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전자업계의 산증인이자 삼성 ‘반도체 신화’의 초석을 다진 것으로 평가받는 강진구 전 삼성전자·삼성전기 회장이 지난 19일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0세.

강 전 회장은 1973년 삼성전자 대표를 맡아 1998년까지 이병철·이건희 회장 2대(代)에 걸쳐 25년간 삼성전자를 이끌며 반도체와 통신사업의 기틀을 다진 대표적인 1세대 전문경영인이다. 서울대 전자과 출신으로 삼성전자의 엔지니어 최고경영자(CEO) 시대를 연 인물이기도 하다.

강 전 회장은 중앙일보와 동양방송 이사를 거쳐 1973년 삼성전자 상무를 시작으로 ‘삼성맨’이 됐다. 이후 삼성전자 전무·사장, 삼성전자부품·삼성정밀 사장, 삼성반도체통신 사장, 삼성전기 대표이사, 삼성전자·삼성전관·삼성전기 회장, 삼성그룹 구조조정위원 등을 거쳤다.

강 전 회장은 1960년 국내 최초의 민영 TV방송인 동양방송 개국에 참여하면서 “우리 전자산업의 뿌리를 내려보겠다”며 방송장비를 국내 기술로 제작하는 역할을 자임했고, 이를 눈여겨본 이병철 전 회장이 발탁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삼성전자에 부임하자마자 당시 적자였던 회사를 흑자기업으로 바꿔놓은 데 이어 1983년 64K D램을 세계 세 번째로 출시하면서 세계적인 종합 반도체 기업으로 발돋움시켰다.

1995년 6월 ‘삼성 명예의 전당’ 설립과 동시에 첫 번째로 헌액된 강진구 전 회장이 상패를 들어보이고 있다.
1995년 6월 ‘삼성 명예의 전당’ 설립과 동시에 첫 번째로 헌액된 강진구 전 회장이 상패를 들어보이고 있다.
강 전 회장이 1998년 삼성전기 회장으로 자리를 옮긴 뒤 “후배들에게 길을 터주겠다”며 사임 의사를 밝혔을 때 이건희 회장이 극구 만류할 정도로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이 회장은 강 전 회장을 1995년 6월 ‘삼성 명예의 전당’에 첫 번째로 헌액하는 최고 예우로 대하기도 했다.

이 회장은 1996년 강 전 회장이 발간한 회고록 《삼성전자 신화와 그 비결》의 추천사에서 “오늘의 삼성전자를 있게 한 최대의 공로자”라며 “세계 전자업계에서조차 강 회장을 한국 전자산업의 대표적 전문경영인으로 평가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전자공업진흥회장, 전자산업진흥회장 등을 지내며 국내 전자업계를 대표하는 인물로 꼽혔고 2006년에는 서울대와 한국공학한림원이 선정한 ‘한국을 일으킨 엔지니어 60인’에 오르기도 했다. 스스로 ‘전자 인생’을 살았다고 말한 강 전 회장은 금탑산업훈장, 장영실과학문화상 등을 받았다.

유족으로는 강병창 서강대 교수, 강선미 서경대 교수와 강선영 씨가 있다. 빈소는 삼성서울병원에 마련됐으며 발인은 23일 오전이다.

노경목 기자 autonom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