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기억은 사랑의 전제조건 아니다"
알츠하이머병(치매)에 걸린 엄마는 잠옷 바람으로 집을 나갔다. 아빠는 엄마를 찾으러 나갔다가 계단에서 구르고 말았다. 엄마가 동네 거리를 헤매던 그 시간 아빠는 병원에 실려갔다. 아빠는 기도 삽관을 하는 과정에서 폐에 구멍이 생겼다. 이후 합병증이 생겨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엄마는 아빠의 얼굴을 끝내 알아보지 못했다. 딸은 그런 엄마를 바라보며 당혹스럽기도 하고, 좌절하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깨달았다. 엄마에게 기억이 남아 있었다면 아빠의 죽음을 견뎌내지 못했을 것을 말이다. 어쩌면 장례식장에서 엄마에게 그 병은 위장된 축복이 아니었을까.

《엄마의 기억은 어디로 갔을까》는 치매에 걸린 부모, 그리고 이를 지켜봐야만 하는 자식의 이야기를 담담하면서도 묵직하게 전한다. 저자는 미국 출신 교육자이자 작가인 낸시 데포다. 그는 엄마의 알츠하이머병을 견뎌낸 경험을 토대로 그 고된 여정을 떠나야만 하는 사람들에게 따뜻한 위로를 건넨다.

치매만큼 인간의 존엄성을 무너뜨리는 질병도 없다. 진행 속도가 느린 병의 특성상 환자는 스스로 변해가는 모습에 어찌할 바를 몰라 한다. 가족의 고통 또한 감당하기 힘들다.

비극적인 사고로 아빠를 잃은 뒤 치매를 앓는 엄마를 돌보게 된 데포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변해가는 엄마의 모습에 좌절하고 슬퍼했다. 잘못된 것을 바로잡기 위해 다그치기도 했다. “나는 엄마의 엄마가 아니라 엄마의 딸이야. 엄마가 어디에 사는지, 몇 살인지 기억해야 해. 공공장소에서 옷을 벗어도 안돼….” 하지만 늘어나는 잔소리에도 행동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조목조목 설득하려 할수록 엄마는 점점 더 혼란스러워했다. 그러면 데포는 또 참지 못하고 화를 내곤 했다.

그런 과정의 반복 끝에 엄마는 결국 하늘로 떠났다. 저자는 엄마를 계속 다그쳤던 점이 가장 후회스러웠다고 고백한다. “바로바로 엄마를 용서하고 더 많이 달래주지 못했다. 진심으로 용서했을 때는 엄마는 이미 말기 상태라 용서했다는 사실 자체를 알지 못했다.”

이 힘든 길을 똑같이 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는 진심 어린 조언을 건넨다. “사랑에는 기억마저 필요하지 않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엄마가 기억을 잃었다고 해서 사랑은 끝나지 않았다. 기억은 부모님이 서로에 대해 품었던 사랑과 부모님에 대한 사랑의 전제 조건이 아니다. 분명한 건 엄마는 아빠를 깊이 사랑했고, 자신의 부모님과 자식들을 사랑했다는 사실이다.”

김희경 기자 hk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