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향기] '캘리포니아 드림' 을 꿈꾸며 달렸던 미국 최초의 횡단도로 '루트66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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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아라 작가의 좌충우돌 미국 여행기 (5) 붉은 고원·깊은 협곡 애리조나
1930년대 대공황때 희망 찾아 가던 길
존 스타인벡은 '분노의 포도'에서 루트66을 '모든 길의 어머니 도로'로 불러
냇킹 콜, 밥 딜런도 추억의 노래 만들어
초자연적인 기운 발산하는 땅 세도나
붉은색 봉우리는 거대한 조각품 보는 듯
산악바이크·사륜 오토바이 투어 '짜릿'
에어포트 로드 따라 산길 오르면 정상
파도처럼 일렁이는 산맥은 한 폭의 절경
플래그스태프로 올라가는 89A 도로는 미국에서도 경치 아름답기로 손꼽혀
슬라이드 록 주립공원은 대표적 여름휴양지
1930년대 대공황때 희망 찾아 가던 길
존 스타인벡은 '분노의 포도'에서 루트66을 '모든 길의 어머니 도로'로 불러
냇킹 콜, 밥 딜런도 추억의 노래 만들어
초자연적인 기운 발산하는 땅 세도나
붉은색 봉우리는 거대한 조각품 보는 듯
산악바이크·사륜 오토바이 투어 '짜릿'
에어포트 로드 따라 산길 오르면 정상
파도처럼 일렁이는 산맥은 한 폭의 절경
플래그스태프로 올라가는 89A 도로는 미국에서도 경치 아름답기로 손꼽혀
슬라이드 록 주립공원은 대표적 여름휴양지
캘리포니아의 동쪽 끝, 굽이치는 콜로라도강 너머 애리조나주가 있다. 파도가 넘실대던 푸른 바다는 사라지고 눈앞에는 붉은 고원과 깊은 협곡이 장엄하게 펼쳐진다. 이 땅에 자라나는 것은 달콤한 향의 포도나무가 아니라 강하고 우직한 사구아로 선인장이다. 강 하나를 건넜을 뿐인데 마주하는 풍경은 이다지도 다르다. 미국 역사의 희로애락이 담긴 어머니의 길, 루트 66을 가로지른다. 사막 깊숙한 곳을 달려 도착한 곳은 힐링의 땅 세도나다. 지구의 신성한 기운이 가득하다는 붉은 바위 사이를 거닐며 긴 여정에 쉼표 하나를 찍었다.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다 한들 이보다 더 달콤할까.
미국의 심장을 관통하는 역사적인 길
미 대륙에 뻗어 있는 수많은 도로 중에서도 유독 특별한 길이 있다. 일명 루트 66이라고 불리는 이 도로는 1926년 완공된 미국 최초의 횡단 도로이자 미국 역사와 문화가 담긴 상징적인 길이다.
1930년대 대공황과 극심한 모래폭풍(Dust Bowl)으로 고통받던 농민들은 고향을 등지고 희망을 좇아 루트 66에 올라섰다. 아메리카 원주민을 무력으로 몰아내고 차지한 땅이지만 약자가 사라진 자리에는 또 다른 약자가 있을 뿐이다. 대지주와 은행, 트랙터에 밀려난 소작농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캘리포니아를 향해 흙먼지 가득한 도로로 쏟아져 나왔다. 서부를 향한 끝없는 행렬을 따라 상점과 주유소가 들어섰고 주변에는 작은 마을들이 생겨났다. 루트 66은 가난, 좌절, 절망 그 안에 남아 있는 삶에 대한 끈질긴 열망을 먹고 자란 도로다. 미국의 대문호 존 스타인벡은 이 시대를 배경으로 한 소설 《분노의 포도》에서 루트 66을 ‘모든 길의 어머니 도로(Mother Road)’라고 표현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경제가 풍요로워지자 루트 66은 모험을 찾아 떠나는 청춘들로 새롭게 북새통을 이뤘다. 비트 세대를 이끌었던 앨런 긴즈버그와 잭 케루악을 비롯해 냇킹 콜, 밥 딜런, 롤링 스톤스 등 수많은 예술가도 이 길을 추억하고 사랑했다.
그러나 새로운 고속도로의 등장으로 낡고 오래된 길을 찾는 발길은 점점 뜸해졌다. 결국 1985년에는 고속도로의 지위를 상실하고 지도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들의 추억과 향수가 담긴 길을 잃고 싶지 않았다. 시민단체와 정부의 끈질긴 노력과 지원 끝에 2003년 일부 구간이 ‘히스토릭 루트 66(Historic Route 66)’이라는 이름으로 복원됐다. 미 동부 시카고에서 시작되는 3940㎞의 여정은 일리노이, 미주리, 캔자스, 오클라호마, 텍사스, 뉴멕시코 그리고 애리조나를 지나 캘리포니아 샌타모니카 해변에 도착해서야 비로소 끝난다. 루트 66을 여행하는 방법에 정답은 없다. 어디에서 시작하든 어느 방향으로 향하든 무엇을 느끼든 그것은 각자의 몫이다.
추억을 먹고 사는 길 위의 낡은 상점 킹먼(Kingman)에서 셀리그먼(Seligman)까지 이어진 구간을 달린다. 황량한 대지 위, 있는 것이라곤 오직 길뿐인 이곳에 낡은 상점 하나가 생뚱맞게 서 있다. ‘핵베리 제너럴 스토어(Hackberry General Store)’라고 쓰인 간판이 눈에 들어온다. 문을 열고 상점 안으로 들어서자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 여행을 온 것 같은 광경이 펼쳐진다. 추억의 스타가 등장하는 포스터와 촌스러운 마네킹, 루트 66과 관련한 기념품까지 온갖 잡동사니로 가득하다. 먼저 들어와 있던 미국인 노부부가 아련한 눈빛으로 상점 구석구석을 어루만진다. 비록 나의 역사와 문화는 아니지만,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을 추억한다는 것이 무슨 기분인지는 알기에 마음이 뭉클하다.
밖으로 나와 주변을 둘러본다. 더 이상 달리지 않는 클래식 자동차, 녹슬어 버린 주유 기계, 유리창을 빼곡하게 채운 각종 스티커, 삐거덕대며 흔들리는 루트 66 표지판이 시간 속에 굳어 있다. 떠나기 전 상점 앞에 마련된 나무 의자에 앉아 커피를 마신다. ‘개척자(Frontier)’라고 적힌 공중전화 박스 옆에 홀로 앉혀진 인디언 인형이 유독 눈에 밟힌다. 다시 루트 66에 오른다. 모두가 서쪽을 향해 달린 그 길을 오늘의 여행자는 동쪽을 바라보며 달린다. 반대편 차선으로 이 길 위에 새겨진 슬프고 기쁜 얼굴들이 스쳐 지나가는 듯하다.
신들이 사는 신성한 붉은 바위의 땅
그랜드 캐니언 사우스림에서 자동차로 약 두 시간 떨어진 곳에 세도나가 있다. 해발 1320m 사막지대에 있는 작은 마을이지만, 연간 수백만 명이 찾는 오아시스 같은 곳이다. 이른 아침 숙소 발코니로 나가 세도나의 첫 모습을 맞이한다. 밤새 어둠에 숨어 있던 풍경들이 따스한 햇볕을 받으며 조금씩 고개를 내밀기 시작한다. 푸른 숲을 에워싼 거대한 사암은 세상 모든 붉은색을 담고 있는 듯 신비롭고, 각기 다른 모양의 봉우리들은 마치 거대한 조각품을 보는 듯 경이롭다. ‘그랜드 캐니언을 창조한 것이 신이라면, 그 신들이 사는 곳은 세도나다’라는 안내 책자의 문구가 결코 과장이 아니었음을 깨닫는다.
예로부터 세도나가 자리한 베르데 계곡(Verde Valley)은 야바파이, 아파치족을 비롯한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성스러운 땅이었다. 그러나 서부 개척 시대가 열리면서 백인들이 몰려와 땅을 빼앗았다. 원주민들은 끝까지 저항했지만 결국 패배했고, 1876년 남동쪽으로 280㎞ 떨어진 산카를로스 인디언 보호구역으로 강제 유배당했다. 같은 해 오크 크리크 캐니언(Oak Creek Canyon)에 최초의 백인이 정착했다. 이후 계곡 일대는 백인 거주지가 됐고, 세도나라는 새로운 지명이 붙었다. 이 지역에 최초로 설립된 우체국 국장 부인의 이름인 세도나 쉬네블리(Sedona Shnebly)에서 따온 것이었다.
세도나가 세상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은 1980년대 이후다. 천혜의 자연환경과 온화한 기후도 한몫했지만, 지구의 전기적 에너지인 ‘볼텍스(Vortex)’가 이곳에서 발생한다고 알려졌기 때문이다. 동양적 관점에서 본다면 볼텍스는 에너지가 들어오고 나가는 ‘혈’ 혹은 ‘기’라고 일컫는 초자연적인 힘을 의미한다.
전 세계에는 21개의 볼텍스 포인트가 있는데 그중 무려 4개가 이 작은 마을에 모여 있다고 전해진다. 벨 록(Bell Rock), 캐시드럴 록(Cathedral Rock), 보인턴 캐니언(Boynton Canyon), 에어포트 메사(Airport Mesa)가 바로 그곳이다. 이 명당들을 찾아 나서는 것으로 본격적인 세도나 여행을 시작한다. 가장 먼저 벨 록 구역을 찾는다. 종 모양을 빼닮은 거대한 붉은 바위와 코트 하우스 뷰트(Courthouse Butte)라는 이름의 넓적한 바위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벨 록은 4개의 볼텍스 명당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볼텍스를 발산하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과학적 진위는 알 수 없으나, 옹골차고 늠름한 자태가 인상적인 것은 확실하다.
세도나의 기를 찾아서 그저 바위 앞에서 기념사진을 남기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 세도나를 대표하는 명소 주변에는 다양한 트레일 코스가 조성돼 있다. 벨 록 트레일처럼 남녀노소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코스부터 비교적 어려운 캐시드럴 록 트레일, 윌슨 마운틴(Wilson Mountain) 트레일까지 난이도도 다양하다. 세도나의 거친 면모를 느끼고 싶다면 산악 바이크나 사륜 오토바이를 이용한 투어를 즐겨도 좋다.
에어포트 루프 트레일(Airport Loop Trail)을 걸어 보기로 한다. 또 다른 볼텍스 포인트인 에어포트 메사 주변을 둥그렇게 도는 코스다. 에어포트 로드(Airport Rd.)를 따라 구불구불한 산길을 올라가면 유료 주차장과 전망대가 나온다. 이곳에서부터 트레일이 시작된다. 붉은 자갈과 돌덩이들이 가득한 트레일을 오르락내리락하다 보면 정상으로 오를 수 있는 서밋 트레일과 만난다. 짧지만 다소 험하고 가파른 구간이다.
붉은 용암이 흐르다 순간적으로 굳어 버린 듯한 사암의 틈새를 열심히 오른다. 마지막 바위를 딛고 정상에 서자 세도나의 엄청난 절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세상 모든 근심이 눈 녹듯 사라지는 듯하다. 파도의 물결처럼 일렁이는 산맥은 마치 단풍이라도 든 것처럼 화려하다. 언뜻 보면 사방에 무지개가 핀 것 같은 착각도 든다. 주변을 둘러보니 몇몇 사람들이 바위 끄트머리에 앉아 명상하거나 독서를 하고 있다. 신발과 양발을 벗어 던지고 가부좌를 틀고 앉아 본다. 바위의 시원한 감촉과 따뜻한 햇볕 그리고 적당한 바람이 느껴진다.
볼텍스를 제대로 느끼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왠지 모를 평온함이 든다. 앞만 보며 바쁘게 달려오던 여정에 작은 쉼표를 찍는 기분이다. 한참을 앉아 세도나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자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이 세상에 아름답지 않은 곳은 없다. 그것을 찾아내는 것은 온전히 내 몫이다. 마음먹기에 따라 그 어느 곳이든 세도나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붉은 바위 위에 세워진 인간의 믿음
다운타운으로 내려와 잠시 휴식을 취한다. 미 서부를 대표하는 휴양지답게 거리는 카페와 레스토랑, 여행객들로 가득 찼다. 세도나는 예술가들이 많이 사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틀라케파케 빌리지(Tlaquepaque Village)나 개성 넘치는 갤러리들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다음 목적지인 성 십자가 예배당(Chapel of The Holy Cross)으로 향했다. 구불구불한 도로를 10분쯤 따라 들어가자 바위 사이에 세워진 독특한 모양새의 건축물 하나가 보인다. 외벽은 붉은 사암과 비슷한 색으로 칠해졌고, 여느 성당이나 교회처럼 거대하지 않은 소박하고 단출한 모습이다. 자연을 넘어서지 않으려는 겸손한 믿음 때문일까, 인공물임에도 불구하고 주변 경관과 제법 잘 어울린다. 나선형 모양의 경사길을 오르면 예배당의 입구에 도달한다. 전면 유리창을 통해 쏟아지는 빛이 내부를 가득 채웠다. 창밖으로 펼쳐진 세도나의 그림 같은 풍경에 신성함이 배로 느껴진다.
예배당에서 내려와 플래그스태프(Flagstaff)로 올라가는 89A 도로를 달린다. 미국에서도 경치가 아름답기로 손꼽히는 도로다. 우거진 숲과 붉은 바위 사이로 흐르는 계곡물은 이곳이 사막지대임을 잠시 잊게 한다. 여름이 되면 얼마나 더 싱그러워질지 감히 상상이 가지 않는다. 오크 크리크 캐니언에 있는 슬라이드 록 주립공원(Slide Rock State Park)은 미국을 대표하는 여름 휴가지다. 사암으로 이뤄진 천연 풀장에서 물놀이와 캠핑 등을 즐길 수 있다. 계곡물에 반영된 세도나의 풍경이 특히 아름다워 사진가들도 많이 찾는다.
세도나를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오크 크리크 전망대를 찾는다. 코코니노 국유림(Coconino National Forest)과 주변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전망대 한쪽에는 원주민들이 예술품을 팔고 있다. 적갈색 깃털이 달린 조그마한 드림캐처를 하나 샀다. 고맙다고 인사하는 주인아저씨에게 이곳이 무척이나 맘에 든다고 말했다. 그가 미소를 짓자 얼굴에 굵직한 주름이 패었다. 거친 사막에서 억겁의 세월을 담대하게 견뎌낸 세도나의 붉은 바위처럼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새로운 여정을 떠나는 발길이 한결 가볍다.
여행 팁
애리조나 루트 66: 킹먼~셀리그먼 구간은 약 120㎞에 이른다. 40번 주간도로를 타고 가다가 킹먼 혹은 셀리그먼에서 루트 66 표지판을 따라 빠져야 한다. 핵베리 제너럴 스토어는 피치스프링스와 킹먼 중간 지점에 있다. 입장료는 따로 없으며 일반적으로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운영된다. 여유가 된다면 셀리그먼과 윌리엄스 같은 마을들도 함께 들러보는 것이 좋다.
세도나: 애리조나 주도 피닉스에서는 자동차로 약 2시간, 플래그스태프에서는 1시간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한국에서는 미국 로스앤젤레스공항을 거쳐 국내선을 이용해 피닉스로 간 뒤 렌터카 혹은 버스를 이용해야 한다. 로스앤젤레스에서 자동차로 가면 약 8시간이 걸린다. 슬라이드 록 주립공원의 입장료는 시즌별로 다르며 차량당 10~30달러다. 공원 개방시간이 정해져 있으니 방문 전 미리 확인하는 것이 좋다.
세도나=글·사진 고아라 여행작가 minstok@naver.com
미국의 심장을 관통하는 역사적인 길
미 대륙에 뻗어 있는 수많은 도로 중에서도 유독 특별한 길이 있다. 일명 루트 66이라고 불리는 이 도로는 1926년 완공된 미국 최초의 횡단 도로이자 미국 역사와 문화가 담긴 상징적인 길이다.
1930년대 대공황과 극심한 모래폭풍(Dust Bowl)으로 고통받던 농민들은 고향을 등지고 희망을 좇아 루트 66에 올라섰다. 아메리카 원주민을 무력으로 몰아내고 차지한 땅이지만 약자가 사라진 자리에는 또 다른 약자가 있을 뿐이다. 대지주와 은행, 트랙터에 밀려난 소작농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캘리포니아를 향해 흙먼지 가득한 도로로 쏟아져 나왔다. 서부를 향한 끝없는 행렬을 따라 상점과 주유소가 들어섰고 주변에는 작은 마을들이 생겨났다. 루트 66은 가난, 좌절, 절망 그 안에 남아 있는 삶에 대한 끈질긴 열망을 먹고 자란 도로다. 미국의 대문호 존 스타인벡은 이 시대를 배경으로 한 소설 《분노의 포도》에서 루트 66을 ‘모든 길의 어머니 도로(Mother Road)’라고 표현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경제가 풍요로워지자 루트 66은 모험을 찾아 떠나는 청춘들로 새롭게 북새통을 이뤘다. 비트 세대를 이끌었던 앨런 긴즈버그와 잭 케루악을 비롯해 냇킹 콜, 밥 딜런, 롤링 스톤스 등 수많은 예술가도 이 길을 추억하고 사랑했다.
그러나 새로운 고속도로의 등장으로 낡고 오래된 길을 찾는 발길은 점점 뜸해졌다. 결국 1985년에는 고속도로의 지위를 상실하고 지도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들의 추억과 향수가 담긴 길을 잃고 싶지 않았다. 시민단체와 정부의 끈질긴 노력과 지원 끝에 2003년 일부 구간이 ‘히스토릭 루트 66(Historic Route 66)’이라는 이름으로 복원됐다. 미 동부 시카고에서 시작되는 3940㎞의 여정은 일리노이, 미주리, 캔자스, 오클라호마, 텍사스, 뉴멕시코 그리고 애리조나를 지나 캘리포니아 샌타모니카 해변에 도착해서야 비로소 끝난다. 루트 66을 여행하는 방법에 정답은 없다. 어디에서 시작하든 어느 방향으로 향하든 무엇을 느끼든 그것은 각자의 몫이다.
추억을 먹고 사는 길 위의 낡은 상점 킹먼(Kingman)에서 셀리그먼(Seligman)까지 이어진 구간을 달린다. 황량한 대지 위, 있는 것이라곤 오직 길뿐인 이곳에 낡은 상점 하나가 생뚱맞게 서 있다. ‘핵베리 제너럴 스토어(Hackberry General Store)’라고 쓰인 간판이 눈에 들어온다. 문을 열고 상점 안으로 들어서자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 여행을 온 것 같은 광경이 펼쳐진다. 추억의 스타가 등장하는 포스터와 촌스러운 마네킹, 루트 66과 관련한 기념품까지 온갖 잡동사니로 가득하다. 먼저 들어와 있던 미국인 노부부가 아련한 눈빛으로 상점 구석구석을 어루만진다. 비록 나의 역사와 문화는 아니지만,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을 추억한다는 것이 무슨 기분인지는 알기에 마음이 뭉클하다.
밖으로 나와 주변을 둘러본다. 더 이상 달리지 않는 클래식 자동차, 녹슬어 버린 주유 기계, 유리창을 빼곡하게 채운 각종 스티커, 삐거덕대며 흔들리는 루트 66 표지판이 시간 속에 굳어 있다. 떠나기 전 상점 앞에 마련된 나무 의자에 앉아 커피를 마신다. ‘개척자(Frontier)’라고 적힌 공중전화 박스 옆에 홀로 앉혀진 인디언 인형이 유독 눈에 밟힌다. 다시 루트 66에 오른다. 모두가 서쪽을 향해 달린 그 길을 오늘의 여행자는 동쪽을 바라보며 달린다. 반대편 차선으로 이 길 위에 새겨진 슬프고 기쁜 얼굴들이 스쳐 지나가는 듯하다.
신들이 사는 신성한 붉은 바위의 땅
그랜드 캐니언 사우스림에서 자동차로 약 두 시간 떨어진 곳에 세도나가 있다. 해발 1320m 사막지대에 있는 작은 마을이지만, 연간 수백만 명이 찾는 오아시스 같은 곳이다. 이른 아침 숙소 발코니로 나가 세도나의 첫 모습을 맞이한다. 밤새 어둠에 숨어 있던 풍경들이 따스한 햇볕을 받으며 조금씩 고개를 내밀기 시작한다. 푸른 숲을 에워싼 거대한 사암은 세상 모든 붉은색을 담고 있는 듯 신비롭고, 각기 다른 모양의 봉우리들은 마치 거대한 조각품을 보는 듯 경이롭다. ‘그랜드 캐니언을 창조한 것이 신이라면, 그 신들이 사는 곳은 세도나다’라는 안내 책자의 문구가 결코 과장이 아니었음을 깨닫는다.
예로부터 세도나가 자리한 베르데 계곡(Verde Valley)은 야바파이, 아파치족을 비롯한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성스러운 땅이었다. 그러나 서부 개척 시대가 열리면서 백인들이 몰려와 땅을 빼앗았다. 원주민들은 끝까지 저항했지만 결국 패배했고, 1876년 남동쪽으로 280㎞ 떨어진 산카를로스 인디언 보호구역으로 강제 유배당했다. 같은 해 오크 크리크 캐니언(Oak Creek Canyon)에 최초의 백인이 정착했다. 이후 계곡 일대는 백인 거주지가 됐고, 세도나라는 새로운 지명이 붙었다. 이 지역에 최초로 설립된 우체국 국장 부인의 이름인 세도나 쉬네블리(Sedona Shnebly)에서 따온 것이었다.
세도나가 세상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은 1980년대 이후다. 천혜의 자연환경과 온화한 기후도 한몫했지만, 지구의 전기적 에너지인 ‘볼텍스(Vortex)’가 이곳에서 발생한다고 알려졌기 때문이다. 동양적 관점에서 본다면 볼텍스는 에너지가 들어오고 나가는 ‘혈’ 혹은 ‘기’라고 일컫는 초자연적인 힘을 의미한다.
전 세계에는 21개의 볼텍스 포인트가 있는데 그중 무려 4개가 이 작은 마을에 모여 있다고 전해진다. 벨 록(Bell Rock), 캐시드럴 록(Cathedral Rock), 보인턴 캐니언(Boynton Canyon), 에어포트 메사(Airport Mesa)가 바로 그곳이다. 이 명당들을 찾아 나서는 것으로 본격적인 세도나 여행을 시작한다. 가장 먼저 벨 록 구역을 찾는다. 종 모양을 빼닮은 거대한 붉은 바위와 코트 하우스 뷰트(Courthouse Butte)라는 이름의 넓적한 바위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벨 록은 4개의 볼텍스 명당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볼텍스를 발산하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과학적 진위는 알 수 없으나, 옹골차고 늠름한 자태가 인상적인 것은 확실하다.
세도나의 기를 찾아서 그저 바위 앞에서 기념사진을 남기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 세도나를 대표하는 명소 주변에는 다양한 트레일 코스가 조성돼 있다. 벨 록 트레일처럼 남녀노소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코스부터 비교적 어려운 캐시드럴 록 트레일, 윌슨 마운틴(Wilson Mountain) 트레일까지 난이도도 다양하다. 세도나의 거친 면모를 느끼고 싶다면 산악 바이크나 사륜 오토바이를 이용한 투어를 즐겨도 좋다.
에어포트 루프 트레일(Airport Loop Trail)을 걸어 보기로 한다. 또 다른 볼텍스 포인트인 에어포트 메사 주변을 둥그렇게 도는 코스다. 에어포트 로드(Airport Rd.)를 따라 구불구불한 산길을 올라가면 유료 주차장과 전망대가 나온다. 이곳에서부터 트레일이 시작된다. 붉은 자갈과 돌덩이들이 가득한 트레일을 오르락내리락하다 보면 정상으로 오를 수 있는 서밋 트레일과 만난다. 짧지만 다소 험하고 가파른 구간이다.
붉은 용암이 흐르다 순간적으로 굳어 버린 듯한 사암의 틈새를 열심히 오른다. 마지막 바위를 딛고 정상에 서자 세도나의 엄청난 절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세상 모든 근심이 눈 녹듯 사라지는 듯하다. 파도의 물결처럼 일렁이는 산맥은 마치 단풍이라도 든 것처럼 화려하다. 언뜻 보면 사방에 무지개가 핀 것 같은 착각도 든다. 주변을 둘러보니 몇몇 사람들이 바위 끄트머리에 앉아 명상하거나 독서를 하고 있다. 신발과 양발을 벗어 던지고 가부좌를 틀고 앉아 본다. 바위의 시원한 감촉과 따뜻한 햇볕 그리고 적당한 바람이 느껴진다.
볼텍스를 제대로 느끼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왠지 모를 평온함이 든다. 앞만 보며 바쁘게 달려오던 여정에 작은 쉼표를 찍는 기분이다. 한참을 앉아 세도나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자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이 세상에 아름답지 않은 곳은 없다. 그것을 찾아내는 것은 온전히 내 몫이다. 마음먹기에 따라 그 어느 곳이든 세도나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붉은 바위 위에 세워진 인간의 믿음
다운타운으로 내려와 잠시 휴식을 취한다. 미 서부를 대표하는 휴양지답게 거리는 카페와 레스토랑, 여행객들로 가득 찼다. 세도나는 예술가들이 많이 사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틀라케파케 빌리지(Tlaquepaque Village)나 개성 넘치는 갤러리들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다음 목적지인 성 십자가 예배당(Chapel of The Holy Cross)으로 향했다. 구불구불한 도로를 10분쯤 따라 들어가자 바위 사이에 세워진 독특한 모양새의 건축물 하나가 보인다. 외벽은 붉은 사암과 비슷한 색으로 칠해졌고, 여느 성당이나 교회처럼 거대하지 않은 소박하고 단출한 모습이다. 자연을 넘어서지 않으려는 겸손한 믿음 때문일까, 인공물임에도 불구하고 주변 경관과 제법 잘 어울린다. 나선형 모양의 경사길을 오르면 예배당의 입구에 도달한다. 전면 유리창을 통해 쏟아지는 빛이 내부를 가득 채웠다. 창밖으로 펼쳐진 세도나의 그림 같은 풍경에 신성함이 배로 느껴진다.
예배당에서 내려와 플래그스태프(Flagstaff)로 올라가는 89A 도로를 달린다. 미국에서도 경치가 아름답기로 손꼽히는 도로다. 우거진 숲과 붉은 바위 사이로 흐르는 계곡물은 이곳이 사막지대임을 잠시 잊게 한다. 여름이 되면 얼마나 더 싱그러워질지 감히 상상이 가지 않는다. 오크 크리크 캐니언에 있는 슬라이드 록 주립공원(Slide Rock State Park)은 미국을 대표하는 여름 휴가지다. 사암으로 이뤄진 천연 풀장에서 물놀이와 캠핑 등을 즐길 수 있다. 계곡물에 반영된 세도나의 풍경이 특히 아름다워 사진가들도 많이 찾는다.
세도나를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오크 크리크 전망대를 찾는다. 코코니노 국유림(Coconino National Forest)과 주변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전망대 한쪽에는 원주민들이 예술품을 팔고 있다. 적갈색 깃털이 달린 조그마한 드림캐처를 하나 샀다. 고맙다고 인사하는 주인아저씨에게 이곳이 무척이나 맘에 든다고 말했다. 그가 미소를 짓자 얼굴에 굵직한 주름이 패었다. 거친 사막에서 억겁의 세월을 담대하게 견뎌낸 세도나의 붉은 바위처럼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새로운 여정을 떠나는 발길이 한결 가볍다.
여행 팁
애리조나 루트 66: 킹먼~셀리그먼 구간은 약 120㎞에 이른다. 40번 주간도로를 타고 가다가 킹먼 혹은 셀리그먼에서 루트 66 표지판을 따라 빠져야 한다. 핵베리 제너럴 스토어는 피치스프링스와 킹먼 중간 지점에 있다. 입장료는 따로 없으며 일반적으로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운영된다. 여유가 된다면 셀리그먼과 윌리엄스 같은 마을들도 함께 들러보는 것이 좋다.
세도나: 애리조나 주도 피닉스에서는 자동차로 약 2시간, 플래그스태프에서는 1시간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한국에서는 미국 로스앤젤레스공항을 거쳐 국내선을 이용해 피닉스로 간 뒤 렌터카 혹은 버스를 이용해야 한다. 로스앤젤레스에서 자동차로 가면 약 8시간이 걸린다. 슬라이드 록 주립공원의 입장료는 시즌별로 다르며 차량당 10~30달러다. 공원 개방시간이 정해져 있으니 방문 전 미리 확인하는 것이 좋다.
세도나=글·사진 고아라 여행작가 minstok@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