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툰·TV채널 속으로… '소소한 페미니즘'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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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경 기자의 컬처 insight
“그래도 여기 남은 거 먹어라. 아깝잖아. 너랑 나랑 한 개씩 먹어치우자.”
시어머니의 생일날, 며느리 민사린은 후식으로 과일을 내온다. 시어머니는 과일을 먹기 위해 밥그릇들을 치워달라고 한다. 사린은 그릇을 정리하고 돌아온다. 과일은 시댁 식구들이 이미 거의 다 먹고 없다. 사과 몇 쪽이 남았을 뿐이다. 시어머니는 버리기 아깝다고 한다.
최근 온라인에서 큰 인기를 얻고 있는 웹툰 ‘며느라기’의 한 장면이다. 특별한 갈등도 없고 나쁜 캐릭터도 없다. 그저 평범한 한 가정의 얘기다. 새로 지은 밥은 남자들을 주고 자신과 며느리에겐 어제 지은 묵은 밥을 먹자고 하는 시어머니, 자신의 할아버지 제사에 아내를 보내면서 “일 끝나고 가서 도와주겠다”며 시혜를 베풀듯 말하는 남편이 등장하는 정도다. 하지만 여기서 사람들은 무섭도록 견고하게 자리하고 있는 여성에 대한 편견과 차별을 발견하게 된다. 이 웹툰을 캡처한 장면들이 20~30대 여성들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에서 빠르게 번져나가고 있는 이유다. 그들은 말한다. “우리 얘기”라고.
거대 담론처럼 여겨졌던 페미니즘이 대중의 일상에 파고들고 있다. 평범해 보이는 얘기들로 막강한 파급력을 만들어내는 ‘소소한 페미니즘’이 탄생한 것이다. 소설 ‘82년생 김지영’에서 시작된 이 열풍은 웹툰 ‘며느라기’, 예능 ‘뜨거운 사이다’ 등 다양한 영역으로 퍼져나가고 있다. 일부 여성의 전유물처럼 여겨졌던 페미니즘은 이제 문화계의 한 중심축을 이루며 대중에게 널리 확산되고 있다.
오랜 시간 형성된 인식과 관습은 매우 정교한 형태로 고착화돼 있다. 지난해 10월 발간된 조남주 작가의 ‘82년생 김지영’은 여기에 조금씩 균열을 낸다. “그때는 몰랐다. 왜 남학생부터 번호를 매기는지. 남자가 1번이고, 남자가 시작인 것이 그냥 당연하고 자연스러웠다.” 이 책도 대부분 페미니즘 책이 그렇듯, 처음엔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굳이 들춰내지 않던 모순적 인식들이 하나의 작품에 집약돼 나타나자 큰 파문이 일어났다. 수많은 문제의 총합은 크나큰 생각의 오류에서 비롯된 것임을 자각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이 책은 27만 부가 팔려나가며 베스트셀러가 됐다.
스토리의 힘도 작용했다. 어떤 구호보다 스토리는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 사회 문제를 자연스럽게 풀어내면서 큰 공감을 이끌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82년생 김지영’ ‘며느라기’ 모두 일상의 얘기에 스토리가 덧대어지면서 대중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다. 여성들이 지인들과 이를 망설임 없이 공유하며 확산시킬 수 있었던 것도 재밌고 쉽게 와닿기 때문이다.
이런 열풍을 반영하듯 CJ E&M의 채널 ‘온스타일’은 아예 채널의 콘셉트 자체를 바꿨다. 뷰티 프로그램만이 아니라 여성들이 편견에서 자유롭고 당당하게 살 수 있도록 돕는 프로그램을 만들기로 한 것이다. 지난달 잇따라 선보인 예능 ‘뜨거운 사이다’ ‘바디 액츄얼리’는 큰 화제가 되고 있다. 남성 연예인들과 지식인들이 나와서 얘기하던 사회 문제도 여기선 여성들이 말한다. ‘뜨거운 사이다’에선 생리대 논란을 다루며 생리에 대한 잘못된 인식까지 꼬집었다. “예전엔 생리대를 사면 ‘신문지에 싸드릴까요’라고 묻기까지 했다. 요즘에도 검은 봉투에 넣어준다.”
프랑스 출신의 미술가 루이스 부르주아는 1945~1947년 ‘집=여인’ 시리즈를 그렸다. 여인의 얼굴은 집으로 대체하고 팔다리만 그려놓은 작품이다. 여성에 대한 차별이 가장 일상적이고 가까운 공간에서 시작되고 있다는 의미다. 그는 1997년 미국의 미술전문월간지 ‘아트뉴스’가 선정한 ‘세계 미술가 중 2022년까지 기억될 작가’에서 1위를 차지했다. 두 가지 의미가 아닐까 싶다. 2022년까지도 이 현상은 유지되고 있을 것이란 것이 하나다. 다른 한편으론 ‘집=여인’의 굴레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적극적인 움직임으로 그가 다시 회자될 것이란 것도 은유했다고 볼 수 있다. 이미 그 변화는 유교 전통이 뿌리 깊게 남아 있는 한국에서도 시작되고 있는지 모른다.
김희경 기자 hkkim@hankyung.com
시어머니의 생일날, 며느리 민사린은 후식으로 과일을 내온다. 시어머니는 과일을 먹기 위해 밥그릇들을 치워달라고 한다. 사린은 그릇을 정리하고 돌아온다. 과일은 시댁 식구들이 이미 거의 다 먹고 없다. 사과 몇 쪽이 남았을 뿐이다. 시어머니는 버리기 아깝다고 한다.
최근 온라인에서 큰 인기를 얻고 있는 웹툰 ‘며느라기’의 한 장면이다. 특별한 갈등도 없고 나쁜 캐릭터도 없다. 그저 평범한 한 가정의 얘기다. 새로 지은 밥은 남자들을 주고 자신과 며느리에겐 어제 지은 묵은 밥을 먹자고 하는 시어머니, 자신의 할아버지 제사에 아내를 보내면서 “일 끝나고 가서 도와주겠다”며 시혜를 베풀듯 말하는 남편이 등장하는 정도다. 하지만 여기서 사람들은 무섭도록 견고하게 자리하고 있는 여성에 대한 편견과 차별을 발견하게 된다. 이 웹툰을 캡처한 장면들이 20~30대 여성들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에서 빠르게 번져나가고 있는 이유다. 그들은 말한다. “우리 얘기”라고.
거대 담론처럼 여겨졌던 페미니즘이 대중의 일상에 파고들고 있다. 평범해 보이는 얘기들로 막강한 파급력을 만들어내는 ‘소소한 페미니즘’이 탄생한 것이다. 소설 ‘82년생 김지영’에서 시작된 이 열풍은 웹툰 ‘며느라기’, 예능 ‘뜨거운 사이다’ 등 다양한 영역으로 퍼져나가고 있다. 일부 여성의 전유물처럼 여겨졌던 페미니즘은 이제 문화계의 한 중심축을 이루며 대중에게 널리 확산되고 있다.
오랜 시간 형성된 인식과 관습은 매우 정교한 형태로 고착화돼 있다. 지난해 10월 발간된 조남주 작가의 ‘82년생 김지영’은 여기에 조금씩 균열을 낸다. “그때는 몰랐다. 왜 남학생부터 번호를 매기는지. 남자가 1번이고, 남자가 시작인 것이 그냥 당연하고 자연스러웠다.” 이 책도 대부분 페미니즘 책이 그렇듯, 처음엔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굳이 들춰내지 않던 모순적 인식들이 하나의 작품에 집약돼 나타나자 큰 파문이 일어났다. 수많은 문제의 총합은 크나큰 생각의 오류에서 비롯된 것임을 자각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이 책은 27만 부가 팔려나가며 베스트셀러가 됐다.
스토리의 힘도 작용했다. 어떤 구호보다 스토리는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 사회 문제를 자연스럽게 풀어내면서 큰 공감을 이끌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82년생 김지영’ ‘며느라기’ 모두 일상의 얘기에 스토리가 덧대어지면서 대중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다. 여성들이 지인들과 이를 망설임 없이 공유하며 확산시킬 수 있었던 것도 재밌고 쉽게 와닿기 때문이다.
이런 열풍을 반영하듯 CJ E&M의 채널 ‘온스타일’은 아예 채널의 콘셉트 자체를 바꿨다. 뷰티 프로그램만이 아니라 여성들이 편견에서 자유롭고 당당하게 살 수 있도록 돕는 프로그램을 만들기로 한 것이다. 지난달 잇따라 선보인 예능 ‘뜨거운 사이다’ ‘바디 액츄얼리’는 큰 화제가 되고 있다. 남성 연예인들과 지식인들이 나와서 얘기하던 사회 문제도 여기선 여성들이 말한다. ‘뜨거운 사이다’에선 생리대 논란을 다루며 생리에 대한 잘못된 인식까지 꼬집었다. “예전엔 생리대를 사면 ‘신문지에 싸드릴까요’라고 묻기까지 했다. 요즘에도 검은 봉투에 넣어준다.”
프랑스 출신의 미술가 루이스 부르주아는 1945~1947년 ‘집=여인’ 시리즈를 그렸다. 여인의 얼굴은 집으로 대체하고 팔다리만 그려놓은 작품이다. 여성에 대한 차별이 가장 일상적이고 가까운 공간에서 시작되고 있다는 의미다. 그는 1997년 미국의 미술전문월간지 ‘아트뉴스’가 선정한 ‘세계 미술가 중 2022년까지 기억될 작가’에서 1위를 차지했다. 두 가지 의미가 아닐까 싶다. 2022년까지도 이 현상은 유지되고 있을 것이란 것이 하나다. 다른 한편으론 ‘집=여인’의 굴레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적극적인 움직임으로 그가 다시 회자될 것이란 것도 은유했다고 볼 수 있다. 이미 그 변화는 유교 전통이 뿌리 깊게 남아 있는 한국에서도 시작되고 있는지 모른다.
김희경 기자 hk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