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자유무역협정(FTA) 개정 협상 등 통상 현안이 산적한 가운데 통상교섭본부장 인선이 늦어지고 있다. 지난 25일 국무회의에서 정부조직법이 최종 의결된 직후 발표될 것으로 예상됐지만 청와대는 “검증 절차를 진행하고 있다”며 인사 발표를 미루고 있다. 유력 후보를 두고 특정 시민사회단체가 강하게 반대하고 나서면서 청와대가 고심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얘기가 나온다.

청와대 관계자는 26일 “통상교섭본부장 내정설은 확정된 것이 아니다”며 “검증하는 데 시간이 더 걸릴 것 같다”고 말했다. 이날 노무현 정부 시절 한·미 FTA 체결을 주도한 김현종 전 통상교섭본부장이 신임 통상교섭본부장으로 내정됐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청와대에서 부인한 것이다.

김 전 본부장은 2004년 노무현 전 대통령이 통상교섭본부장에 임명하면서 한·미 FTA 협상을 본격 추진했다. 이후 유엔대사를 거쳐 삼성전자 해외법무 사장을 지냈다. 문재인 대선후보 시절 외교 자문그룹인 ‘국민아그레망’에 이름을 올리면서 새 정부에서 통상분야 주요 직책을 맡을 것이란 예상이 나왔다.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앞서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통상교섭본부장은 최고 전문가로 정해야 한다. 인력풀이 넓지 않아 이미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다”고 해 김 전 본부장의 내정설에 힘이 실렸다.

하지만 김 전 본부장 내정설이 퍼지자 농민·시민단체들의 반발이 거세지고 있다. 한·미 FTA를 주도했다는 이유에서다. 이날 진보네트워크센터, 건강권실현을위한보건의료단체연합,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등 9개 시민단체는 공동성명을 내고 “김현종을 통상교섭본부장으로 임명하는 것은 노무현 정부의 오류를 되풀이하는 첫걸음”이라며 “김현종은 대기업 이익을 위해 국내 공공정책을 말살한 인물”이라고 비난했다. 전국농민회총연맹도 전날 ‘문재인 대통령에게 보내는 농민들의 긴급 공개 호소문’을 통해 “문 대통령의 김현종 임명은 촛불 혁명을 배신한 것”이라며 “김현종 씨는 농민의 고통과 호소를 외면하고 한·미 FTA를 추진한 장본인으로서 일고의 반성도 없이 삼성에 입사해 관피아의 본모습을 유감없이 드러낸 사람”이라고 했다.

청와대가 표면적으로 ‘깐깐한 검증’을 이유로 대고 있지만 결국 시민단체의 ‘눈치’를 보는 것 아니냐는 의혹이 나온다. 통상교섭본부 설치는 문 대통령 공약 사항인 데다 문 대통령이 직접 챙긴 것으로 알려졌다. 문 대통령은 당초 외교부 산하에 통상교섭본부를 둘 생각이었지만 FTA 등 업무 연속성이 중요하다는 경제 참모들의 건의에 산업통상자원부에 남기기로 했다. 차관급인 통상교섭본부장은 영문명을 장관(minister)으로 쓰게 하는 등 위상도 강화했다. 문 대통령이 각별히 신경 써온 만큼 인선 지연이 검증 문제가 아니라 시민단체 반발을 의식한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는 이유다.

김석동 전 금융위원장과 안현호 산업통상자원부(옛 지식경제부) 1차관도 각각 금융위원장과 일자리 수석 인선 과정에서 석연치 않은 이유로 내정이 철회된 것은 노조와 시민단체의 반대 때문이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정부 관계자는 “당장 미국이 FTA 개정 협상을 제안한 상황에서 국익이 아니라 시민단체의 입김에 인사가 좌지우지될까 걱정”이라고 했다.

조미현 기자 mwis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