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이 문화예술계 지원 배제 명단인 이른바 ‘블랙리스트’를 작성·실행하게 한 혐의로 유죄를 선고받았다. 정치 권력의 뜻에 따라 지원금 지급을 차별화한 것은 법이 보장하는 문화 활동에서 차별받지 않을 권리를 침해한 권한남용이라는 것이 재판부 판단이다. 구속 기소된 조윤선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국회에서 위증한 혐의만 인정돼 집행유예로 석방됐다.

◆김기춘-조윤선, 엇갈린 운명

서울중앙지방법원 형사합의30부(부장판사 황병헌)는 27일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등의 혐의로 기소된 김 전 실장에게 징역 3년의 실형을 선고했다. 김종덕 전 문체부 장관은 징역 2년, 김상률 전 교육문화수석은 징역 1년6개월의 실형을 각각 받았다.

조윤선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조윤선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재판부는 김 전 실장에 대해 “가장 정점에서 지원 배제를 지시하고 실행 계획을 승인했다”고 판단했다. ‘김 전 실장 지시→정무수석실의 문화·예술인 성향 분류와 블랙리스트 하달→문체부 실행’ 순으로 지원 배제가 이뤄졌다는 특검 주장을 받아들인 것이다. 재판부는 “지원 배제 행위가 은밀하고 집요한 방법으로 장기간에 걸쳐 실행됐다”고 지적했다.

김 전 실장 등은 블랙리스트 작성 등이 정부 정책의 일환이라고 주장했지만 재판부는 “좌편향에 대한 시정이었다면 적법한 절차의 틀 속에서 투명하게 추진했어야 한다”며 “그 잣대로 사용된 야당 지지, 세월호 시국 선언 등은 국가안보 차원을 위한 기준과도 무관하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김 전 장관과 김 전 수석이 노태강 당시 문체부 체육국장(현 2차관)의 사직을 강요한 것도 직권남용으로 판단했다.

다만 재판부는 조 전 장관의 직권남용에 대해선 “정무수석으로서 지원 배제에 관여하는 것을 지시하거나 이를 보고받고 승인하는 등의 행위를 담당했다고 인정하기 어렵다”며 무죄로 결론내렸다. 조 전 장관은 국회 국정감사에서 ‘블랙리스트가 존재하지 않는다’며 거짓 증언한 혐의만 유죄로 인정돼 집행유예를 받았다.

법원 "블랙리스트는 헌법정신 위배·직권남용"
재판부는 피고인들의 강요 혐의는 모두 무죄로 판단했다. 지원 배제 과정에서 형법상 협박으로 볼 만한 행위는 없었다는 설명이다. 판결 후 김 전 실장의 변호인인 김경종 변호사는 “(김 전 실장이) 직접 블랙리스트에 관해 지시하지 않았다”며 “재판부는 (범죄 행위가) 전체적으로 있다고 봤지만 이것이 직권남용인지에 대해선 변호인단과 의견이 다르다”고 강조했다. 조 전 장관은 구치소를 나서며 “재판에서 성실하게 대답했다. (재판부가) 저에 대한 오해를 풀어줘서 감사하게 생각한다”고 답했다.

◆박 전 대통령 재판에 영향 관심

재판부는 문화예술계 지원 배제 혐의에서 김 전 실장과 김 전 장관, 김 전 수석 등이 공모했다는 점은 인정했다. 하지만 이들의 범행을 박근혜 전 대통령이 지시 또는 지휘해 공모했다는 점에 대해서는 인정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김 전 실장 등이 박 전 대통령의 구체적인 지시 없이 독단적으로 문화예술계 지원 배제 범행을 실행했다는 의미다. 재판부는 또 최순실 씨에 대해서도 김 전 실장 등과 문화예술계 지원 배제 범행을 공모했거나 실행 행위에 가담했다고 인정할 증거가 없다고 판단했다.

반면 노 전 국장에 대한 사직 강요 혐의와 관련해서는 박 전 대통령이 공모했다고 판단했다. 증거의 상당 부분과 주요 증인이 중복되는 만큼 박 전 대통령과 최씨 재판부가 유·무죄를 판단하는 데 참고자료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상엽/고윤상 기자 ls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