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학영 칼럼] 규제 개혁은 왜 안 서두르나
“일관된 메시지를 주지 못한 데 대해 셀프경고를 했다.” 김동연 경제부총리가 ‘부자 증세’ 세제개편안을 내놓으면서 한 말이다. “세율 인상이 연내에는 없을 것”이라던 식언(食言)을 에두른 사과이지만, ‘경고’를 받아야 할 사람은 그만이 아니다. 문재인 정부 5년의 국정계획 작성을 책임진 김진표 국정기획자문위원장도 “올해는 증세하지 않는다”며 “부자 증세도 없다”는 말까지 누차 했다.

두 사람이 괜히 ‘실없는 소리’를 했을 리는 없다. ‘필요할 경우 국민적 동의를 구해 내년 이후 소득세부터 증세 논의를 한다’는 게 당초 청와대 방침이었다. 그랬던 청와대가 논란을 무릅쓰면서까지 조기(早期) 증세를 단행한 것은 ‘국민들 지지가 높은 집권 초반기에 해치워야 한다’는 쪽으로 판단을 바꾼 탓이다.

문재인 정부가 ‘속전속결’로 밀어붙이는 정책은 증세만이 아니다. ‘2020년까지 시간당 1만원 달성’이라는 표적에 맞춰 최저임금 대폭 인상을 강행하는 바람에 기업들의 비명이 곳곳에서 터져 나오고 있다. 고용을 줄이거나 아예 사업장을 해외로 옮기겠다는 기업이 줄을 잇고 있다. ‘우군’으로 여겼던 중소기업과 소상공인들의 반발이 당초 예상보다 훨씬 거셌는지, 문재인 대통령이 직접 나서 “일단 1년간 해보고 내년에 가서 다시 보겠다”며 수습에 진땀을 흘렸을 정도다.

탈(脫)원전도 ‘초전박살’ 기세로 밀어붙이는 정책으로 빼놓을 수 없다. 선진국들이 30년 이상 논의해 결정한 원전정책을 문재인 정부는 석 달 동안의 공론화위원회 활동을 바탕으로 확정짓겠다는 ‘속도전 의지’를 누그러뜨리지 않고 있다. 공기업 성과연봉제 폐지,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확대 등도 임기 초반부터 밀어붙이고 있는 정책들이다.

성급한 추진에 대한 부작용을 경고하는 목소리가 만만치 않은 데도 이들 정책을 밀어붙이는 건 ‘대통령 선거 공약사항’이라는 이유에서다. 가계소득 증대와 사회적 격차 해소, 국민생활 안전 등을 약속하고 집권했으니 최우선적으로 지키는 게 마땅하다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의아해지는 게 있다. 주요 대선 공약이자 국정과제로 제시한 ‘혁신 성장’을 위한 규제 개혁은 왜 지지부진한가 하는 것이다. 정부가 최근 연달아 발표한 ‘100대 국정과제’와 ‘새 정부 경제정책 방향’에는 기업인들의 기대를 높이는 과감한 규제 개혁방안이 담겨 있다. ‘고부가가치를 창출할 미래형 신사업 발굴·육성’과 ‘융·복합 등 창조적 파괴를 통한 신성장동력 발굴’을 위해 다양한 방식의 규제 개선에 나설 것임을 예고했다. 대선 공약에도 담았던 내용들이다.

‘경제 패러다임의 전환’이라는 부제(副題)를 단 ‘새 정부 경제정책 방향’ 보고서에서는 과감한 규제 개혁에 바탕을 둔 ‘혁신 성장’을 새로운 패러다임의 중요 축으로 제시하기까지 했다.

“경제 성장을 수요 측면에서는 일자리 중심·소득주도 성장, 공급 측면에서는 혁신 성장의 쌍끌이 방식으로 전환할 것”이라며 신산업 창출 촉진을 위한 규제 샌드박스(규제 없이 신기술 테스트 허용) 도입 등 구체적인 실행방안까지 내놨다. 규제 시스템을 ‘원칙 허용-예외 금지’의 네거티브 방식으로 전환해 미래지향적 규제 지도 구축, 일자리 창출을 저해하는 규제 개선, 핵심 규제 이슈 개선방안 마련, 서비스산업 혁신 로드맵 수립 등 기업인들 눈을 확 뜨게 하는 내용들을 실천 과제로 약속했다.

시급성으로 따진다면 이들 규제 개혁 조치부터 시행하는 게 마땅하다. 신산업 분야에서는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 각국에서 글로벌 무한 경쟁이 펼쳐지고 있기 때문이다. 드론산업에서 한국이 규제로 기업들 발을 묶어 놓은 동안 중국 기업들이 맹렬히 뛰어들어 세계 시장의 90%를 장악한 게 단적인 예다. 그런데도 증세, 최저임금 인상, 탈원전처럼 피아(彼我)를 나누는 정책으로 국력을 분산시키는 정부가 안타깝다. 높은 지지율을 바탕으로 속도감 있게 밀어붙여야 할 최우선 과제는 누가 뭐래도 규제 개혁이다.

이학영 논설실장 hak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