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과 맛있는 만남] 김도진 기업은행장 "강인한 러시아 사람 같다고 '도진스키' 별명 얻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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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년 내내 아침 7시 출근…첫 지점장 땐 매일 공단 돌아
'질투'는 성장의 원동력
뭐든 잘하던 형은 동경과 질투 대상
형처럼 의성서 서울 유학가고 싶어 '열공'
단국대 경제학과 4년 장학생으로 입학
'현장밥'은 성공의 밑거름
지점장 최초로 SUV 몰며 영업
홀로 비포장길 달려 공장 찾아가
3년 만에 '전국 1등 지점장' 영예
'대인춘풍 지기추상' 인생 좌우명
남에게는 부드럽게, 나에게는 엄하게
신입행원시절부터 고수해온 생활 태도
직원 보고 맘에 안들어도 무안주지 않아
'질투'는 성장의 원동력
뭐든 잘하던 형은 동경과 질투 대상
형처럼 의성서 서울 유학가고 싶어 '열공'
단국대 경제학과 4년 장학생으로 입학
'현장밥'은 성공의 밑거름
지점장 최초로 SUV 몰며 영업
홀로 비포장길 달려 공장 찾아가
3년 만에 '전국 1등 지점장' 영예
'대인춘풍 지기추상' 인생 좌우명
남에게는 부드럽게, 나에게는 엄하게
신입행원시절부터 고수해온 생활 태도
직원 보고 맘에 안들어도 무안주지 않아
김도진 기업은행장(58)은 기업은행 임직원 사이에서 ‘도진스키’로 불린다. ‘도진’이란 이름에 러시아 사람 이름에 자주 붙는 ‘스키’를 합친 말이다. 강인하고 다부지며 용맹스럽다는 의미다.
김 행장을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하는 호기심을 자아낸다. 실제로 만나보면 단박에 궁금증이 풀린다. 서울 중구 입정동 전주집에서 만난 김 행장의 인상은 ‘도진스키’ 그 자체였다. 180㎝ 큰 키에 다소 까무잡잡한 피부, 다부진 체격을 지닌 그는 자리에 앉자마자 전주집 사장 및 종업원들과 반갑게 인사하고 대화를 나눴다. “오늘 거하게 매상을 올려주겠다”며 우스갯소리도 했다.
“1991년 대리 승진, 2001년 차장 승진, 2005년 지점장 발령 등 기념할 일이 있을 때면 으레 여기로 와서 저녁을 샀습니다. 비단 저만 그런 게 아니고, 기업은행 사람들 중에서는 이곳에서 ‘축하턱’을 내는 일이 비일비재하죠. ‘기업은행맨’들에게는 마치 구내식당 같은 장소거든요.”
시골에서 태어나 자수성가
뜨겁게 달군 불판 위에 얇게 썰어낸 냉동 목삼겹살이 촘촘히 얹어졌다. 한 사람에 한 접시씩 주어진 파무침 위에 올라가 있는 계란 노른자가 눈에 띄었다. 고기가 다 구워지자 김 행장은 지체없이 파무침에 노른자를 비비면서 ‘전주집 단골’로서의 시범을 보였다. “구운 목삼겹살에 이 파무침을 올려 먹어야 화룡점정”이라는 것이다.
“고기 먹을 줄 아는 것을 보니 혹시 ‘금수저’가 아니냐”는 말에 김 행장은 바로 손사래를 쳤다. 김 행장이 태어난 곳은 경북 의성의 한 시골 마을이다. 2남2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마을을 통틀어도 60가구에 불과한 작은 동네였다. 아버지는 농사를 지었고, 어머니는 가사를 돌봤다. 부족하다면 부족한 집안이었다.
초등학생 시절에는 미군이 학교에서 배급해주는 커다란 빵을 들고 하교해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집에서 가족들과 그것을 나눠 먹는 것이 커다란 낙(樂) 중 하나였다. 수재였던 세 살 위의 형과는 자주 충돌했다. 그는 “형은 공부도 잘하고 착실한데 나는 아니었다”며 “만날 혼나고 만날 싸운 기억이 있다”고 웃었다.
김 행장의 성장을 촉진한 것은 그 많이도 싸우던 형이었다. 김 행장이 중학교에 입학했을 때 큰형은 경복고에 합격해 서울로 올라갔다. 집안의 경사였다. 김 행장이 고등학생이 됐을 무렵 형은 장학금을 받고 고려대에 진학했다. 김 행장은 “형처럼 서울에 가서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한편으로는 미움의 대상이던 형이 한편으로는 동경의 대상이 된 것이다.
대구 대륜고에 진학한 뒤 근처에서 하숙생활을 했다. 매일 점심으로 하숙집에서 싸주는 도시락을 먹었다. 계란프라이가 나오는 날이 가장 기뻤을 정도로 없던 시절이었다. 교실 맨 뒷자리에 앉는 거구의 고등학생으로서는 항상 배가 고플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공부는 게을리하지 않았다.
김 행장은 단국대 경제학과에 4년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더 좋은 곳에 갈 수도 있었지만, 집안 사정을 고려해 장학금을 받으며 다니기로 했다.
최초로 SUV 탄 ‘1등 지점장’
목삼겹살은 그대로 파무침과 함께 싸 먹어도 맛있지만, 콩나물과 부추무침 등 다른 나물반찬과 함께 불판에서 비벼 먹으면 그 맛이 두 배가 된다. 김 행장은 “여기처럼 냉동고기를 맛있게 하는 곳이 없다”며 연거푸 쌈을 싸서 입에 넣었다.
김 행장은 대학교 3학년 때 학군단(ROTC) 생활을 시작해 졸업과 동시에 소위로 임관했다. 근무지는 경기 양주였다. 중위가 되고 나서부터 본격적인 취업 준비를 시작했다. 당시 상과대학을 나온 졸업생 사이에서는 은행이 가장 큰 인기였다. 연봉도 많이 주고 안정적이었다. 김 행장도 은행을 노렸다.
“당시 연대장에게 거듭 부탁해 간신히 기업은행 서류를 얻었고 합격했죠. 기뻤습니다. 나중에 다른 은행에서도 합격했다는 통보를 들었지만 기업은행에 다니기로 결심한 뒤였죠. 기업은행은 국책은행으로서 국가 경제에 기여한다는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 곳이죠.”
1985년 입행 후 발령받은 첫 근무지는 서울 등촌동 지점이었다. 대졸 출신이지만 초임이다 보니 다른 고졸 직원이 하는 일과 별반 다르지 않은 일들을 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주판을 써보는 김 행장에게는 각종 계산 과정이 익숙하지 않았다. 결국 따로 주산학원을 다니며 남들을 따라잡았다.
김 행장의 인생에서 ‘터닝포인트’가 된 것은 1995년부터 시작한 비서과장 생활이다. 이우영 김승경 이경재 김종창 등 4명의 행장을 모셨다. 행장이라고 하면 딱딱하고 어려운 존재인 줄로만 알았던 김 행장에게 그들은 의외의 인간적인 모습과 따뜻한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이때부터 “나도 행장이 되면 어떨까” 하는 김 행장의 ‘꿈’이 시작됐다.
2005년 인천 원당지점에서 첫 지점장 생활을 했다. 그는 다른 지점장과 달리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을 타고 다녔다. “지점장이 되면 영업용으로 일반 승용차인 현대차의 쏘나타가 나왔어요. 그런데 원당지점에서 인근 공단에 가려면 비포장도로 수준의 차도를 타야 하는데, 그걸로는 도무지 안 될 것 같은 거죠. 당시 지역본부장이던 조준희 전 행장에게 이야기했어요. SUV로 바꿔달라고. 기업은행 지점장 중에서는 처음 있는 사례죠.”
SUV를 홀로 타고 다니면서 오전에 두 곳, 오후에 두 곳씩 각종 기업을 꼬박꼬박 방문했다. 업무 때문에 만난 사람들이지만 인간적으로 접근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 결과 2008년 1월 전국 700여 명 지점장 중 1등 지점장이 되는 영예를 안았다. ‘행장의 꿈’이 한 걸음 다가오는 순간이었다.
남에겐 부드럽게, 자신에겐 엄하게
고기를 거의 다 비우고 나자 불판에 공기밥이 올라왔다. 남은 고기와 나물반찬, 김치를 잘게 잘라서 고기 기름과 달달 볶은 뒤 한 입 먹어 보니 기름지면서도 고소한 풍미가 올라왔다. 단돈 2000원의 행복이다.
김 행장의 ‘카카오톡’ 프로필 문구 얘기가 나왔다. ‘대인춘풍 지기추상(待人春風 持己秋霜)’을 적어놓고 좌우명처럼 삼는단다. ‘남에게는 봄바람처럼 부드럽게 대하되, 자신에게는 가을서리처럼 엄하게 해야 한다’는 채근담의 문장이다. 실제로 직원을 대하는 김 행장의 태도는 외적으로 보이는 도진스키 이미지와는 또 달랐다. 직원들에게 무섭게 대하는 일이 좀처럼 없다. 대신 스스로에게는 엄하다. 입행 후 32년 동안 매일같이 오전 7시에 맞춰서 출근하고 있다.
“보고를 100% 대면으로 받습니다. 직접 보고를 들어야 저도 잘 이해할 수 있고, 임직원도 명확하게 얘기할 수 있죠. 물론 마음에 안 드는 보고도 많아요. 그래도 티는 안 냅니다. 본인도 열심히 고민하고 분석해서 올린 보고일 텐데, 굳이 깎아내릴 이유가 없죠.”
2016년 12월 취임 이후 김 행장이 가장 관심을 갖는 것은 ‘비정규직 완전한 철폐’ 등 일자리 문제다. 무기계약직 3000명의 정규직 전환을 검토 중이다. 생소한 시도는 아니다. 이미 2009년 전략기획부에 근무할 당시 정부를 설득해 2014년까지 2000명가량의 신규 인력을 뽑은 경험이 있다. 중소기업들과 손잡고 ‘일자리 10만 개 만들기’ 프로젝트도 추진 중이다.
“최근의 신입 행원들을 보면 그 나이대 저보다도 더 총명하고 패기가 넘친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좋은 인재에게 적절한 자리를 만들어줌으로써 조금이라도 그들에게 희망을 주고 싶습니다.”
■ '동반자 금융' 앞세운 기업은행…중소기업 일자리 10만개 창출 지원
기업은행은 1961년 8월 자본금 2억원으로 출발한 정책 금융기관이다. 중소기업에 특화한 금융서비스를 제공함으로써 이들의 성장과 자립을 돕고 있다. 1980년에는 미국 뉴욕사무소를 열며 해외 진출에도 시동을 걸었다.
올 상반기 7971억원의 순이익을 올렸다. 지난 6월 말 기준 중소기업 대출 잔액은 138조7000억원이다. 전 은행을 통틀어 중소기업 대출 점유율이 22.6%에 달한다. 점포 수는 국내 616개, 해외 12개다.
지난해 12월 25대 기업은행장으로 취임한 김도진 행장은 지속적으로 중소기업과의 ‘동반자 금융’을 강조해왔다. 단순한 금융 파트너를 넘어 중소기업의 성장, 해외 진출, 구조조정 등을 적극적으로 돕겠다는 취지다.
청년 일자리 문제 및 중소기업 인력난을 동시에 해소하는 ‘일자리 10만 개 만들기’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김도진 기업은행장
△1959년 경북 의성 출생
△1978년 대구 대륜고 졸업
△1983년 단국대 경제학과 졸업
△1985년 기업은행 입사
△1995년 은행장 비서과장
△2005년 인천원당지점 지점장
△2008년 본부기업금융센터장
△2009년 대외협력부장
△2010년 전략기획부장
△2012년 남중지역본부장
△2013년 남부지역본부장
△2014년 경영전략그룹 부행장
△2016년 12월~ 제25대 기업은행장
■ 김도진 행장의 단골집 전주집
파무침 곁들인 냉동 목삼겹살 '일품'
28년째 입정동 골목지킨 맛집 1989년 서울 중구 입정동에 문을 연 뒤 꾸준히 자리를 지켜온 28년 전통의 고깃집이다. 가격대에 비해 질 좋은 냉동고기를 취급해 주머니 사정이 좋지 않은 직장인들에게 인기가 높다. 28년째 변하지 않은 낡은 간판과 인테리어, 매장에 들어오기까지 거쳐야 하는 후미진 골목이 정취를 더한다.
주력 메뉴인 목삼겹살은 생고기를 급속 냉동시켜 여느 생고기보다 맛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는다. 불판에 올려놓은 목삼겹살에 밑반찬으로 나온 콩나물과 부추무침 등을 한데 섞어 먹으면 맛이 한층 더 깊어진다.
또 다른 ‘트레이드 마크’는 계란 노른자를 올린 파무침이다. 신선한 노른자를 파무침과 비벼서 고기와 함께 상추 위에 올리고, 마지막으로 쌈장과 마늘 등을 싸서 먹는 것이 이 집을 즐기는 ‘모범 식객(食客)’의 자세다.
국내산 냉동 목삼겹살과 생삼겹살이 각각 1만1000원, 1만2000원이다. 이 밖에 오리고기(1만1000원), 국내산 육우 등심(2만원) 등의 고기 메뉴를 판매하고 있다. 고기를 먹으며 입가심으로 삼거나 점심 메뉴로 즐길 수 있는 된장찌개(7000원), 김치찌개(7000), 제육볶음(7000원)도 손님들이 많이 찾는다.
윤희은 기자 soul@hankyung.com
김 행장을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하는 호기심을 자아낸다. 실제로 만나보면 단박에 궁금증이 풀린다. 서울 중구 입정동 전주집에서 만난 김 행장의 인상은 ‘도진스키’ 그 자체였다. 180㎝ 큰 키에 다소 까무잡잡한 피부, 다부진 체격을 지닌 그는 자리에 앉자마자 전주집 사장 및 종업원들과 반갑게 인사하고 대화를 나눴다. “오늘 거하게 매상을 올려주겠다”며 우스갯소리도 했다.
“1991년 대리 승진, 2001년 차장 승진, 2005년 지점장 발령 등 기념할 일이 있을 때면 으레 여기로 와서 저녁을 샀습니다. 비단 저만 그런 게 아니고, 기업은행 사람들 중에서는 이곳에서 ‘축하턱’을 내는 일이 비일비재하죠. ‘기업은행맨’들에게는 마치 구내식당 같은 장소거든요.”
시골에서 태어나 자수성가
뜨겁게 달군 불판 위에 얇게 썰어낸 냉동 목삼겹살이 촘촘히 얹어졌다. 한 사람에 한 접시씩 주어진 파무침 위에 올라가 있는 계란 노른자가 눈에 띄었다. 고기가 다 구워지자 김 행장은 지체없이 파무침에 노른자를 비비면서 ‘전주집 단골’로서의 시범을 보였다. “구운 목삼겹살에 이 파무침을 올려 먹어야 화룡점정”이라는 것이다.
“고기 먹을 줄 아는 것을 보니 혹시 ‘금수저’가 아니냐”는 말에 김 행장은 바로 손사래를 쳤다. 김 행장이 태어난 곳은 경북 의성의 한 시골 마을이다. 2남2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마을을 통틀어도 60가구에 불과한 작은 동네였다. 아버지는 농사를 지었고, 어머니는 가사를 돌봤다. 부족하다면 부족한 집안이었다.
초등학생 시절에는 미군이 학교에서 배급해주는 커다란 빵을 들고 하교해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집에서 가족들과 그것을 나눠 먹는 것이 커다란 낙(樂) 중 하나였다. 수재였던 세 살 위의 형과는 자주 충돌했다. 그는 “형은 공부도 잘하고 착실한데 나는 아니었다”며 “만날 혼나고 만날 싸운 기억이 있다”고 웃었다.
김 행장의 성장을 촉진한 것은 그 많이도 싸우던 형이었다. 김 행장이 중학교에 입학했을 때 큰형은 경복고에 합격해 서울로 올라갔다. 집안의 경사였다. 김 행장이 고등학생이 됐을 무렵 형은 장학금을 받고 고려대에 진학했다. 김 행장은 “형처럼 서울에 가서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한편으로는 미움의 대상이던 형이 한편으로는 동경의 대상이 된 것이다.
대구 대륜고에 진학한 뒤 근처에서 하숙생활을 했다. 매일 점심으로 하숙집에서 싸주는 도시락을 먹었다. 계란프라이가 나오는 날이 가장 기뻤을 정도로 없던 시절이었다. 교실 맨 뒷자리에 앉는 거구의 고등학생으로서는 항상 배가 고플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공부는 게을리하지 않았다.
김 행장은 단국대 경제학과에 4년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더 좋은 곳에 갈 수도 있었지만, 집안 사정을 고려해 장학금을 받으며 다니기로 했다.
최초로 SUV 탄 ‘1등 지점장’
목삼겹살은 그대로 파무침과 함께 싸 먹어도 맛있지만, 콩나물과 부추무침 등 다른 나물반찬과 함께 불판에서 비벼 먹으면 그 맛이 두 배가 된다. 김 행장은 “여기처럼 냉동고기를 맛있게 하는 곳이 없다”며 연거푸 쌈을 싸서 입에 넣었다.
김 행장은 대학교 3학년 때 학군단(ROTC) 생활을 시작해 졸업과 동시에 소위로 임관했다. 근무지는 경기 양주였다. 중위가 되고 나서부터 본격적인 취업 준비를 시작했다. 당시 상과대학을 나온 졸업생 사이에서는 은행이 가장 큰 인기였다. 연봉도 많이 주고 안정적이었다. 김 행장도 은행을 노렸다.
“당시 연대장에게 거듭 부탁해 간신히 기업은행 서류를 얻었고 합격했죠. 기뻤습니다. 나중에 다른 은행에서도 합격했다는 통보를 들었지만 기업은행에 다니기로 결심한 뒤였죠. 기업은행은 국책은행으로서 국가 경제에 기여한다는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 곳이죠.”
1985년 입행 후 발령받은 첫 근무지는 서울 등촌동 지점이었다. 대졸 출신이지만 초임이다 보니 다른 고졸 직원이 하는 일과 별반 다르지 않은 일들을 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주판을 써보는 김 행장에게는 각종 계산 과정이 익숙하지 않았다. 결국 따로 주산학원을 다니며 남들을 따라잡았다.
김 행장의 인생에서 ‘터닝포인트’가 된 것은 1995년부터 시작한 비서과장 생활이다. 이우영 김승경 이경재 김종창 등 4명의 행장을 모셨다. 행장이라고 하면 딱딱하고 어려운 존재인 줄로만 알았던 김 행장에게 그들은 의외의 인간적인 모습과 따뜻한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이때부터 “나도 행장이 되면 어떨까” 하는 김 행장의 ‘꿈’이 시작됐다.
2005년 인천 원당지점에서 첫 지점장 생활을 했다. 그는 다른 지점장과 달리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을 타고 다녔다. “지점장이 되면 영업용으로 일반 승용차인 현대차의 쏘나타가 나왔어요. 그런데 원당지점에서 인근 공단에 가려면 비포장도로 수준의 차도를 타야 하는데, 그걸로는 도무지 안 될 것 같은 거죠. 당시 지역본부장이던 조준희 전 행장에게 이야기했어요. SUV로 바꿔달라고. 기업은행 지점장 중에서는 처음 있는 사례죠.”
SUV를 홀로 타고 다니면서 오전에 두 곳, 오후에 두 곳씩 각종 기업을 꼬박꼬박 방문했다. 업무 때문에 만난 사람들이지만 인간적으로 접근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 결과 2008년 1월 전국 700여 명 지점장 중 1등 지점장이 되는 영예를 안았다. ‘행장의 꿈’이 한 걸음 다가오는 순간이었다.
남에겐 부드럽게, 자신에겐 엄하게
고기를 거의 다 비우고 나자 불판에 공기밥이 올라왔다. 남은 고기와 나물반찬, 김치를 잘게 잘라서 고기 기름과 달달 볶은 뒤 한 입 먹어 보니 기름지면서도 고소한 풍미가 올라왔다. 단돈 2000원의 행복이다.
김 행장의 ‘카카오톡’ 프로필 문구 얘기가 나왔다. ‘대인춘풍 지기추상(待人春風 持己秋霜)’을 적어놓고 좌우명처럼 삼는단다. ‘남에게는 봄바람처럼 부드럽게 대하되, 자신에게는 가을서리처럼 엄하게 해야 한다’는 채근담의 문장이다. 실제로 직원을 대하는 김 행장의 태도는 외적으로 보이는 도진스키 이미지와는 또 달랐다. 직원들에게 무섭게 대하는 일이 좀처럼 없다. 대신 스스로에게는 엄하다. 입행 후 32년 동안 매일같이 오전 7시에 맞춰서 출근하고 있다.
“보고를 100% 대면으로 받습니다. 직접 보고를 들어야 저도 잘 이해할 수 있고, 임직원도 명확하게 얘기할 수 있죠. 물론 마음에 안 드는 보고도 많아요. 그래도 티는 안 냅니다. 본인도 열심히 고민하고 분석해서 올린 보고일 텐데, 굳이 깎아내릴 이유가 없죠.”
2016년 12월 취임 이후 김 행장이 가장 관심을 갖는 것은 ‘비정규직 완전한 철폐’ 등 일자리 문제다. 무기계약직 3000명의 정규직 전환을 검토 중이다. 생소한 시도는 아니다. 이미 2009년 전략기획부에 근무할 당시 정부를 설득해 2014년까지 2000명가량의 신규 인력을 뽑은 경험이 있다. 중소기업들과 손잡고 ‘일자리 10만 개 만들기’ 프로젝트도 추진 중이다.
“최근의 신입 행원들을 보면 그 나이대 저보다도 더 총명하고 패기가 넘친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좋은 인재에게 적절한 자리를 만들어줌으로써 조금이라도 그들에게 희망을 주고 싶습니다.”
■ '동반자 금융' 앞세운 기업은행…중소기업 일자리 10만개 창출 지원
기업은행은 1961년 8월 자본금 2억원으로 출발한 정책 금융기관이다. 중소기업에 특화한 금융서비스를 제공함으로써 이들의 성장과 자립을 돕고 있다. 1980년에는 미국 뉴욕사무소를 열며 해외 진출에도 시동을 걸었다.
올 상반기 7971억원의 순이익을 올렸다. 지난 6월 말 기준 중소기업 대출 잔액은 138조7000억원이다. 전 은행을 통틀어 중소기업 대출 점유율이 22.6%에 달한다. 점포 수는 국내 616개, 해외 12개다.
지난해 12월 25대 기업은행장으로 취임한 김도진 행장은 지속적으로 중소기업과의 ‘동반자 금융’을 강조해왔다. 단순한 금융 파트너를 넘어 중소기업의 성장, 해외 진출, 구조조정 등을 적극적으로 돕겠다는 취지다.
청년 일자리 문제 및 중소기업 인력난을 동시에 해소하는 ‘일자리 10만 개 만들기’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김도진 기업은행장
△1959년 경북 의성 출생
△1978년 대구 대륜고 졸업
△1983년 단국대 경제학과 졸업
△1985년 기업은행 입사
△1995년 은행장 비서과장
△2005년 인천원당지점 지점장
△2008년 본부기업금융센터장
△2009년 대외협력부장
△2010년 전략기획부장
△2012년 남중지역본부장
△2013년 남부지역본부장
△2014년 경영전략그룹 부행장
△2016년 12월~ 제25대 기업은행장
■ 김도진 행장의 단골집 전주집
파무침 곁들인 냉동 목삼겹살 '일품'
28년째 입정동 골목지킨 맛집 1989년 서울 중구 입정동에 문을 연 뒤 꾸준히 자리를 지켜온 28년 전통의 고깃집이다. 가격대에 비해 질 좋은 냉동고기를 취급해 주머니 사정이 좋지 않은 직장인들에게 인기가 높다. 28년째 변하지 않은 낡은 간판과 인테리어, 매장에 들어오기까지 거쳐야 하는 후미진 골목이 정취를 더한다.
주력 메뉴인 목삼겹살은 생고기를 급속 냉동시켜 여느 생고기보다 맛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는다. 불판에 올려놓은 목삼겹살에 밑반찬으로 나온 콩나물과 부추무침 등을 한데 섞어 먹으면 맛이 한층 더 깊어진다.
또 다른 ‘트레이드 마크’는 계란 노른자를 올린 파무침이다. 신선한 노른자를 파무침과 비벼서 고기와 함께 상추 위에 올리고, 마지막으로 쌈장과 마늘 등을 싸서 먹는 것이 이 집을 즐기는 ‘모범 식객(食客)’의 자세다.
국내산 냉동 목삼겹살과 생삼겹살이 각각 1만1000원, 1만2000원이다. 이 밖에 오리고기(1만1000원), 국내산 육우 등심(2만원) 등의 고기 메뉴를 판매하고 있다. 고기를 먹으며 입가심으로 삼거나 점심 메뉴로 즐길 수 있는 된장찌개(7000원), 김치찌개(7000), 제육볶음(7000원)도 손님들이 많이 찾는다.
윤희은 기자 sou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