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포럼] 성호 이익의 문집이 밀양에서 간행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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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계량·김종직을 배출한 유학자의 고향
밀양은 조선 전기부터 알려진 출판 도시
남인의 역사 문집 간행 과정에 잘 나타나
김문식 < 단국대 교수·사학 >
밀양은 조선 전기부터 알려진 출판 도시
남인의 역사 문집 간행 과정에 잘 나타나
김문식 < 단국대 교수·사학 >
경상남도 밀양은 낙동강 하류에 위치한 교통의 요지로 유명한 학자를 많이 배출했다. 조선 전기를 대표하는 학자로는 변계량과 김종직을 꼽을 수 있다. 변계량은 태종 때 대제학을 지낸 학자로 《태조실록》과 《고려사》를 편찬하고 세자로 있던 양녕대군을 가르쳤다. 김종직은 성종대에 활동한 사림파의 대표적 학자다. 그러나 연산군 때 그가 지은 <조의제문>이 문제가 돼 무오사화가 발생했고, 김일손 같은 제자들이 피해를 입었다. 유학자들의 고향인 밀양은 조선 전기부터 경상도를 대표하는 출판 도시였다.
성호 이익은 조선 후기에 실학을 일으킨 남인계 학자로 경기 안산에서 일생을 보냈다. 그가 평생토록 지은 글을 모은 문집은 안산이 아니라 밀양에서 간행됐다. 조선시대도 아닌 일제 강점기에 밀양에서 이익의 문집을 2종이나 간행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이익이 사망한 뒤 그의 문집을 간행하는 과정에 남인계 인사들의 150년 역사가 잘 나타난다.
이익의 문집을 첫 번째로 정리한 사람은 조카인 이병휴다. 1774년 이병휴는 충청도 덕산에서 숙부의 문집을 정리했다. 이익이 세상을 뜬 뒤 그 집안 후손들은 덕산으로 옮겨가서 살았다. 이병휴가 정리한 문집은 총 38책이었고 문집을 간행할 때 대본이 됐다. 1890년 이남규는 이병휴가 정리한 70권을 50권으로 줄였다. 이렇게 원고를 줄인 이유는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서였다. 목판을 깎아 인쇄하려면 많은 비용이 필요했으므로 핵심 내용만 간추려 간행하는 것이 당시의 관례였다. 이남규는 이익의 학통을 계승한 학자로 충청도 예산에서 살았다. 따라서 이익의 문집 원고는 모두 충청도 지역에서 작성됐다.
이병휴가 이익의 문집 원고를 정리하자 이를 간행하려는 움직임이 꾸준히 나타났다. 그러나 실제로 문집이 간행된 것은 일제가 지배하던 20세기 전반이었다. 1917년 밀양의 퇴로리에서 이익구와 이병희가 주도해 《성호선생문집》을 목판본으로 간행했다. 이남규가 간추린 원고를 대본으로 한 27책 분량이었고, 간행 비용은 충청도와 경상도에 사는 남인계 인사들이 성금을 모아 충당했다. 이 문집을 간행할 때 이병휴의 원고에서 많은 부분이 생략된 것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나타났고, 이들은 결국 새로운 문집을 간행했다.
1922년 밀양의 사포리에서 안희원과 김호승이 주도해 《성호선생전집》을 목판본으로 간행했다. 이병휴가 정리한 원고를 대본으로 해 36책이 됐고, 비용은 경기도와 경상도에 사는 남인계 인사들이 성금을 모았다. 편찬을 주도한 안희원은 밀양 출신으로 서울을 오갔던 사람이고, 김호승은 서울 출신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두 문집을 간행할 때 양쪽에 모두 성금을 낸 사람은 한 사람밖에 없었다. 이 무렵 남인계 인사들은 문집의 편집 방식을 놓고 상당한 갈등이 있었다.
이익의 문집을 간행할 때 경기도, 충청도, 경상도에 흩어져 살던 남인계 인사들은 함께 모여서 의논했고, 목판을 제작할 때는 조금씩 성금을 내 작업을 지원했다. 그러나 문집을 편집하는 방식에 의견 차이가 있었고 결국은 2종의 문집으로 간행됐다. 이들이 문집을 간행한 이유는 ‘근래의 유종(儒宗)인 성호 선생의 문장을 널리 보급하여 선생의 도(道)가 사라지지 않고 알려지게 하기’ 위해서였다. 일제 강점기에 밀양의 인사들은 이익의 문집을 간행해 보급함으로써 자신들의 정신적 자산을 보존하려고 했다. 이에 따라 밀양은 조선시대와 일제 강점기에 주목할 만한 출판문화를 가지게 됐다.
그럼 이익의 문집 원고와 목판은 어떻게 됐을까? 이병휴가 정리한 최초의 원고는 후손이 보관해오다가 국립중앙도서관에 기증했다. 《성호선생문집》과 《성호선생전집》을 인쇄했던 목판은 경상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돼 밀양시립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박물관에서는 2층 전시실에 특별히 목판고를 만들어 관람객이 목판을 볼 수 있게 했다.
한국고전번역원은 올해 《성호선생전집》을 대본으로 하는 번역 사업을 마무리했다. 밀양을 찾는 방문객들은 시립박물관에 들러 이익 문집의 목판을 구경했으면 좋겠다.
김문식 < 단국대 교수·사학 >
성호 이익은 조선 후기에 실학을 일으킨 남인계 학자로 경기 안산에서 일생을 보냈다. 그가 평생토록 지은 글을 모은 문집은 안산이 아니라 밀양에서 간행됐다. 조선시대도 아닌 일제 강점기에 밀양에서 이익의 문집을 2종이나 간행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이익이 사망한 뒤 그의 문집을 간행하는 과정에 남인계 인사들의 150년 역사가 잘 나타난다.
이익의 문집을 첫 번째로 정리한 사람은 조카인 이병휴다. 1774년 이병휴는 충청도 덕산에서 숙부의 문집을 정리했다. 이익이 세상을 뜬 뒤 그 집안 후손들은 덕산으로 옮겨가서 살았다. 이병휴가 정리한 문집은 총 38책이었고 문집을 간행할 때 대본이 됐다. 1890년 이남규는 이병휴가 정리한 70권을 50권으로 줄였다. 이렇게 원고를 줄인 이유는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서였다. 목판을 깎아 인쇄하려면 많은 비용이 필요했으므로 핵심 내용만 간추려 간행하는 것이 당시의 관례였다. 이남규는 이익의 학통을 계승한 학자로 충청도 예산에서 살았다. 따라서 이익의 문집 원고는 모두 충청도 지역에서 작성됐다.
이병휴가 이익의 문집 원고를 정리하자 이를 간행하려는 움직임이 꾸준히 나타났다. 그러나 실제로 문집이 간행된 것은 일제가 지배하던 20세기 전반이었다. 1917년 밀양의 퇴로리에서 이익구와 이병희가 주도해 《성호선생문집》을 목판본으로 간행했다. 이남규가 간추린 원고를 대본으로 한 27책 분량이었고, 간행 비용은 충청도와 경상도에 사는 남인계 인사들이 성금을 모아 충당했다. 이 문집을 간행할 때 이병휴의 원고에서 많은 부분이 생략된 것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나타났고, 이들은 결국 새로운 문집을 간행했다.
1922년 밀양의 사포리에서 안희원과 김호승이 주도해 《성호선생전집》을 목판본으로 간행했다. 이병휴가 정리한 원고를 대본으로 해 36책이 됐고, 비용은 경기도와 경상도에 사는 남인계 인사들이 성금을 모았다. 편찬을 주도한 안희원은 밀양 출신으로 서울을 오갔던 사람이고, 김호승은 서울 출신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두 문집을 간행할 때 양쪽에 모두 성금을 낸 사람은 한 사람밖에 없었다. 이 무렵 남인계 인사들은 문집의 편집 방식을 놓고 상당한 갈등이 있었다.
이익의 문집을 간행할 때 경기도, 충청도, 경상도에 흩어져 살던 남인계 인사들은 함께 모여서 의논했고, 목판을 제작할 때는 조금씩 성금을 내 작업을 지원했다. 그러나 문집을 편집하는 방식에 의견 차이가 있었고 결국은 2종의 문집으로 간행됐다. 이들이 문집을 간행한 이유는 ‘근래의 유종(儒宗)인 성호 선생의 문장을 널리 보급하여 선생의 도(道)가 사라지지 않고 알려지게 하기’ 위해서였다. 일제 강점기에 밀양의 인사들은 이익의 문집을 간행해 보급함으로써 자신들의 정신적 자산을 보존하려고 했다. 이에 따라 밀양은 조선시대와 일제 강점기에 주목할 만한 출판문화를 가지게 됐다.
그럼 이익의 문집 원고와 목판은 어떻게 됐을까? 이병휴가 정리한 최초의 원고는 후손이 보관해오다가 국립중앙도서관에 기증했다. 《성호선생문집》과 《성호선생전집》을 인쇄했던 목판은 경상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돼 밀양시립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박물관에서는 2층 전시실에 특별히 목판고를 만들어 관람객이 목판을 볼 수 있게 했다.
한국고전번역원은 올해 《성호선생전집》을 대본으로 하는 번역 사업을 마무리했다. 밀양을 찾는 방문객들은 시립박물관에 들러 이익 문집의 목판을 구경했으면 좋겠다.
김문식 < 단국대 교수·사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