범할 때마다 반복돼온 사정의 칼날이 자칫 ‘무기 국산화’와 ‘연구개발(R&D) 경쟁’을 위축시키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다. 군과 정부 관료들이 검찰 수사나 감사원 감사 리스크가 적은 해외 무기 도입으로 정책을 선회하면 외국 방산업체의 배만 불려줄 수 있다는 분석이다. 한국의 연간 무기 수입 규모는 8조~9조원에 달한다.

한국항공우주산업(KAI)은 17조원 규모인 미국 공군 고등훈련기(APT) 사업 수주를 앞두고 록히드마틴과 컨소시엄을 구성해 미국 보잉 컨소시엄과 경쟁하고 있다. 고용 창출만 18만 명으로 예상되는 역대 최대 방산입찰이다. 후속 물량을 감안하면 향후 30년간 100조원가량의 일감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란 전망이다. 하지만 KAI에 대한 검찰 수사로 100조원의 사업 기회가 날아갈지 모른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미국이 부패기업으로 평가할 경우 입찰에서 아예 배제된다.

수리온 개발로 2010년 세계 11번째 헬기 개발 국가가 된 한국은 국내 시장마저 외국 업체에 잠식당할 가능성이 커졌다. 외국 방산업체가 지난 16일 수리온 결함에 대한 감사원 감사 결과를 활용해 네거티브 마케팅에 나섰기 때문이다.

안영수 산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미국은 F35 전투기 개발에 70조원을 투입했지만 한국은 차세대 한국형전투기(KFX) 사업에 8조원을 투입했다”며 “선진국에 비해 아직 걸음마 단계인 국내 방산업계의 R&D가 이번 검찰 수사를 계기로 완전히 꺾일 수 있다”고 우려했다.

위기의 원전·방산·철도… 외국기업만 콧노래
세계 10위권인 국내 대표 철도제작사 현대로템은 해외 고속철도 수주 실적이 전무하다. 중국의 CRRC와 일본의 히타치 가와사키 등이 2010년부터 인도네시아, 태국, 미국, 인도 등에서 각각 20조~30조원 규모의 고속철을 수주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아베 신조 일본 총리 등은 연간 72조원 규모인 철도사업 수주를 위해 ‘세일즈 외교’에 나서고 있지만 한국은 대통령이 나선 사례가 없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해외 고속철 사업은 건설, 통신, 철도제작사, 금융회사 등이 컨소시엄을 맺어야 하기 때문에 국가지도자급의 컨트롤타워가 있어야 수주가 가능하다. 현대로템은 국내 입찰에서도 소외받고 있다.

국내 입찰은 기술보다 가격으로 결정되는 경향이 강해 상대적으로 중소기업에 유리한 구조다. 외국에선 일반화된 자국 철도산업 보호 규정(자국 협력사 활용 및 생산공장 의무화)도 없다. 지방 경전철 시장을 미쓰비시, 히타치, 지멘스, 봄바르디어 등 외국기업에 뺏긴 이유다.

안대규 기자 powerzanic@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