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사이드 人터뷰] 환자 생활비까지 지원한 '빈자의 어머니' "91세 현역…남은 인생도 인술 펼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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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외재단 성천상 수상' 한원주 매그너스병원 내과 과장
지난달 13일 경기 남양주시 매그너스 재활요양병원. 자그마한 체구에 흰 가운을 입은 백발 할머니가 지나가자 한 치매 노인이 “엄마”하며 쫓아왔다. 백발의 ‘엄마’는 주머니 속 청진기를 꺼내 환자를 살폈다. 녹내장 탓에 눈물이 고인 두 눈이 쉴새없이 깜빡였다. 그러나 손길은 한 치의 떨림 없이 섬세했다. 아흔이 넘은 나이에도 68년째 ‘현역’ 의사로 활동하는 한원주 내과 과장(91·사진)이다. 그는 지난달 10일 ‘제5회 성천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성천상은 수액을 국산화한 고(故) 이기석 JW중외제약 창업자의 생명존중 정신을 기려 의료봉사활동으로 귀감이 되는 의료인에게 주는 상이다. 그는 “상은 생각지도 못했는데 자격이 없는 내가 받아도 될지 모르겠다”며 소녀처럼 수줍어했다.
감독기관도 막지 못한 노의사의 열정
그가 일하는 매그너스 재활요양병원은 남양주 시내에서도 차를 타고 40분가량 들어가야 하는 외진 곳에 있다. 출퇴근 여건이 좋지 않아 주중에는 병원에서 산다. 환자들은 대부분 거동이 불편한 치매 노인이다. 매일 숙식을 같이하다 보니 가족이 됐다. 이 병원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그를 환자들은 ‘엄마’ ‘언니’ 또는 ‘누나’로 부른다.
공기 좋은 산속에서 일한다지만 하루 종일 환자들과 생활하려면 힘에 부칠 만도 하다. “진료시간은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입니다. 병원에 상주하다 보니 근무시간을 초과해서 일할 때도 있죠. 힘들지 않느냐고 하는데 전혀 고단하지 않아요. 몇 년 전만 해도 해외에 의료봉사하러 밤 비행기를 타고 아침에 도착하면 다른 사람들은 늘어져 있는데 저는 그날 바로 일을 했어요. 봉사라는 게 힘이 들 것 같지만 힘이 나는 일이에요.”
2008년 의료선교의원에서 82세의 나이로 은퇴한 그는 편안한 노후를 보내는 대신 이곳으로 왔다. “82세에 은퇴했으니 많이 늦었죠. 의료선교의원에서는 월급 100만원 받았는데 먹고살 만은 했습니다. 집도 있겠다 일하지 않아도 되지만 ‘뒷방 늙은이’는 되기 싫더군요. 배운 게 아깝기도 하고 봉사를 계속할 수 있는 곳을 찾고 있었는데 마침 이 늙은이를 오라는 데가 있어서 왔죠.”
손의섭 매그너스의료재단 이사장은 열정적으로 환자를 돌보는 그의 모습에 감동해 ‘종신계약’을 제안했다. 손 이사장은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서 고령 의사가 제대로 환자를 볼 수 있겠느냐고 조사를 나온 적이 있다”며 “그런데 한 과장님이 컴퓨터로 전자의무기록을 능숙하게 다루고 유창하게 영어로 강의하는 모습을 보고 혀를 내두르고 갔다”고 했다.
‘과장’이란 직함은 그가 고집한 것이다. “명예원장 같은 직함을 주겠다는데 싫다고 했어요. 더 늙고 병에 걸려서 일을 못할 때까지 과장으로 평생 일하겠다고 했죠. 그랬더니 아프면 이 병원에서 임종 때까지 입원시켜주겠다고 하더군요. 월급도 보지 않고 왔는데 9년 내내 월 300만원을 받으니 주변에서는 ‘노예계약’이라고 합디다. 의사 중에 이만큼 받는 사람 아무도 없다면서요. 그래도 예전에 100만원 받던 때보단 많다고 생각합니다. 10곳 정도를 후원하고 있는데 십일조도 내고 자비로 해외봉사갈 때 말고는 돈 쓸 일도 없습니다.”
‘금수저’ 인생 대신 택한 봉사의 길
“백화점도 안 가고 쇼핑도 안 한다”는 그지만 젊은 시절엔 남부러울 것 없는 호화로운 삶을 살았다. 1926년 의사 집안에서 태어나 부족함 없이 자랐고 1949년 고려대 의대의 전신인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한 뒤 산부인과를 개업했다. 1959년 미국 유학 중이던 남편의 권유로 미국에서 내과전문의 자격증을 딴 뒤 미국에서 10년간 의사로 일했다. 한국에 돌아와 개인병원을 차리자 환자들이 몰려들었다. 돈도 많이 벌었다. 상위 1%의 ‘금수저’ 인생이었다.
하지만 52세가 되던 1978년 남편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그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놨다. 그의 남편은 고체물리학 권위자인 김희규 박사다. 김 박사는 실종된 지 17일 만에 숲 속에서 음독 자살한 채 발견됐다. 이 사건은 당시 신문 톱기사로 다뤄질 만큼 온 국민의 관심을 끌었다.
“사람이 큰 충격을 받으면 삶을 돌아보고 정리하게 됩니다. 의사가 되고 나서 환자 보고 애들 키우고 남편 뒷바라지하느라 바쁘게 살았어요. 진지하게 내 삶에 대해 생각할 여력이 없었죠. 남편이 죽고 나자 모든 게 의미가 없어지더군요. 죽으면 칫솔 하나 못 가지고 가잖아요. 돈을 많이 벌어 수억원을 자식에게 남겨준다고 한들 무슨 소용이 있나 싶었습니다.”
개인병원을 접고 봉사의 길을 택했다. 한국기독교의료선교협회 부설 의료선교의원에 들어갔다. 어떻게 하면 만족할 수 있는 삶을 살 수 있을지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이곳에서 영세민, 노숙자를 가리지 않고 경제적으로 어려운 환자들을 무료로 진찰했다.
“남편을 보니 하고 싶은 일을 못다 하고 죽은 게 큰 한이 될 것 같았습니다. 의료봉사를 하면 적어도 하나님 앞에 떳떳하게 설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병원을 할 때는 환자가 치료비를 낼 수 있을지 걱정될 때가 있었는데 돈을 안 받고 진료하니 그런 걱정을 안 해도 돼서 속이 편하더군요. 손해보는 게 아니라 기쁨을 얻게 됐습니다.”
마음까지 고쳐주는 의사
그는 1982년 국내 최초로 환자의 질병뿐만 아니라 정서와 환경까지 치료하는 ‘전인치유소’를 열었다. 신체적 질병을 고치는 것도 중요하지만 마음의 병까지 함께 치유해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가난한 환자들에게 생활비, 장학금도 지원하며 자립을 도왔다. 치료한 환자 중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도 적지 않다.
“야맹증으로 고생하던 환자가 기억에 남습니다. 눈이 어두워 직장을 구하지 못하고 마흔이 넘도록 장가를 못 가 가족들에게 온갖 구박을 받고 힘들게 살던 사람이었죠. 봉사자들이 조금씩 돈을 모아 길거리에서 칼, 가위를 파는 좌판을 해보라고 권유했습니다. 제법 장사가 잘됐어요. 해보려는 의지가 생기니까 가족들도 사업을 키워보라며 리어카를 사줬죠. 그러다 보니 가족관계도 회복되고 나중엔 조그만 가게도 얻었습니다. 몇 년 후 연락이 닿았는데 장가도 가고 잘 살고 있다고 하더군요. 돈도 많이 벌어 눈수술도 한다면서요. 보람되고 기뻤습니다. 조금만 도와줘도 이 분들에겐 큰 힘이 된다는 걸 알게 되니 더 열심히 하게 됐습니다.”
소외계층을 곁에서 지켜봐온 경험은 재활병원에서도 빛을 발했다. 그는 환자의 마음을 가장 잘 이해해주는 의사로 통한다. “노인도 젊은 세대, 자식들에게 소외당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분들은 쉽게 섭섭해하고 노여워해서 웬만큼 노력해선 안 됩니다. 자칫하면 원수처럼 달려들기 때문에 인내심을 갖고 대하는 게 중요하죠. 어떤 환자는 30분 이상 저를 붙잡고 불만을 제기하는데 그럴 땐 찬송가를 부르라고 하고 다른 환자를 보러 갑니다. 제가 터득한 기술이에요. 노래를 부르다 보면 화가 어느 정도 누그러지고 화가 난 이유도 잊게 되거든요.”
이렇게 시작한 의료봉사가 39년째다. 그는 힘들 때마다 의사였던 아버지를 떠올린다고 했다. “아버지는 8·15 광복 이후 콜레라가 유행할 때 병원 문을 닫고 환자를 보러 다니셨습니다. 진주에서 한일의원을 운영하면서 형무소 수감자들과 한센병 환자도 돌보셨죠. 요즘 젊은 사람들은 돈벌이가 좋다는 이유로 의사, 변호사를 선호하는데 그게 전부가 아니란 걸 어려서부터 배웠던 것 같습니다.” 그는 가장 효과적인 치료법은 사랑이라고 했다. “사랑이 제일입니다. 치매 환자도 사랑으로 돌보는 사람을 알아봅니다.”
“남은 삶 노인 환자 곁에서 돌볼 것”
성천상 시상식은 오는 17일 서울 웨스틴조선호텔에서 열린다. 상금은 1억원이다. 그는 “상금 얘기는 처음 들었다”며 “안 그래도 요새 자금 사정이 좋지 않은데 반가운 소리”라며 반겼다.
“주택 자금 대출 이자를 갚느라 후원금을 제때 못 내고 있었는데 다행입니다. 여유가 생기면 보충해서 내야지 생각하고 있었는데, 상금으로 돕고 싶은 사람을 도울 수 있겠네요. 딸이 암에 걸려 치료를 받고 있는데 맛있는 것도 사주고 손녀 대학 등록금도 지원해주고 싶습니다.”
오후 4시에 시작한 인터뷰가 퇴근 시간이 다 돼서야 끝났다. 그는 “인터뷰하느라 환자를 못 봤으니 지금부터 일해야겠다”며 다시 청진기를 들었다. “남편이 하늘나라로 떠났을 때 빼고는 만족스럽고 기쁜 일생이었습니다.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어요. 남은 생도 저와 같은 노인 환자들 곁에서 의사로서 최선을 다할 겁니다.”
■ 에세이 발간한 한원주 의사
"백세 현역이 어찌 꿈이랴"…90대 여의사의 일과 삶 녹여내
한원주 과장의 책상에는 정갈한 글씨체로 하루 일과를 정리한 노트가 있다. 매일 아침 이메일을 확인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할 만큼 컴퓨터에 익숙하지만 일기는 손으로 직접 적는다. 꼼꼼하게 작성한 이 기록들을 모아 지난해 5월 책으로 펴냈다. 《백세 현역이 어찌 꿈이랴》라는 에세이다. 그는 “제목은 출판사에서 정한 것”이라며 “원래 생각했던 건 ‘어느 90대 여의사의 일과 삶’이었는데 막상 책으로 나오니 부끄럽다”고 했다. “책을 낼 생각은 전혀 안 했는데 제 인생 얘기를 들은 주변 사람이 출간해보라고 하더군요. 처음엔 이걸 어디에 팔겠나 싶고 자신이 없어서 1000부를 찍었는데 다 나갔어요. 작년에 90세 생일을 맞아서 기념으로 낸 건데 다시 찍을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시간이 날 때마다 틈틈이 일기를 써놓은 게 많은 도움이 됐다. 책에는 의사로서 삶뿐만 아니라 아내와 엄마, 한 가정을 돌보는 주부이자 사회인으로서 살아온 일생이 담겨 있다. 한 과장은 “암울한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항일지사인 부모님 밑에서 자라면서 중·일전쟁, 제2차 세계대전, 6·25전쟁을 다 겪었다”며 “이런 시기에 여의사로서 살면서 겪었던 기록들이 후손에게도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전예진 기자 ace@hankyung.com
감독기관도 막지 못한 노의사의 열정
그가 일하는 매그너스 재활요양병원은 남양주 시내에서도 차를 타고 40분가량 들어가야 하는 외진 곳에 있다. 출퇴근 여건이 좋지 않아 주중에는 병원에서 산다. 환자들은 대부분 거동이 불편한 치매 노인이다. 매일 숙식을 같이하다 보니 가족이 됐다. 이 병원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그를 환자들은 ‘엄마’ ‘언니’ 또는 ‘누나’로 부른다.
공기 좋은 산속에서 일한다지만 하루 종일 환자들과 생활하려면 힘에 부칠 만도 하다. “진료시간은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입니다. 병원에 상주하다 보니 근무시간을 초과해서 일할 때도 있죠. 힘들지 않느냐고 하는데 전혀 고단하지 않아요. 몇 년 전만 해도 해외에 의료봉사하러 밤 비행기를 타고 아침에 도착하면 다른 사람들은 늘어져 있는데 저는 그날 바로 일을 했어요. 봉사라는 게 힘이 들 것 같지만 힘이 나는 일이에요.”
2008년 의료선교의원에서 82세의 나이로 은퇴한 그는 편안한 노후를 보내는 대신 이곳으로 왔다. “82세에 은퇴했으니 많이 늦었죠. 의료선교의원에서는 월급 100만원 받았는데 먹고살 만은 했습니다. 집도 있겠다 일하지 않아도 되지만 ‘뒷방 늙은이’는 되기 싫더군요. 배운 게 아깝기도 하고 봉사를 계속할 수 있는 곳을 찾고 있었는데 마침 이 늙은이를 오라는 데가 있어서 왔죠.”
손의섭 매그너스의료재단 이사장은 열정적으로 환자를 돌보는 그의 모습에 감동해 ‘종신계약’을 제안했다. 손 이사장은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서 고령 의사가 제대로 환자를 볼 수 있겠느냐고 조사를 나온 적이 있다”며 “그런데 한 과장님이 컴퓨터로 전자의무기록을 능숙하게 다루고 유창하게 영어로 강의하는 모습을 보고 혀를 내두르고 갔다”고 했다.
‘과장’이란 직함은 그가 고집한 것이다. “명예원장 같은 직함을 주겠다는데 싫다고 했어요. 더 늙고 병에 걸려서 일을 못할 때까지 과장으로 평생 일하겠다고 했죠. 그랬더니 아프면 이 병원에서 임종 때까지 입원시켜주겠다고 하더군요. 월급도 보지 않고 왔는데 9년 내내 월 300만원을 받으니 주변에서는 ‘노예계약’이라고 합디다. 의사 중에 이만큼 받는 사람 아무도 없다면서요. 그래도 예전에 100만원 받던 때보단 많다고 생각합니다. 10곳 정도를 후원하고 있는데 십일조도 내고 자비로 해외봉사갈 때 말고는 돈 쓸 일도 없습니다.”
‘금수저’ 인생 대신 택한 봉사의 길
“백화점도 안 가고 쇼핑도 안 한다”는 그지만 젊은 시절엔 남부러울 것 없는 호화로운 삶을 살았다. 1926년 의사 집안에서 태어나 부족함 없이 자랐고 1949년 고려대 의대의 전신인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한 뒤 산부인과를 개업했다. 1959년 미국 유학 중이던 남편의 권유로 미국에서 내과전문의 자격증을 딴 뒤 미국에서 10년간 의사로 일했다. 한국에 돌아와 개인병원을 차리자 환자들이 몰려들었다. 돈도 많이 벌었다. 상위 1%의 ‘금수저’ 인생이었다.
하지만 52세가 되던 1978년 남편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그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놨다. 그의 남편은 고체물리학 권위자인 김희규 박사다. 김 박사는 실종된 지 17일 만에 숲 속에서 음독 자살한 채 발견됐다. 이 사건은 당시 신문 톱기사로 다뤄질 만큼 온 국민의 관심을 끌었다.
“사람이 큰 충격을 받으면 삶을 돌아보고 정리하게 됩니다. 의사가 되고 나서 환자 보고 애들 키우고 남편 뒷바라지하느라 바쁘게 살았어요. 진지하게 내 삶에 대해 생각할 여력이 없었죠. 남편이 죽고 나자 모든 게 의미가 없어지더군요. 죽으면 칫솔 하나 못 가지고 가잖아요. 돈을 많이 벌어 수억원을 자식에게 남겨준다고 한들 무슨 소용이 있나 싶었습니다.”
개인병원을 접고 봉사의 길을 택했다. 한국기독교의료선교협회 부설 의료선교의원에 들어갔다. 어떻게 하면 만족할 수 있는 삶을 살 수 있을지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이곳에서 영세민, 노숙자를 가리지 않고 경제적으로 어려운 환자들을 무료로 진찰했다.
“남편을 보니 하고 싶은 일을 못다 하고 죽은 게 큰 한이 될 것 같았습니다. 의료봉사를 하면 적어도 하나님 앞에 떳떳하게 설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병원을 할 때는 환자가 치료비를 낼 수 있을지 걱정될 때가 있었는데 돈을 안 받고 진료하니 그런 걱정을 안 해도 돼서 속이 편하더군요. 손해보는 게 아니라 기쁨을 얻게 됐습니다.”
마음까지 고쳐주는 의사
그는 1982년 국내 최초로 환자의 질병뿐만 아니라 정서와 환경까지 치료하는 ‘전인치유소’를 열었다. 신체적 질병을 고치는 것도 중요하지만 마음의 병까지 함께 치유해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가난한 환자들에게 생활비, 장학금도 지원하며 자립을 도왔다. 치료한 환자 중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도 적지 않다.
“야맹증으로 고생하던 환자가 기억에 남습니다. 눈이 어두워 직장을 구하지 못하고 마흔이 넘도록 장가를 못 가 가족들에게 온갖 구박을 받고 힘들게 살던 사람이었죠. 봉사자들이 조금씩 돈을 모아 길거리에서 칼, 가위를 파는 좌판을 해보라고 권유했습니다. 제법 장사가 잘됐어요. 해보려는 의지가 생기니까 가족들도 사업을 키워보라며 리어카를 사줬죠. 그러다 보니 가족관계도 회복되고 나중엔 조그만 가게도 얻었습니다. 몇 년 후 연락이 닿았는데 장가도 가고 잘 살고 있다고 하더군요. 돈도 많이 벌어 눈수술도 한다면서요. 보람되고 기뻤습니다. 조금만 도와줘도 이 분들에겐 큰 힘이 된다는 걸 알게 되니 더 열심히 하게 됐습니다.”
소외계층을 곁에서 지켜봐온 경험은 재활병원에서도 빛을 발했다. 그는 환자의 마음을 가장 잘 이해해주는 의사로 통한다. “노인도 젊은 세대, 자식들에게 소외당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분들은 쉽게 섭섭해하고 노여워해서 웬만큼 노력해선 안 됩니다. 자칫하면 원수처럼 달려들기 때문에 인내심을 갖고 대하는 게 중요하죠. 어떤 환자는 30분 이상 저를 붙잡고 불만을 제기하는데 그럴 땐 찬송가를 부르라고 하고 다른 환자를 보러 갑니다. 제가 터득한 기술이에요. 노래를 부르다 보면 화가 어느 정도 누그러지고 화가 난 이유도 잊게 되거든요.”
이렇게 시작한 의료봉사가 39년째다. 그는 힘들 때마다 의사였던 아버지를 떠올린다고 했다. “아버지는 8·15 광복 이후 콜레라가 유행할 때 병원 문을 닫고 환자를 보러 다니셨습니다. 진주에서 한일의원을 운영하면서 형무소 수감자들과 한센병 환자도 돌보셨죠. 요즘 젊은 사람들은 돈벌이가 좋다는 이유로 의사, 변호사를 선호하는데 그게 전부가 아니란 걸 어려서부터 배웠던 것 같습니다.” 그는 가장 효과적인 치료법은 사랑이라고 했다. “사랑이 제일입니다. 치매 환자도 사랑으로 돌보는 사람을 알아봅니다.”
“남은 삶 노인 환자 곁에서 돌볼 것”
성천상 시상식은 오는 17일 서울 웨스틴조선호텔에서 열린다. 상금은 1억원이다. 그는 “상금 얘기는 처음 들었다”며 “안 그래도 요새 자금 사정이 좋지 않은데 반가운 소리”라며 반겼다.
“주택 자금 대출 이자를 갚느라 후원금을 제때 못 내고 있었는데 다행입니다. 여유가 생기면 보충해서 내야지 생각하고 있었는데, 상금으로 돕고 싶은 사람을 도울 수 있겠네요. 딸이 암에 걸려 치료를 받고 있는데 맛있는 것도 사주고 손녀 대학 등록금도 지원해주고 싶습니다.”
오후 4시에 시작한 인터뷰가 퇴근 시간이 다 돼서야 끝났다. 그는 “인터뷰하느라 환자를 못 봤으니 지금부터 일해야겠다”며 다시 청진기를 들었다. “남편이 하늘나라로 떠났을 때 빼고는 만족스럽고 기쁜 일생이었습니다.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어요. 남은 생도 저와 같은 노인 환자들 곁에서 의사로서 최선을 다할 겁니다.”
■ 에세이 발간한 한원주 의사
"백세 현역이 어찌 꿈이랴"…90대 여의사의 일과 삶 녹여내
한원주 과장의 책상에는 정갈한 글씨체로 하루 일과를 정리한 노트가 있다. 매일 아침 이메일을 확인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할 만큼 컴퓨터에 익숙하지만 일기는 손으로 직접 적는다. 꼼꼼하게 작성한 이 기록들을 모아 지난해 5월 책으로 펴냈다. 《백세 현역이 어찌 꿈이랴》라는 에세이다. 그는 “제목은 출판사에서 정한 것”이라며 “원래 생각했던 건 ‘어느 90대 여의사의 일과 삶’이었는데 막상 책으로 나오니 부끄럽다”고 했다. “책을 낼 생각은 전혀 안 했는데 제 인생 얘기를 들은 주변 사람이 출간해보라고 하더군요. 처음엔 이걸 어디에 팔겠나 싶고 자신이 없어서 1000부를 찍었는데 다 나갔어요. 작년에 90세 생일을 맞아서 기념으로 낸 건데 다시 찍을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시간이 날 때마다 틈틈이 일기를 써놓은 게 많은 도움이 됐다. 책에는 의사로서 삶뿐만 아니라 아내와 엄마, 한 가정을 돌보는 주부이자 사회인으로서 살아온 일생이 담겨 있다. 한 과장은 “암울한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항일지사인 부모님 밑에서 자라면서 중·일전쟁, 제2차 세계대전, 6·25전쟁을 다 겪었다”며 “이런 시기에 여의사로서 살면서 겪었던 기록들이 후손에게도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전예진 기자 ac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