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칼럼] 경제적 자유가 서민을 위한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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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은 능력과 노력에 따른 과실을 보장
그로 인한 격차 줄이겠다는 특혜가 불의
선심성 복지보다 삶의 기회를 넓혀 줘야
민경국 < 강원대 명예교수·경제학 >
그로 인한 격차 줄이겠다는 특혜가 불의
선심성 복지보다 삶의 기회를 넓혀 줘야
민경국 < 강원대 명예교수·경제학 >
대기업은 규제하고 부자에게는 세금을 더 걷으며 중소상공인, 저소득층은 지원·보호·육성하고 선심성 복지를 통해 그들의 소득·재산을 증대하는 게 문재인 정부의 국정 목표다. 서민층의 삶을 증진하는 게 정의로운 사회임에도 자유시장은 서민층을 홀대하고 가진자에게만 유리하기 때문에 정의롭지 못한 체제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최소수혜자(서민층)’의 대부 존 롤스(1921~2002)가 정부 여당에 재림한 듯하다.
문재인 정부가 시장경제의 분배 결과를 두고 정의로움 여부를 따지는데 이는 틀렸다. 그런 도덕적 평가가 가능하려면 시장에 소득을 분배하는 인격체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런 분배사령탑은 없다. 시장에 참여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상호작용 속에서 개인 소득은 각자의 능력·노력·운에 따라 벌어들인 것이지 분배하는 실체로부터 받은 게 아니다. 예를 들면 삼성이나 동네 슈퍼마켓이 버는 소득을 계획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분배(사회)정의 개념은 정부가 분배를 설계해 구성원들에게 소득·재산을 나눠주는 사회주의에서나 타당한 개념이다. 시장에서 소득 격차를 놓고 정의와 불의를 따지는 건 신기루를 쫓는 것과 같다. “사회 정의는 신기루다.” 하이에크의 유명한 말이다. 그렇다고 시장경제에는 정의가 없다는 말이 아니다. 어느 누구도 폭력, 사기 등과 같이 인격·자유·재산을 침해하는 행동을 해서는 안 되는 게 시장의 정의다. 개인들 각자가 인격, 소유존중 등 정의로운 행동규칙을 지키면서 번 돈이라면 소득 수준에 격차가 생겼다고 해서 이를 도덕적으로 따지는 건 애초에 지켰던 행동규칙의 정의로움을 부인하는 치명적 결과를 초래한다.
자유주의는 부자나 대기업을 옹호하는 패러다임이라는 정부 여당 인식도 틀렸다. 국가가 강제력을 동원해 대기업의 이익을 증진하는 특혜는 사람들을 차별해서는 안 된다는 법치의 위반이다. 그래서 자유주의는 대기업에 대한 어떤 형태의 특혜도 전적으로 반대한다. 최저임금 인상,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부채 탕감 등 문재인 정부의 국정철학을 점철하는 서민층의 특혜 정책도 법치의 위반이다. 대기업, 중소상공인, 서민층, 정부 등 누구에게든 특혜를 부여하는 나라는 전체주의적 사회주의 국가다. 원래 자유·재산을 지켜야 할 국가가 특혜, 차별입법을 통해 그들을 침해하는 건 치명적인 불의다.
자유주의는 서민층의 삶에 냉담하다는 문재인 정부의 인식도 틀렸다. 최소수혜자, 즉 서민층을 포함해 모든 사람들에게 번영을 안겨준다는 게 자유사회의 도덕적 정당성의 본질적 내용이다. ‘자유의 대부’ 하이에크가 노동을 착취하고 가난한 사람이 부자가 되는 길을 가로막는 복지국가를 공격한 이유도 노동자의 삶에 대한 우려 때문이었다. 한 나라의 번영은 모든 계층의 시민들을 위한 기회를 제공할 수 있는 능력으로 정의했던 것, 상업사회가 빈곤층에 미치는 물질적 효과를 보여주는 데 관심이 있었던 것도 자유주의였다. 서민층의 삶에 대한 걱정은 사회주의의 독점물이 아니다.
시장은 강자가 약자를 이겨낸 결과가 아니다. 자본주의는 결코 강자만을 위한 체제가 아니다. 자본이 늘어나면 노동생산성이 높아져 노동소득도 증가한다. 노동소득의 증가를 위한 유일한 길은 자본축적이다. 인도와 미국의 노임격차는 자본축적의 결과다. 한국의 노동소득배분율이 1975년 40.5%에서 현재 60%로 상승한 것도 전적으로 자본축적 덕이다.
자본주의에서 사회적 순기능에 역행하는 소득불평등은 결코 생겨나지 않는다. 역행하는 불평등은 시장을 위반하는 정부 정책 때문이다. 자유시장은 가난한 사람에게 결코 나쁘지 않다. 자유시장의 등장으로 인해 모든 사람들, 특히 최소수혜자들의 삶의 기회를 대폭 증대시켰다. 자유를 통해서만 서민층을 지킬 수 있다.
경제사는 최소수혜자를 지킨 롤스보다 자유를 지킨 하이에크의 손을 들어줬다. 자유시장 덕택으로 한때 잘나가던 독일과 스웨덴 경제가 20세기 후반 복지 확대로 저성장, 고실업의 고통스러운 경제 침체를 겪은 건 롤스 철학의 복지국가 때문이었다. 서민층을 위한 길은 경제적 자유다. 그렇지 않으면 한국 경제가 남미 경제로 갈 게 뻔하다. 문재인 정부의 국정철학이 두려운 이유다.
민경국 < 강원대 명예교수·경제학 kwumin@hanmail.net >
문재인 정부가 시장경제의 분배 결과를 두고 정의로움 여부를 따지는데 이는 틀렸다. 그런 도덕적 평가가 가능하려면 시장에 소득을 분배하는 인격체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런 분배사령탑은 없다. 시장에 참여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상호작용 속에서 개인 소득은 각자의 능력·노력·운에 따라 벌어들인 것이지 분배하는 실체로부터 받은 게 아니다. 예를 들면 삼성이나 동네 슈퍼마켓이 버는 소득을 계획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분배(사회)정의 개념은 정부가 분배를 설계해 구성원들에게 소득·재산을 나눠주는 사회주의에서나 타당한 개념이다. 시장에서 소득 격차를 놓고 정의와 불의를 따지는 건 신기루를 쫓는 것과 같다. “사회 정의는 신기루다.” 하이에크의 유명한 말이다. 그렇다고 시장경제에는 정의가 없다는 말이 아니다. 어느 누구도 폭력, 사기 등과 같이 인격·자유·재산을 침해하는 행동을 해서는 안 되는 게 시장의 정의다. 개인들 각자가 인격, 소유존중 등 정의로운 행동규칙을 지키면서 번 돈이라면 소득 수준에 격차가 생겼다고 해서 이를 도덕적으로 따지는 건 애초에 지켰던 행동규칙의 정의로움을 부인하는 치명적 결과를 초래한다.
자유주의는 부자나 대기업을 옹호하는 패러다임이라는 정부 여당 인식도 틀렸다. 국가가 강제력을 동원해 대기업의 이익을 증진하는 특혜는 사람들을 차별해서는 안 된다는 법치의 위반이다. 그래서 자유주의는 대기업에 대한 어떤 형태의 특혜도 전적으로 반대한다. 최저임금 인상,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부채 탕감 등 문재인 정부의 국정철학을 점철하는 서민층의 특혜 정책도 법치의 위반이다. 대기업, 중소상공인, 서민층, 정부 등 누구에게든 특혜를 부여하는 나라는 전체주의적 사회주의 국가다. 원래 자유·재산을 지켜야 할 국가가 특혜, 차별입법을 통해 그들을 침해하는 건 치명적인 불의다.
자유주의는 서민층의 삶에 냉담하다는 문재인 정부의 인식도 틀렸다. 최소수혜자, 즉 서민층을 포함해 모든 사람들에게 번영을 안겨준다는 게 자유사회의 도덕적 정당성의 본질적 내용이다. ‘자유의 대부’ 하이에크가 노동을 착취하고 가난한 사람이 부자가 되는 길을 가로막는 복지국가를 공격한 이유도 노동자의 삶에 대한 우려 때문이었다. 한 나라의 번영은 모든 계층의 시민들을 위한 기회를 제공할 수 있는 능력으로 정의했던 것, 상업사회가 빈곤층에 미치는 물질적 효과를 보여주는 데 관심이 있었던 것도 자유주의였다. 서민층의 삶에 대한 걱정은 사회주의의 독점물이 아니다.
시장은 강자가 약자를 이겨낸 결과가 아니다. 자본주의는 결코 강자만을 위한 체제가 아니다. 자본이 늘어나면 노동생산성이 높아져 노동소득도 증가한다. 노동소득의 증가를 위한 유일한 길은 자본축적이다. 인도와 미국의 노임격차는 자본축적의 결과다. 한국의 노동소득배분율이 1975년 40.5%에서 현재 60%로 상승한 것도 전적으로 자본축적 덕이다.
자본주의에서 사회적 순기능에 역행하는 소득불평등은 결코 생겨나지 않는다. 역행하는 불평등은 시장을 위반하는 정부 정책 때문이다. 자유시장은 가난한 사람에게 결코 나쁘지 않다. 자유시장의 등장으로 인해 모든 사람들, 특히 최소수혜자들의 삶의 기회를 대폭 증대시켰다. 자유를 통해서만 서민층을 지킬 수 있다.
경제사는 최소수혜자를 지킨 롤스보다 자유를 지킨 하이에크의 손을 들어줬다. 자유시장 덕택으로 한때 잘나가던 독일과 스웨덴 경제가 20세기 후반 복지 확대로 저성장, 고실업의 고통스러운 경제 침체를 겪은 건 롤스 철학의 복지국가 때문이었다. 서민층을 위한 길은 경제적 자유다. 그렇지 않으면 한국 경제가 남미 경제로 갈 게 뻔하다. 문재인 정부의 국정철학이 두려운 이유다.
민경국 < 강원대 명예교수·경제학 kwumin@hanmail.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