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애치슨 라인과 가쓰라-태프트 밀약
올해 한·미 연합 을지프리덤가디언 연습에 참가하는 미군 병력이 30%나 줄었다. 미국 원자력잠수함 등 전략자산 동원 계획도 없다고 한다. 이틀 전만 해도 합참의장이 “훈련 축소는 없다”고 했고, 국방부는 “지난해와 비슷한 규모로 진행할 것”이라고 했다. “북한 위협에 굴복한 훈련 축소”라는 관측이 나온다.

가뜩이나 외교 무대에서 한국이 소외되는 ‘코리아 패싱’이 나도는 데다, 주한 미군 철수론 등 민감한 현안이 맞물려 돌아가는 상황이다. 미국과 일본 중국 북한의 물밑교섭에서 한국이 ‘외딴섬’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경고가 이어지고 있다. 한국이 미국 방위라인에서 배제되는 ‘신(新)애치슨 라인’을 걱정하는 소리도 들려온다. 일본의 한국 지배를 용인한 ‘가쓰라-태프트 밀약’의 뼈아픈 과거를 떠올리는 이들도 많다.

애치슨 라인은 1950년 1월 미 국무장관 애치슨이 미국의 아·태 방위선을 알래스카~일본~오키나와~필리핀으로 정한 것이다. 한국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는 것으로 받아들인 김일성의 오판으로 5개월 뒤 6·25가 발발했다. 지난주 미·일 2+2(외교·국방)장관 회담에서 틸러슨 미 국무장관은 “일본의 안보를 강화하기 위한 대화에 초점을 뒀다”면서 한국을 호주·인도, 기타 동남아국과 함께 ‘지역 파트너’로 표현했다. 매티스 국방장관도 한국과 손발이 맞지 않는 현실을 에둘러 지적하며 한·미 협력 강화를 주문했다.

미·일 정상은 그 어느 때보다 가깝다. 북한의 ‘괌 포위사격’ 위협 때 트럼프 대통령은 아베 총리와 곧바로 통화했다. 북한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시험발사 때도 트럼프와 아베는 긴급 통화를 했다. 당시 한국 대통령은 휴가지에 있었다. 청와대는 미국과 충분히 협의하고 있다고 해명했지만 ‘코리아 패싱’ 의구심을 씻기엔 부족했다.

이대로 가다간 제2의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걱정해야 할 판이라는 말까지 나온다. 1905년 일본 총리 가쓰라와 미국 전쟁장관 태프트가 일본의 한국 지배와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상호 승인한 지 5년 만에 한국은 일본에 강제병합됐다. ‘아시아 평화’를 내세운 이 밀약으로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은 노벨평화상을 받았고 태프트는 27대 미국 대통령에 올랐다.

외교 전문가들은 “앞으로 미국 중심의 해양세력과 중국 중심의 대륙세력이 부딪치는 과정에서 한국은 언제든지 희생될 수 있는 카드”라고 지적한다. 우리 정부가 말과 행동이 다른 줄타기 외교를 계속한다면 1세기 전, 67년 전의 비극이 재연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 와중에 일본은 내년 방위비를 5조엔(약 50조원) 이상으로 늘리기로 했다. 외교는 말로만 하는 게 아니다. 자강(自) 없는 국가는 미래도 없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