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럽을 무대로 활동하다 중견이 돼 한국으로 돌아온 김씨가 지난 30일 서울 사간동 현대화랑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한국에서는 두 번째 개인전이다. 한지를 다양하게 수용하며 한국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다는 뜻에서 전시 제목을 ‘종이, 먹 그을음-그 후’로 붙였다.
전통 한지에 색채 드리핑을 한 작품부터 촛불이나 향불로 태운 뒤 찢거나 오려 배접한 작품까지 최근 10년간 작업한 회화 30여 점이 걸렸다. 한지를 즐겨 활용한 그의 작품에는 빛과 색의 멋, 무념무상, 연기(緣起) 같은 동양적 가치가 담겨 있다. 그의 작품이 조용히 참선 수행하는 선방을 연상시키는 이유다. 태운 한지 조각 수천 개를 겹겹이 붙여 만든 작품, 붓으로 큰 획을 그은 다음 필선을 따라 한지를 태워 나간 작품이 더욱 그렇다. 작가는 수백, 수천 장 한지를 초나 향에 그을리는 것을 반복하는 일을 일종의 명상으로 여긴다고 했다.
“종이를 태울 때 집중하지 못하면 몽땅 타버립니다. 그래서 선방의 스님처럼 잡념을 없애야 하죠. 불 자체도 바라보고 있으면 느낌이 너무 좋아요.”
작가는 불에 한 장 한 장 그을린 한지 조각을 이어붙여 만든 작품(‘The Street’)에 더욱 애착이 간다고 했다. 그는 “유난히 속이 시끄럽던 어느 날 서재에서 책들이 마구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가 났는데 이를 형상화한 것”이라며 “손가락 길이의 한지 조각 하나가 책 한 권”이라고 설명했다. 가장자리를 태워 일일이 수많은 원형을 돌려붙여 만든 작품에서는 물결치는 듯한 파동과 에너지가 느껴지며 단색화라는 단어가 자연히 떠오른다.
그는 한지를 통해 채움과 비움의 순환적 관계, 음과 양의 양면성을 화면에 담아내려 노력한다고 했다. 한지 자체만으로도 아름답고 완벽한 예술인데 그 위에 반복적 행위 미학을 곁들여 동양적 가치를 리뉴얼하겠다는 얘기다. 서양의 미학자와 미술사가들이 그의 그림에 주목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는 2012년 이탈리아 로마 마르코현대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연 데 이어 작년에는 베니스비엔날레 기간 카보토궁에서 열린 부대전시 ‘빛, 그림자, 깊이’전에 초대돼 국제 미술계의 찬사를 받았다. 내년 1~3월에는 영국의 최대 메이저 화랑 ‘화이트큐브’에서 개인전을 열 예정이다. 전시는 10월8일까지.(02)2287-3591
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