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칼럼] 보수가 회생하려면
보수주의는 그 자체로서 독자적인 이념이나 가치 체계를 가진 이즘(-ism)이 아니라 특정 이념이나 가치 체계를 싸는 보자기라는 표현이 더 정확하다. 싼 것이 비지떡이라면 비지떡 보수가 되고, 자유를 싼 것이라면 도덕적이고 풍요로운 인간의 삶을 위한 소중한 보수가 된다. 또 포장하는 알맹이가 무엇이냐에 따라 활발한 정치적 운동성을 가질 수도 있고, 운동성이 전혀 없는 수구(守舊)로 전락할 수도 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을 계기로 불거진 보수주의의 문제는 그 정체성에 관한 것이다. 물론 정체성의 문제는 탄핵을 계기로 명시적으로 불거졌을 뿐 그 이전부터 꽤 오랫동안 존재한 것이었다. 질문은 그렇다. 한국의 보수가 지키려는 가치는 무엇이며, 그 가치를 보존하고 수호하기 위한 적절한 정책을 제시하고 또 실천하려고 얼마나 노력했는가? 보수가 살 길을 찾고 이 땅에 희망을 주는 집단이 되려면 우선 그것부터 명확히 해야 한다.

한국의 보수 정당은 대한민국이 과거의 극빈 국가에서 현재의 부강한 국가로 성장한 역사로부터 핵심 가치를 추출해 적시하지 못했다. 최근에는 그것이 초래할 결과를 인식하지 못한 채 좌파 정당을 밀어내기 위해 점차 좌경화하는 기이한 현상도 보였다. 경제민주화가 대표적 사례다. 좌파 정당으로서야 원하는 바를 달성했으니 이보다 더한 횡재가 어디 있겠는가? 보수 정당은 대북(對北) 문제를 제외한 거의 모든 분야에서 좌파 정당과 구별되는 것이 없었다.

우연이나 돌발적이라고 보여지는 사건의 배경에도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직·간접적 요인들이 있다. 다만 우리가 그 복잡한 인과관계를 잘 알지 못할 뿐이다. 보수 정당이 정권을 잃은 것은 우연한 사건이 아니라 그런 사건을 유발할 요인들을 스스로 꾸준히 축적해 왔다는 사실을 표현하는 것이다. 특정 사건은 그렇게 축적된 경향성에서 발생하기 때문이다.

보수 일각에서는 박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의 부당함을 개탄한다. 헌법에 명시된 외환, 내란의 범죄가 아닌 한 대통령에 대한 탄핵 조치는 물론 바람직하지 않다.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특정인을 옹호하거나 한쪽을 편들기 위한 변론이 아니다. 현재 한국의 높지 않은 정치 수준에서 탄핵의 상례화를 우려하며 혁명의 결과가 흔히 그렇듯이 언필칭 촛불 혁명이 기존 질서보다 더 나은 것을 만들어 내기보다는 기존 질서마저 파괴하는 데 따른 한국 사회 전체가 지급해야 하는 막대한 비용을 우려하기 때문이다. 오랜 기간 동안 점진적 개선과 발전을 통해 공들여 이룩해온 것들을 혁명이라는 미명 아래 한꺼번에 망가뜨릴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좌파 정권은 물론 오래 지속될 수 없다. 스스로 밥을 벌고 삶을 유지할 수 있는 건강한 논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놓는 대부분의 정책들은 수많은 사람들이 날마다 부산하게 움직이며 살아가는 세상 돌아가는 이치에 어긋나는 것들이다. ‘타인의 재산 침해’ ‘짧은 인간 이성에 의한 거대 사회 설계’ ‘혹독한 가난의 세계인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외침’ ‘인간 세상에 존재할 수 없는 이상향을 향한 동심’ 등이 좌파 정책들의 골자다. 그리고 보수가 중심 가치를 잡지 못하고 우왕좌왕 흔들릴 때 좌파 정당의 이런 캠페인이 대중을 유혹해 사로잡는다.

보수 정당이 좌경화할수록 부지불식간에 좌파 정당의 먹이가 된다. 반면 개인의 생명과 자유, 재산의 보호를 핵심 가치로 하는 보수 정당은 어떤 좌파 정당도 넘볼 수 없는 굳건한 이념 정당이 된다. 지금 포퓰리즘으로 무너져 가는 한국의 민주 정체(政體)도 지킬 수 있다. 대중의 지적 수준이 이를 사려 깊게 식별할 수 있을 만큼 높은 것은 아니지만, 특정 정당이 내건 간판과 알맹이 간의 일관성 여부를 식별할 수 없을 만큼 어리석지도 않다.

한국의 보수 정당이 살아남고 진정으로 국민을 위한 정당이 되려면 우선 지난 과거를 낱낱이 되돌아보고 진지하게 성찰해야 한다. ‘따뜻한 보수’나 ‘포용적 시장경제’라는 알맹이 없는 말장난에서 벗어나야 한다. ‘웰빙 정당’이라는 모욕적인 비아냥도 깨끗이 털어내야 한다. 보수의 분발을 촉구한다.

김영용 < 전남대 명예교수·경제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