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출연연구기관에서 일하는 국내 대표 지진 전문가가 거액의 뇌물을 받아 자금 세탁을 한 혐의로 미국에서 기소돼 유죄평결을 받았다. 이 전문가는 지난해 12월 미국에서 열린 학회에 참석했다가 미국 연방수사국(FBI)에 체포된 뒤 5개월 가까이 미국 구금시설에 억류됐다. 현재는 보석으로 풀려나 현지에서 재판을 받고 있다.

18일 미국의 소리 등에 따르면 미국 연방검찰은 지헌철 전 한국지질자원연구원 지진연구센터장이 100만 달러(약 11억2000만원) 이상의 뇌물을 받아 자금 세탁한 혐의로 기소했다.

지 전 센터장은 지난 1999~2016년 지질연에 지진계를 납품한 미국 키네매트릭스와 영국 걸럽이란 두 지진계 회사에서 미국계좌를 통해 돈을 받고 지진계 도입 계획 등을 포함한 내부 정보와 성능 실험 편의를 제공한 혐의를 받고 있다. 지난해 12월 미국에서 열린 학술행사인 지구물리학연합회 참석했다가 FBI에 체포된 뒤 미 검찰에 기소돼 불구속 상태로 재판을 받아왔다.

사건은 영국 회사인 걸럽의 지분 다툼에서 시작했다. 새로 회사를 인수한 임원진이 미국 계좌를 통해 지 전 센터장에게 입금된 자문료가 뇌물이라며 미 당국에 수사를 의뢰한 것이다. 미 검찰에 따르면 지 전 센터장은 두 기업으로부터 자문비 명목으로 받은 돈을 6차례에 걸쳐 현금으로 보내거나 캘리포니아주 글렌도라에 있는 은행에 입금하도록 했다. 이 중 절반은 뉴욕시 투자은행 계좌로 이체했고, 나머지 절반은 한국 펀드에 입금했다. 미 검찰은 지 전 센터장이 그 대가로 이들 회사 제품이 국내에 원활히 진출하도록 공무원 지위를 남용했다고 보고 있다. 또 지 전 센터장이 뇌물임을 감추기 위해 여러 단계를 거쳤으며, 회사 측에 이메일을 지우도록 하거나 거짓 주소로 가짜 송장을 보내도록 하는 등 다양한 수법을 동원했다고 보고 있다.

지난 12일부터 15일까지 나흘간 진행된 배심원 재판에서 지 전 센터장은 여섯 가지 자금 세탁 관련 혐의 중 다섯 가지는 무죄, 한 가지 혐의는 배심원 유죄평결을 받았다. 유죄평결을 받은 금액은 2016년 자문비조로 받은 5만6000달러다. 배심원단은 지 전 센터장이 대가성임을 인지한 상태에서 돈을 받은 혐의를 인정했다. 미국 자금세탁방지법에 따르면 자금세탁을 한 경우 최대 10년의 징역형을 받을 수 있다.

지 전 센터장의 변호인은 미 검찰의 기소가 한국의 뇌물수수 금지법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며 한국 법을 안다면 미 검찰이 기소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변호인 측은 지난 1999년과 2003년 국내 지진 관측 장비 현대화 과정에서 두 회사와 장비 도입을 위한 기술자문 협약을 체결했고 국내 도입과정에 따른 문제 해결과 성능향상을 위해 자문을 한 정당한 대가라고 주장하고 있다. 또 지 전 센터장이 정부출연연구기관 연구원 신분으로 정식 공무원이 아니라고 내세웠다.

국내 출연연에는 2011년 외부 기관으로 받은 자문료를 신고하도록 하는 규정이 처음 도입됐다. 지질연 관계자는 “지질연은 1999년과 2003년 두 제작회사와 포괄적 형태의 기술협약을 맺었고 두 회사는 지진계 도입 이후 발생한 여러 문제 해결에 도움을 준 지 전 센터장에게 여러 차례 자문료를 지급했다”며 “당시 규정이 없어 자문료를 개인적으로 받은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지 센터장이 2011년 규정이 생긴 이후에도 자문료를 신고하지 않았다”며 “관련 규정에 따라 문책이 이뤄질 것”이라고 말했다.

지질연을 관할하는 주무부처인 미래창조과학부는 올해 2월께 사실을 인지하고 지 전 센터장에 대한 감사를 진행 중이다. 미래부는 감사 결과 위법사항이 발견되면 한국 검찰에 수사를 의뢰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미 연방검찰의 입장은 단호하다. 샌드라 브라운 미 연방검찰 대변인은 “미국의 금융 시스템이 부패행위의 수단으로 악용돼서는 안 된다”며 “이번 기소는 전 세계에 경종을 울린 것”이라고 강조했다. 올해 들어 미국에서 외국 정부 관계자가 뇌물수수 등으로 유죄평결을 받은 것은 이번이 두 번째다. 지난 5월 마모드 티암 전 기니 광업 장관이 850만 달러를 뇌물로 받아 돈세탁한 혐의로 뉴욕에서 체포돼 법원으로부터 유죄평결을 받았다.

미 연방법원은 지 전 센터장에게 뇌물을 준 혐의를 받은 미국과 영국 두 회사에 무죄를 선고했다. 뇌물을 준 기업은 없고 받은 사람만 있는 셈이다. 지 전 센터장은 불구속 상태에서 재판을 받았지만, 현재 연방검찰은 구속 여부에 대해서도 심리를 요청한 상황이다. 구속 여부 결과는 오는 20일 나온다. 최종 선고 예정일은 오는 10월 2일이며, 로스앤젤레스 중앙지방법원은 지 전 센터장에서 대한 양형을 결정할 예정이다. ​변호인단은 지 전 센터장이 한국에서 지진 연구가로서 많은 이들의 목숨을 구하는 데 기여했다는 점을 거론하며 이번 일로 그의 재정이나 명성에 큰 타격을 입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지 전 센터장의 변호인은 현지 인터뷰에서 항소 의지를 밝히고 반드시 무죄를 입증하겠다고 강조했다. 박근태 기자 kunt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