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플 창업자이자 최고경영자(CEO)인 스티브 잡스가 아이폰을 처음 공개한 2007년 1월9일, 신문들은 “모든 것을 바꿔놓을 혁명”이라는 그의 말을 제목으로 뽑았다. 기술의 새로운 변곡점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아이폰 신화’에 이은 잡스의 혁명은 계속됐고, 그의 아이디어와 창의력을 분석하는 리포트도 쏟아졌다.

그해 7월21일 뉴욕타임스에 흥미로운 기사가 실렸다. 잡스가 18세기 영국 낭만주의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1757~1827)의 시에서 영감을 얻는다는 내용이었다. 이때부터 ‘잡스와 시적 상상력’이란 주제는 인문·경영계의 단골 메뉴가 됐다. 그러나 그가 구체적으로 어떤 시에서 통찰을 얻었는지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잡스를 매료시킨 블레이크의 시 중 대표적인 것은 ‘순수를 꿈꾸며(Auguries of Innocence)’다. 첫 연이 ‘한 알의 모래에서 세계를 보고/ 한 송이 들꽃에서 천국을 본다./ 그대 손바닥 안에 무한을 쥐고/ 찰나의 순간에서 영원을 보라’로 시작되는 132행짜리 긴 시다. 미세한 ‘모래’와 거대한 ‘세계’, 땅 위의 ‘들꽃’과 하늘 너머의 ‘천국’, 찰나의 ‘순간’과 무한의 ‘영원’이 절묘하게 대비돼 있다.

원문에는 1행에 나오는 ‘세계(World)’의 첫 글자가 대문자로 씌어 있다. ‘거대하다’는 의미의 시각효과를 강조한 것이다. 그의 시에서 잡스는 많은 것을 배웠다. 작은 것과 큰 것, 없는 것과 있는 것의 시적 은유를 ‘0’과 ‘1’이라는 디지털 언어와 접목시키기도 했다. 그 뒤로도 생각이 막힐 때마다 그의 시집을 펼쳤다. 아이폰 모서리를 둥글게 결정한 계기도 블레이크의 시에서 포착했다고 한다.

200년 시차를 넘는 시적 교감에서 잡스의 인문학적 사고가 꽃피었던 것이다. 이런 배경을 알고 나면 “그동안 사람들은 기술을 따라잡으려 애썼지만, 사실은 기술이 사람을 찾아와야 한다”는 그의 말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두 사람은 닮은 점이 많다. 성격이 별난 데다 학교를 중퇴했고, 자유로움을 추구했으며, 그림과 명상을 좋아했다. 간결하고 상징적인 어휘의 공감대까지 갖췄다. 블레이크는 가난한 양말장수 아들로 미술학교만 잠시 다녔지만 시·그림에 뛰어났다. 잡스도 불우한 유년기와 입양, 대학 중퇴, 고집불통의 면모를 지녔으나 자기가 좋아하는 분야에선 독보적인 능력을 발휘했다. 둘의 기질은 본질과 단순함을 중시하는 애플의 철학과도 맞닿는다.

오늘은 블레이크가 190년 전 세상을 떠난 날이다. 6년 전 타계한 잡스와 함께 창의·상상의 날개로 세상을 뒤바꾼 두 대가의 공감각적 삶을 새삼 되새겨 본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