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철수, 대선 110일만에 첫 선출직 당대표로 재기 모색
대선 패배·제보조작 사태 '책임론' 딛고 당 대표로 선출

'5·9 대선' 패배와 연이은 '제보조작' 사건 파문으로 수세에 몰린 국민의당 안철수 전 대표가 27일 신임 당 대표로 정치권의 전면에 다시 등장하며 재기 모색에 나섰다.

작년 6월 당 대표직에서 물러난 지 1년 2개월, 5·9 대선에서 패배한 지 110일 만이다.

새정치민주연합과 국민의당 공동대표 경험까지 합치면 세 번째 당 대표를 맡는 셈이지만 선출직으로는 처음이다.

정치인은 안 대표가 도전한 네 번째 직업이다.

의사에서 '벤처신화'의 주인공으로, 그리고 유학길을 거쳐 교육자로 변신했다가 뒤늦게 정치에 투신했다.

안 대표는 1980년 부산고를 졸업해 서울대 의학과에 진학했다.

의학실험 중 사용하던 컴퓨터가 바이러스에 감염되자 직접 백신 프로그램을 만들어 무료로 배포했으며, 이를 계기로 해군 군의관 복무를 마친 뒤 1995년 안철수연구소를 창업했다.

서울대 의대 조교수직 제안을 마다하고 벤처 사업가로 나선 것이다.

'벤처 신화'를 일군 뒤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와튼스쿨에서 경영학석사(MBA)를 받았고 카이스트 교수와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을 역임했다.

안 대표는 2009년 MBC '무릎팍 도사'에 출연하며 사회적으로 주목을 받았다.

2011년에는 전국 25개 도시를 순회하는 '청춘콘서트'를 진행하며 젊은이들의 멘토로 떠올랐다.

특히 같은 해 9월 서울시장 재보선 과정에서 당시 박원순 변호사에게 후보 자리를 전격 양보하면서 여론의 집중조명을 받았다.

협상이나 조건 없이 이뤄진 당시 결정이 신선한 충격을 던지며 '안철수 신드롬'이 일어났고, 안 대표는 장고 끝에 2012년 대선 출마를 선언하고 '새 정치'를 트레이드 마크로 내세웠다.

그러나 당시 문재인 후보와의 단일화 논의가 시작되자 고공행진을 이어가던 안 대표의 지지율도 꺾이기 시작했다.

문 후보와의 신경전이 극단으로 치닫는 끝에 안 대표는 대선 후보직을 내려놨다.

그는 "솔로몬의 재판에 선 어머니 같은 심정으로 양보한 것"이라고 회고했다.

이후 정치 일선에서 물러선 듯했던 그는 2013년 4월 서울 노원병 보궐선거로 여의도에 입성했다.

2014년 초 새정치연합을 창당했지만, 세(勢) 부족이라는 벽에 부딪히자 3월 민주당과 합당해 새정치민주연합을 출범시켰다.

이후 안 대표는 김한길 의원과 함께 공동대표를 맡으며 당내 개혁을 요구했으나, 같은 해 7·30 재보선에서 패배하자 책임을 지고 대표직을 사퇴했다.

안 대표는 당이 문재인 대표 체제로 전환되자 반문(반문재인) 진영에 서서 혁신을 촉구하다 2015년 말 탈당해 국민의당을 창당했다.

안 대표는 작년 4·13 총선에서 더불어민주당과 후보단일화를 해야 한다는 당 안팎의 요구에도 독자노선을 고수한 결과 의석수 38석과 정당득표율 2위(26.74%)로 3당 체제를 구현했다.

그러나 안 대표는 총선 당시 '홍보비 리베이트 파동'이 불거지자 책임을 지고 대표직을 내려놨다.

올해 초 탄핵 정국에서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의 등장으로 연대론 요구에 직면했으나 '자강론'으로 돌파하며 국민의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압승했다.

또 '안풍'을 일으키며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후보와의 양강구도를 형성하기도 했지만 네거티브 공방전과 TV토론 등을 거치며 내리막길을 걸었고, 결국 자유한국당 홍준표 후보에게도 뒤진 3위로 대선을 마감했다.

선거 과정에서 문 대통령 아들 준용씨에 대한 취업의혹 제보조작 사건이 터지자 안 대표를 향한 '책임론'이 제기되며 정치적 위기에 몰리기도 했지만, 당 살리기를 명분으로 다시 당권을 잡았다.

부인 김미경 서울대 교수와 1녀.
▲ 부산(55) ▲ 부산고 ▲ 서울대 의학과 ▲ 펜실베이니아대 공과대학원·와튼스쿨 경영대 ▲ 안철수연구소 대표 ▲ KAIST 기술경영전문대학원 석좌교수 ▲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 ▲ 18대 대선 무소속 후보 ▲ 19대·20대 국회의원 ▲ 새정치민주연합 공동대표 ▲ 국민의당 상임공동대표 ▲ 국민의당 제19대 대통령후보


(서울연합뉴스) 김동호 기자 dk@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