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형규 칼럼] 좋은 세금 vs 나쁜 세금
최근 증세 논란에서 새삼 확인된 게 세금이야말로 ‘내로남불’의 전형이란 점이다. “나는 꼬박꼬박 내는데 남들은 요리조리 빠져나간다. 따라서 내 세금은 줄이되, 남들이 더 내야 한다”는 것이다. 소위 ‘핀셋 증세’ 찬성률이 85.6%에 달한 배경이다. 하지만 연말정산 파동 때 대통령에 대한 부정평가가 58.8%(2015년 1월)로 치솟았던 점도 꼭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

이중적인 세금관(觀)은 집값과 마찬가지로 좌우 이념성향과 관계없다. 타인의 탈세엔 분기탱천해도 자신의 세금 회피는 정당방위로 치부하는 법이다. 집값이 안정되더라도 내집은 예외이길 바라는 것과 같은 심리다. 사람을 움직이는 것은 9할이 이기심과 질투심이다.

그런데도 정권마다 세금을 너무 쉽게 여긴다. 우파 정부는 질투심을 간과하고, 좌파 정부는 이기심을 무시한다. “부모 죽인 원수는 시간이 지나면 잊지만 재산을 털어간 사람은 평생 못 잊는다”는 마키아벨리의 경구를 새길 필요가 있다.

기꺼이 세금을 낼 사람은 없다. 세금은 초(超)부자만의 관심사가 아니다. 서민·중산층에도 ‘소소한 탈세’가 생활 속에 녹아 있다. 식당과 미용실의 ‘현금 할인’에 종종 흔들리기도 한다. 담뱃세 인상 이후 급속히 늘어난 ‘말아 피우는 담배’는 더 이상 낯설지 않다.

한국인만 ‘세금 내로남불’인 것도 아니다. 준법의식이 투철한 독일인들도 소득세가 적정하다는 응답률이 고작 14%다. 세금 이의신청은 연간 1000만 건이 넘는다. 정치인들이 누더기로 만든 세제는 ‘구멍 뚫린 치즈’에 비유된다. 호날두와 메시도 조세피난처를 들락날락하다 탈세혐의를 받고 있다. ‘절세 기술자’는 세계적으로 각광받는 직업이다. 탈세의 세계화다.

그 이면엔 50% 안팎으로 치솟은 최고세율이 도사리고 있다. 민주화가 완성된 나라일수록 역설적으로 세율이 더 높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한스 헤르만 호페가 《민주주의는 실패한 신인가》에서 갈파한 대로, 부의 재분배를 원하는 다수가 소수의 ‘가진 자’에게 희생을 요구하기 쉬운 구조여서다. 그 결과 선거는 어느덧 정당 간 세금특혜의 경연장이 돼버렸다.

양극화 해소를 내건 문재인 정부의 첫 세제개편안은 예상대로 ‘소수에 대한 증세’로 귀결됐다. ‘세금 내로남불’에 편승한 셈이다. ‘핀셋 증세’는 상위 0.1% 부자와 129개 대기업을 정조준했다. ‘0.1% 대 99.9%’의 구도다. 소득세 최고세율은 유럽 선진국에 버금가는 46.2%(주민세 포함)다. 실제 세수 효과보다는 정치적으로 남는 장사일 것이다.

하지만 소위 ‘착한 증세’로는 복지 공약 재원 178조원에 턱도 없다. 정부가 예측한 연간 6조원 남짓의 세수 증대효과도 제대로 실현될지 의문이다. 세율을 높일수록 자본은 손에 쥔 물처럼 빠져나가기 때문이다. 선진국들도 머리 싸매는 문제다. 지금 정부는 ‘밑 빠진 독’에다 물을 부어달라는 건 아닌지 돌아볼 때다.

국가는 결코 걷은 돈 이상을 지출할 수 없다. 모자란 만큼 현 세대(추가 증세)든, 미래 세대(국채 발행)든, 보이지 않는 증세(인플레)든 누군가에겐 부담을 지운다. 핀셋이 집게, 갈고리, 나아가 포클레인으로 커질 수도 있다. 핀셋이 본인을 향할 때 증세 찬성 여론은 순식간에 뒤집힐 것이다.

모두가 누리되 국민 일부만 부담하는 조세가 ‘좋은 세금’일 수 없다. 세금은 공평·명확·단순해야 한다. 과세형평이 빠진 증세는 지속가능하지 않다. 증세의 중장기 부작용(초과부담)과 누가 부담하는지(귀착과 전가)에 대한 깊은 고려도 필수다. 유감스럽게도 급조한 ‘핀셋 증세’에는 그런 고민이 전혀 안 보인다.

세금이 경제주체들의 의욕을 꺾는 방향으로 설계되면 경제의 하향평준화를 가져올 뿐이다. 지난 정부에서 확인했듯이 세금이 더 나올 구멍은 없다. 경제활성화를 통해 세원을 넓히는 것만이 유일한 해법이다.

오형규 논설위원 oh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