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춘호의 글로벌 Edge] AI 향한 끝없는 도전
파괴적 혁신을 주창한 학자로 유명한 클레이튼 크리스텐슨이 《혁신기업의 딜레마》에서 하드디스크드라이브(HDD)를 파괴적 혁신의 대표적 모델로 꼽은 것은 이 장치가 정보기술(IT) 환경의 수요에 맞춰 갈수록 작아지고 경량화돼 가는 과정을 주목했기 때문이다. 소형화하는 과정에서 신생기업들이 혁신으로 기존 제품에 안주하는 기업을 무너뜨리는 과정은 그야말로 드라마틱하다.

PC 문명을 이끌었던 HDD는 하지만 디지털 기술이 발전하면서 핵심 동료였던 중앙처리장치(CPU)와 D램 반도체의 엄청난 변화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다. CPU는 1986년 대비 570배나 빨라졌다. D램 또한 150배나 빠른 제품이 나왔다. HDD의 데이터 처리 속도 증가는 불과 20배밖에 되지 않았다. 자기 매체였던 HDD는 물리적 회전 속도가 반도체인 CPU와 칩에 비해 한계를 가졌기 때문이었다.

혁신 총아 HDD 혁신에서 밀려나

HDD를 대신해 나온 장치가 바로 낸드플래시와 솔리드스테이트드라이브(SSD)다. 전원이 꺼져도 데이터를 저장하는 마법의 반도체가 낸드플래시다. SSD는 이 낸드플래시 메모리를 수십 개 합쳐 만든 저장 매체다. 반도체 칩과 하드디스크 기능을 합친 형태다. 빠른 속도로 데이터를 읽고 기록하며 추출할 수 있다. 소음도 적고 전력 소모도 적다.

낸드플래시와 SSD의 거침없는 혁신은 단기간에 HDD 시장을 붕괴시켰다. 삼성전자는 그제 1테라비트 낸드플래시를 개발, 양산에 나선다고 발표했다. 1993년 개발한 16메가비트 플래시를 내놓은 지 24년 만에 저장 용량을 6만 배 이상으로 늘렸다. 2013년 3차원 낸드플래시 이후 5년 만에 처리 속도는 8배가 빨라졌다. SSD의 저장 용량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엄청난 용량의 정보를 마하급 속도로 유통하고 처리할 수 있는 시대가 된 것이다. 물론 SK하이닉스나 웨스턴디지털 등 다른 기업들의 추격도 만만찮다. HDD 혁신이 끝나자 플래시 메모리와 SSD가 다시 파괴적 혁신을 일으킨 것이다.

SSD가 '마하 혁신' 이끌어

인공지능(AI) 시대 여명기에 기초체력이 다져지고 있다. 이미 AI를 향한 맞춤형 딥러닝 SSD가 선보이고 있다. 데이터의 신뢰성이 높고 낮음에 따라 할당되는 메모리가 다른 SSD다. SSD가 데이터를 판독해 딥러닝을 통해 판단할 수 있는 기술이다. 데이터 용량이 커지면 더욱 더 쉽게 판단할 수 있게 된다. 모든 컴퓨터가 초고속으로 연결되면서 데이터 처리 속도도 마하급으로 변할 날이 얼마남지 않았다.

이런 펀더멘털의 구축이 어떤 문명의 꽃을 피울지 모른다. 데이터와 정보를 쉽게 저장하고 초고속으로 처리할 수 있다면 개인의 정보 소비는 그야말로 극대화될 것이다. 미래학자들이 말하는 초(超)개인화가 가능할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물론 배터리의 혁신도 AI 시대를 앞둔 체력 기르기다. 이제 시간의 마하 시대가 문제가 아니다. 정보 유통과 소비의 마하 시대로 인류가 들어서고 있다. 파괴적인 혁신은 그렇게 계속된다.

한때 혁신의 총아였던 HDD는 순식간에 혁신 동력을 잃고 네트워크 혁신의 진화에서 밀려났다. 데이터를 쉽게 잃게 하고 트러블을 일으키는 컴퓨터의 고질로만 취급될 가능성도 높다. 파괴와 창조가 혁신의 근원인 사실을 망각하는 순간 바로 혁신의 걸림돌이 되고 파국을 맞을 수 있는 그런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HDD는 그렇게 종말을 맞는 것인지.

오춘호 선임기자·공학박사 ohcho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