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향기] 구워 먹으면 다 불고기인가?...얇게 저미고 전용 불판 써야 제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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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는 셰프' 박찬일의 세계음식 이야기 - 불고기
일본서 성행하는 불고기 '야키니쿠'
'불에 구운 고기'라는 단순한 명칭
6·25전쟁 후 미군 드럼통 유통
오늘날의 전용 불판으로 정착
몽골인이 즐겨먹던 '설하멱'
조선때 석쇠에 굽던 '너비아니' 불고기 원조
소고기 유난히 좋아하는 우리 민족
조선때 '금살도감' 설치 도축 단속도
일본서 성행하는 불고기 '야키니쿠'
'불에 구운 고기'라는 단순한 명칭
6·25전쟁 후 미군 드럼통 유통
오늘날의 전용 불판으로 정착
몽골인이 즐겨먹던 '설하멱'
조선때 석쇠에 굽던 '너비아니' 불고기 원조
소고기 유난히 좋아하는 우리 민족
조선때 '금살도감' 설치 도축 단속도
일본에 가 보자. 오사카, 고베, 도쿄를 비롯한 일본 전국에 ‘야키니쿠’집이 성행한다. 아주 장사가 잘되고, 가게도 진짜 많다. 서점에 들렀더니 ‘야키니쿠의 본류를 찾아서’식의 토론 단행본이 출간돼 있을 정도다. 일본인 특유의 파고들기 심리를 보여준다. 오사카의 한 야키니쿠집을 찾았더니 주문받기 전에 이상한 말을 한다. 내용인즉 “2시간만 이용할 수 있으며 마지막 주문을 그 전에 해야 한다”고 한다. 가게가 끝나가는 시간도 아닌데 그렇다. 너무 손님이 많아 회전을 시키느라 그런 거다. 놀랍다. 흥미로운 건 이런 야키니쿠가 원래 한국(조선)에서 온 것이라는 사실을 젊은이들은 대개 모른다는 점이다. 일본에는 이미 1905년에 조선요리집이 생기면서 불고기 등을 팔기 시작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 일본이 패망하기 전에 이런 고깃집이 서서히 퍼지다가 패전 후 재일동포에 의해 본격적으로 간사이 지방을 중심으로 크게 성행했다.
일본과 다른 불고기 조리법
어쨌든 그들이 한국에서 받아들인 야키니쿠는 무슨 뜻일까. 문자 그대로 ‘燒肉’이다. 우리말로 바꾸면? 불고기다. 맞다. 고기를 불에 구워먹는다는 아주 단순한 명칭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런 단순함으로 그 요리를 보지 않는다. 불+고기라면 삼겹살도 있고 스테이크도 있다. 불고기를 설명하자면 복잡한 내력과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다. 일본의 야키니쿠는 불고기라고 번역할 수 있지만 문자 그대로 불에 구운 고기란 뜻뿐이다. 우리는? 다음과 같이 정의를 내리곤 한다.
‘고기를 얇게 저며서 간장과 여러 가지 양념에 절인 뒤 석쇠나 전용 용기에 구워 먹는 요리.’
일본 야키니쿠와 결정적인 차이가 바로 ‘얇게 저미고’ ‘전용 용기를 사용한다’는 점이다. 이런 방법은 우리 전래의 아주 오래된 조리법일까. 그 해답은 간단하지 않다.
우리가 먹는 현대의 불고기를 살펴보자. 누런 구리나 황동 등으로 제작한 반원형의 그릇을 숯이나 가스에 얹어 굽는다. 고기는 엷게 저미는데, 육절기를 쓴다. 설탕과 양파, 파, 버섯 등을 첨가한다. 구멍이 뚫린 불판에 고기를 굽다가 국물받이에 육수가 흘러 고이면 밥이나 면을 말아먹는다.
지금과 같은 불고기가 된 것은 1960년대 이후의 모습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1960년대 이전에는 전기로 가동해 고기를 아주 얇게 저미는 육절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 육절기의 등장은 불고기의 모습을 지금과 같이 혁명적으로 바꾸었다. 첫째, 원래 불고기는 등심 등을 썼는데 육절기를 쓸 수 있게 되면서 다릿살 등 저렴한 부위도 요리할 수 있게 됐다. 둘째, 일본의 영향으로 설탕을 넣게 되면서 얇게 썬 고기의 연육이 잘 이뤄져서 가격이 싼 부위도 부드럽게 먹을 수 있게 됐다.
그런데 흥미로운 얘기가 있다. 이런 불고기 전용 불판, 즉 노란색의 구멍이 뚫리고 국물받이가 있는 형태가 6·25전쟁 이후에 탄생했다는 주장이다. 서울 출신으로 언론인이자 음식평론가인 조풍연 선생은 ‘미군 드럼통 원조’론을 제기한다. 또 아동문학가이자 미식가인 마해송 선생도 비슷한 생각을 글로 쓰고 있다. 즉 석쇠를 주로 쓰다가 6·25 이후에 미군 드럼통이 시중에 돌면서 현재와 같은 불고기판이 나왔다는 것이다. 이런 불판은 생각지 못한 쓸모가 있었다. 못으로 드럼통에 구멍을 뚫으면 고기가 그 튀어나온 못 자국에 걸려서 둥글게 만든 불판에 놓아도 불판 밑으로 흘러내려가지 않는다. 또 그 구멍으로 불꽃이 직접 고기에 닿으므로 직화 효과를 낼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판의 밑을 접어올리면 국물받이가 돼 아까운 육수를 흘리지 않고 다 먹을 수 있게 됐다.
몽골인이 즐겨 먹던 ‘설하멱’이 원조 자, 그림 한 장을 보자. 19세기 화가 성협의 그림 ‘야연’이다. 노소가 어울려 고기를 굽고 술을 마신다. 불판을 잘 보라. 이글거리는 숯불 위에 불판이 놓여 있다. 이것이 전립투라고 부르는 벙거지불판이다. 가운데 아마도 기름과 간장, 육수 등을 부어 놓았고, 가장자리에 고기를 굽고 있다. 고기를 가운데 양념장에 담근 뒤 구웠을 수도 있고, 구운 후 양념장에 찍어서 먹었을 수도 있다. 이 시기의 책인 《동국세시기》(1849)에도 “화로에 숯불을 일으켜 석쇠를 올린다. 소고기에 참기름, 간장, 계란, 파, 고춧가루 등을 첨가하여 굽는다”고 설명하고 있다. 성협의 그림과 맞아떨어지는 설명이며, 당대 불고기와도 흡사하다.
불고기의 원류로 두 가지 이름이 거론된다. 설하멱과 너비아니다. 설하멱은 아주 흥미로운 이름이다.
설하멱(雪下覓)은 ‘눈 오는 날 찾는다’는 뜻으로 소고기 등심을 넓게 길게 저며 썰어서 꼬치에 꿴 뒤 기름장에 양념을 발라 구운 것이다. 설하멱이 처음 등장한 시기는 몽고의 침입이 있던 고려시대 중기 무렵이다. 고려 전기에는 불교의 영향으로 육식을 금하였으나 몽고의 지배에 들어가면서 맥적(貊炙)이 부활했고, 몽고인과 이슬람교도가 많이 살던 개성에서는 ‘설하멱’이란 명칭으로 등심구이를 먹게 됐고 이것이 오늘날의 불고기의 원형이 됐다.(두산백과)
설하멱 등 옛 소고기구이, 즉 불고기라고 할 이 요리법 중에는 아주 흥미로운 기술도 있다. 고기를 구울 때 어느 정도 불에 지진 뒤 얼음과 같이 차가운 냉수에 넣어 식혀 다시 굽기를 반복한다는 대목이다. 도대체 왜 구운 고기를 물에 넣어서 식혔다가 다시 구웠을까? 이는 요리 과학적으로 아주 훌륭한 방법이다. 왜냐하면 불판의 온도를 잘 조절할 수 없고 양념을 묻힌 고기이므로 겉만 타고 속은 익지 않는다. 이때 찬물에 넣어 고기 온도를 떨어뜨린 후 다시 구우면 속까지 천천히 잘 익고, 질긴 고기도 부드러워질 확률이 높다. 질긴 고기를 천천히 잘 굽자면 이런 방법을 현대에서도 쓸 수 있다. 너비아니는 아마도 이런 전통에서 조선시대의 주력이 된 소고기구이의 이름이다. 너붓하게 썰어 굽는데, 역시 간장과 참기름 등으로 양념해 석쇠나 번철에 구웠다. 이런 소고기구이의 전통이 지금의 불고기가 된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런데 불고기는 서울식이 있고 경남 등지(언양불고기)의 불고기가 따로 있다. 서울식은 기존 석쇠를 쓰는 너비아니 스타일에서 불판이 바뀌고 일제강점기 무렵의 새로운 요리법의 영향으로 설탕과 양파 등을 쓰는 조미기술이 더해졌다고 보면 될 듯하다. 언양불고기 등은 옛 석쇠구이의 전통이 거의 변화 없이 존속하고 있는 것으로 봐도 무방할 듯하다. 불고기, 인류역사상 가장 오래된 육류요리
한일관은 벙거지 불판을 쓰는 대표적인 불고기집인데, 원래는 당연하게도 석쇠를 썼다. 앞서 6·25전쟁 이후의 불고기판 교체설이 아주 명확해진다. 한일관에서만 40여 년 일한 김동월 고문도 비슷한 의견을 내놓고 있다. 한동안 석쇠구이와 현재와 같은 불고기판 구이가 병존하다가 나중에 석쇠구이는 없어졌다고 한다(지금도 당연히 없다).
1923년 스웨덴 지질학자인 안데르손과 오스트리아 고생물학자 츠단스키는 베이징의 저우커우덴에 있는 룽구산에서 흥미로운 화석을 발견한다. 우리가 역사책에서 배운 베이징 원인이다. 이들이 호모 에렉투스다. 불을 써서 요리를 했다고 알려진 인류 방계 조상이다. 나중에 인류 직계 조상인 호모 사피엔스와의 투쟁에서 밀려 사라진 것으로 보이는 족속이다. 이들은 화로를 써서 고기를 구워먹었다. 발굴현장에서 두툼한 재(灰) 층과 불에 탄 동물 뼈가 발견됐다. 말하자면 불고기는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육류요리일 것이다.
우리 민족은 유달리 소고기를 좋아했다. 여러 기록을 보면 조선시대에 ‘금살도감’(소를 죽이지 못하게 감시하는 관청)까지 있었고, 금우령(禁牛令)은 조선시대를 관통하는 행정명령이었다. 그런데도 능력 있는 자들은 어떻게든 소고기를 구해 먹을 정도로 사족을 못 썼다. 소고기가 맛있으니 당연한 일이겠다. 그렇게 임금의 명과 법률을 어기고 공공연히 고기를 구워먹었는데도 크게 처벌하는 경우는 아주 드물었다. 고기 사랑은 나라님도 어쩔 수 없었던 모양이다.
특히 성균관이 생긴 이후에는 공맹 제사와 성균관 유생을 위해서 필요한 소고기를 조달하는 합법적인 조치도 있었다. 성균관 앞에 반촌(고기 잡는 사람들의 집단거주지)을 만들고, 이들이 고기를 잡아서 바치도록 했다. 이것이 나중에 설렁탕을 탄생시키는 배경이 됐다는 가설을 세울 수 있다. 반촌에 사는 반인들이 허가받고 도축해 고기를 납품한 뒤에는 품삯 등으로 부산물과 뼈 등을 받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들이 이것을 조리해 설렁탕으로 추정되는 요리를 팔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 한국요리사를 연구하는 이들의 추정이다.
불고기는 어쨌든 저렴한 부위를 쓸 수 있게 기계적인 진화를 이뤘고, 맛을 쉽게 들일 수 있는 개량 진간장의 공급, 소의 생산 증가 등으로 광범위한 인기를 누리게 됐다. 불고기 한 점을 구울 때 이처럼 우리 민족의 고기구이 역사, 가까이는 근현대사의 살아 있는 증거를 확인하는 작업이 된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일본과 다른 불고기 조리법
어쨌든 그들이 한국에서 받아들인 야키니쿠는 무슨 뜻일까. 문자 그대로 ‘燒肉’이다. 우리말로 바꾸면? 불고기다. 맞다. 고기를 불에 구워먹는다는 아주 단순한 명칭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런 단순함으로 그 요리를 보지 않는다. 불+고기라면 삼겹살도 있고 스테이크도 있다. 불고기를 설명하자면 복잡한 내력과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다. 일본의 야키니쿠는 불고기라고 번역할 수 있지만 문자 그대로 불에 구운 고기란 뜻뿐이다. 우리는? 다음과 같이 정의를 내리곤 한다.
‘고기를 얇게 저며서 간장과 여러 가지 양념에 절인 뒤 석쇠나 전용 용기에 구워 먹는 요리.’
일본 야키니쿠와 결정적인 차이가 바로 ‘얇게 저미고’ ‘전용 용기를 사용한다’는 점이다. 이런 방법은 우리 전래의 아주 오래된 조리법일까. 그 해답은 간단하지 않다.
우리가 먹는 현대의 불고기를 살펴보자. 누런 구리나 황동 등으로 제작한 반원형의 그릇을 숯이나 가스에 얹어 굽는다. 고기는 엷게 저미는데, 육절기를 쓴다. 설탕과 양파, 파, 버섯 등을 첨가한다. 구멍이 뚫린 불판에 고기를 굽다가 국물받이에 육수가 흘러 고이면 밥이나 면을 말아먹는다.
지금과 같은 불고기가 된 것은 1960년대 이후의 모습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1960년대 이전에는 전기로 가동해 고기를 아주 얇게 저미는 육절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 육절기의 등장은 불고기의 모습을 지금과 같이 혁명적으로 바꾸었다. 첫째, 원래 불고기는 등심 등을 썼는데 육절기를 쓸 수 있게 되면서 다릿살 등 저렴한 부위도 요리할 수 있게 됐다. 둘째, 일본의 영향으로 설탕을 넣게 되면서 얇게 썬 고기의 연육이 잘 이뤄져서 가격이 싼 부위도 부드럽게 먹을 수 있게 됐다.
그런데 흥미로운 얘기가 있다. 이런 불고기 전용 불판, 즉 노란색의 구멍이 뚫리고 국물받이가 있는 형태가 6·25전쟁 이후에 탄생했다는 주장이다. 서울 출신으로 언론인이자 음식평론가인 조풍연 선생은 ‘미군 드럼통 원조’론을 제기한다. 또 아동문학가이자 미식가인 마해송 선생도 비슷한 생각을 글로 쓰고 있다. 즉 석쇠를 주로 쓰다가 6·25 이후에 미군 드럼통이 시중에 돌면서 현재와 같은 불고기판이 나왔다는 것이다. 이런 불판은 생각지 못한 쓸모가 있었다. 못으로 드럼통에 구멍을 뚫으면 고기가 그 튀어나온 못 자국에 걸려서 둥글게 만든 불판에 놓아도 불판 밑으로 흘러내려가지 않는다. 또 그 구멍으로 불꽃이 직접 고기에 닿으므로 직화 효과를 낼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판의 밑을 접어올리면 국물받이가 돼 아까운 육수를 흘리지 않고 다 먹을 수 있게 됐다.
몽골인이 즐겨 먹던 ‘설하멱’이 원조 자, 그림 한 장을 보자. 19세기 화가 성협의 그림 ‘야연’이다. 노소가 어울려 고기를 굽고 술을 마신다. 불판을 잘 보라. 이글거리는 숯불 위에 불판이 놓여 있다. 이것이 전립투라고 부르는 벙거지불판이다. 가운데 아마도 기름과 간장, 육수 등을 부어 놓았고, 가장자리에 고기를 굽고 있다. 고기를 가운데 양념장에 담근 뒤 구웠을 수도 있고, 구운 후 양념장에 찍어서 먹었을 수도 있다. 이 시기의 책인 《동국세시기》(1849)에도 “화로에 숯불을 일으켜 석쇠를 올린다. 소고기에 참기름, 간장, 계란, 파, 고춧가루 등을 첨가하여 굽는다”고 설명하고 있다. 성협의 그림과 맞아떨어지는 설명이며, 당대 불고기와도 흡사하다.
불고기의 원류로 두 가지 이름이 거론된다. 설하멱과 너비아니다. 설하멱은 아주 흥미로운 이름이다.
설하멱(雪下覓)은 ‘눈 오는 날 찾는다’는 뜻으로 소고기 등심을 넓게 길게 저며 썰어서 꼬치에 꿴 뒤 기름장에 양념을 발라 구운 것이다. 설하멱이 처음 등장한 시기는 몽고의 침입이 있던 고려시대 중기 무렵이다. 고려 전기에는 불교의 영향으로 육식을 금하였으나 몽고의 지배에 들어가면서 맥적(貊炙)이 부활했고, 몽고인과 이슬람교도가 많이 살던 개성에서는 ‘설하멱’이란 명칭으로 등심구이를 먹게 됐고 이것이 오늘날의 불고기의 원형이 됐다.(두산백과)
설하멱 등 옛 소고기구이, 즉 불고기라고 할 이 요리법 중에는 아주 흥미로운 기술도 있다. 고기를 구울 때 어느 정도 불에 지진 뒤 얼음과 같이 차가운 냉수에 넣어 식혀 다시 굽기를 반복한다는 대목이다. 도대체 왜 구운 고기를 물에 넣어서 식혔다가 다시 구웠을까? 이는 요리 과학적으로 아주 훌륭한 방법이다. 왜냐하면 불판의 온도를 잘 조절할 수 없고 양념을 묻힌 고기이므로 겉만 타고 속은 익지 않는다. 이때 찬물에 넣어 고기 온도를 떨어뜨린 후 다시 구우면 속까지 천천히 잘 익고, 질긴 고기도 부드러워질 확률이 높다. 질긴 고기를 천천히 잘 굽자면 이런 방법을 현대에서도 쓸 수 있다. 너비아니는 아마도 이런 전통에서 조선시대의 주력이 된 소고기구이의 이름이다. 너붓하게 썰어 굽는데, 역시 간장과 참기름 등으로 양념해 석쇠나 번철에 구웠다. 이런 소고기구이의 전통이 지금의 불고기가 된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런데 불고기는 서울식이 있고 경남 등지(언양불고기)의 불고기가 따로 있다. 서울식은 기존 석쇠를 쓰는 너비아니 스타일에서 불판이 바뀌고 일제강점기 무렵의 새로운 요리법의 영향으로 설탕과 양파 등을 쓰는 조미기술이 더해졌다고 보면 될 듯하다. 언양불고기 등은 옛 석쇠구이의 전통이 거의 변화 없이 존속하고 있는 것으로 봐도 무방할 듯하다. 불고기, 인류역사상 가장 오래된 육류요리
한일관은 벙거지 불판을 쓰는 대표적인 불고기집인데, 원래는 당연하게도 석쇠를 썼다. 앞서 6·25전쟁 이후의 불고기판 교체설이 아주 명확해진다. 한일관에서만 40여 년 일한 김동월 고문도 비슷한 의견을 내놓고 있다. 한동안 석쇠구이와 현재와 같은 불고기판 구이가 병존하다가 나중에 석쇠구이는 없어졌다고 한다(지금도 당연히 없다).
1923년 스웨덴 지질학자인 안데르손과 오스트리아 고생물학자 츠단스키는 베이징의 저우커우덴에 있는 룽구산에서 흥미로운 화석을 발견한다. 우리가 역사책에서 배운 베이징 원인이다. 이들이 호모 에렉투스다. 불을 써서 요리를 했다고 알려진 인류 방계 조상이다. 나중에 인류 직계 조상인 호모 사피엔스와의 투쟁에서 밀려 사라진 것으로 보이는 족속이다. 이들은 화로를 써서 고기를 구워먹었다. 발굴현장에서 두툼한 재(灰) 층과 불에 탄 동물 뼈가 발견됐다. 말하자면 불고기는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육류요리일 것이다.
우리 민족은 유달리 소고기를 좋아했다. 여러 기록을 보면 조선시대에 ‘금살도감’(소를 죽이지 못하게 감시하는 관청)까지 있었고, 금우령(禁牛令)은 조선시대를 관통하는 행정명령이었다. 그런데도 능력 있는 자들은 어떻게든 소고기를 구해 먹을 정도로 사족을 못 썼다. 소고기가 맛있으니 당연한 일이겠다. 그렇게 임금의 명과 법률을 어기고 공공연히 고기를 구워먹었는데도 크게 처벌하는 경우는 아주 드물었다. 고기 사랑은 나라님도 어쩔 수 없었던 모양이다.
특히 성균관이 생긴 이후에는 공맹 제사와 성균관 유생을 위해서 필요한 소고기를 조달하는 합법적인 조치도 있었다. 성균관 앞에 반촌(고기 잡는 사람들의 집단거주지)을 만들고, 이들이 고기를 잡아서 바치도록 했다. 이것이 나중에 설렁탕을 탄생시키는 배경이 됐다는 가설을 세울 수 있다. 반촌에 사는 반인들이 허가받고 도축해 고기를 납품한 뒤에는 품삯 등으로 부산물과 뼈 등을 받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들이 이것을 조리해 설렁탕으로 추정되는 요리를 팔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 한국요리사를 연구하는 이들의 추정이다.
불고기는 어쨌든 저렴한 부위를 쓸 수 있게 기계적인 진화를 이뤘고, 맛을 쉽게 들일 수 있는 개량 진간장의 공급, 소의 생산 증가 등으로 광범위한 인기를 누리게 됐다. 불고기 한 점을 구울 때 이처럼 우리 민족의 고기구이 역사, 가까이는 근현대사의 살아 있는 증거를 확인하는 작업이 된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