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퇴근 훈련… 삼성전자에 불이 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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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더십 공백 와중에 근로시간 단축 선제 대비
연구원들 "이러다 어쩌려고"
"부장님, 우리 정말 이래도 되는 겁니까"
칼퇴근하는 삼성맨의 걱정
인텔·애플 밤새 불 밝히는데…삼성은'주 52시간 훈련'
R&D 부서도 연장근로 12시간 차면 "업무 넘겨라"
폭염에 에어컨 주문 밀려도 "과거방식의 잔업 불가"
생산직종선 '근로시간 감소'로 급여 줄어들어 불만
연구원들 "이러다 어쩌려고"
"부장님, 우리 정말 이래도 되는 겁니까"
칼퇴근하는 삼성맨의 걱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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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D 부서도 연장근로 12시간 차면 "업무 넘겨라"
폭염에 에어컨 주문 밀려도 "과거방식의 잔업 불가"
생산직종선 '근로시간 감소'로 급여 줄어들어 불만
삼성전자 무선사업부에서 해외 마케팅을 담당하는 입사 6년차 P대리. 그는 요즘 자신의 야근시간을 배분하는 데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다. 회사에서 올 하반기부터 주(週) 근로시간을 16시간이나 싹둑 잘랐기 때문이다. 주로 야간에 해외 거래처와 접촉해야 하는 그로선 이만저만 불편한 것이 아니다. 출근시간이 오후 1시까지 허용돼 있는 유연근무제 덕분에 밤 시간을 충분히 활용할 여지가 있긴 하지만 임원 보고와 외부 회의 등의 일정 때문에 아침 일찍 출근해야 하는 경우도 많다. “월요일이나 화요일에 근무시간을 집중적으로 썼다가 금요일 이후에 일이 터지면 큰 낭패를 봅니다. 그래도 출근할 수가 없어요. 그게 회사 방침입니다.”
5일 삼성에 따르면 삼성전자를 비롯한 대부분 계열사가 최근 직원들의 주당 근로시간 상한선을 종전 68시간에서 52시간으로 대폭 단축한 것으로 확인됐다. 정부가 근로기준법상 주 최대 법정근로시간을 68시간(주중 40시간+주중 연장근로 12시간+주말 근로 16시간)에서 52시간(주중 40시간+연장근로 12시간)으로 줄이는 정책을 추진하고 있는 데 따른 선제 조치다. 삼성전자 인사팀 관계자는 “20만 명에 가까운 그룹 임직원의 근무시스템을 하루아침에 바꿀 수는 없는 것 아니냐”며 “올가을 관련 법안이 정기국회를 통과할 것으로 보고 미리 근로시간을 줄인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삼성 계열사 인사팀은 뜻밖의 반발(?)에 맞닥뜨리고 있다. 근무시간이 줄어서 좋다는 직원도 많지만 연구원 엔지니어 디자이너 마케터 등 특정 시기에 집중적으로 업무를 해야 하는 직무 종사자들은 P대리처럼 갑작스러운 근무조건 변화에 불만을 나타내는 경우도 적지 않다.
실제 업무에 차질이 빚어지는 사례들도 나타나고 있다. 폭염이 기승을 부린 올여름 최대 성수기를 맞은 에어컨 사업부의 엔지니어들이 대표적이다. “밀려드는 주문과 ‘칼퇴근 압력’ 사이에서 당혹스러운 적이 많았어요. 근로시간 규제를 성수기와 비수기를 가리지 않고 획일적으로 적용하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L과장)
어려움을 가장 많이 호소하는 곳은 연구개발(R&D) 관련 부서다. 한정된 시간에 개발 목표 등을 달성하려면 시간이든 인력이든 고도의 집중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해당 부서장들은 연구원이 주당 연장 근로시간 12시간을 넘기면 하던 일을 중단시키고 다른 사람에게 업무를 넘긴다. 과제에 대한 이해도가 사람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보니 효율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래도 인사팀은 요지부동이다. 예외를 두기 시작하면 다른 사업부도 달려들 게 뻔하다는 이유에서다. 이 같은 상황에 대해 삼성전자 수원사업장의 한 R&D 부서장은 이렇게 말했다. “어느날 한 직원이 퇴근가방을 챙기면서 이렇게 말하더군요. ‘부장님, 우리 이렇게 해도 되는 겁니까?’ 갑자기 등골이 서늘해졌습니다.”
디자인 소프트웨어 등 이른바 ‘소프트 파워’ 쪽 업무를 하는 직원들도 비슷한 정서를 갖고 있다. 스마트폰 사업부의 한 디자이너는 “개인별로 축적된 경험과 지식이 다르고 같은 시간을 일해도 성과가 천양지차인 것이 디자인의 세계”라며 “출중한 인재 한 사람이 집중적으로 일할 수 있어야 하는데 걱정”이라고 말했다.
생산직종에서는 ‘생계형 특근’ 줄이기로 논란이 일고 있다. 일부 계열사는 근무시간에 비례해 급여가 올라가는 생산직 특성상 자발적으로 연장 근로를 하겠다는 근로자가 많지만 부서장들이 이를 막고 있다. 부서장들도 어쩔 수 없다. 인사팀이 직원별 주간 누적 근로시간 통계를 내 매주 금요일 오후에 통보하고 지침을 어긴 경우에는 경고까지 곁들이기 때문이다. 근로시간 감소로 급여가 5~10%가량 줄어들게 된 생산직 근로자의 불만이 커져도 어쩔 도리가 없다.
삼성전자 안팎에서는 이재용 부회장 구속으로 구심점이 사라진 상황에서 갑작스러운 근로시간 단축으로 경쟁력이 약해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를 내놓고 있다. 반도체 부문의 한 수석급 엔지니어는 “세계 최대 제조업체로 우뚝선 삼성전자 경쟁력의 양대 축은 빠르고 정확한 의사결정과 뛰어난 생산성이었다”며 “지금 이 두 개의 축이 다 흔들리고 있어 직원들이 우려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 부회장 부재에 관해선 지난 1일 독일 베를린에서 한국 기자들을 만난 윤부근 삼성전자 소비자가전 대표도 “너무 두렵고 참담하다”고 우려한 바 있다.
삼성전자와 세계 시장을 놓고 다투는 미국 인텔의 연봉 10만달러 이상 직원에게는 근로시간 제한이 없다. 미국이 사무직 고액 연봉자에게는 근로시간 제한을 두지 않는 ‘화이트칼라 이그젬프션(white collar exemption)’ 제도를 운영하고 있어서다. 독일은 전문직 재량근로제, 일본은 기획업무형 재량근로제 등을 통해 R&D 종사자들의 자유로운 근무를 보장하고 있다.
미국 언론인 마이클 말론은 “인텔의 반도체 엔지니어들에게 토·일요일 출근은 일상”이라고 했다. 애플도 마찬가지다. 여름에 한 달 가까이 휴가를 갈 때도 있지만 엔지니어나 연구원들이 평소 근무할 때는 근로시간 제한을 거의 받지 않는다.
애플이 스마트폰 수익성에서 삼성전자를 압도하는 이유에 대해 “삼성전자 직원들은 밤 11시, 애플 직원들은 밤 12시에 퇴근하기 때문”이라는 얘기가 과거 공공연하게 나돌았을 정도다. 해외 기업의 유연근로제와 관련해선 지난해 한국경영자총협회가 정부에 비슷한 제도 도입을 건의했지만 아무런 답변을 듣지 못했다.
수원=노경목/박재원/강현우 기자 autonomy@hankyung.com
5일 삼성에 따르면 삼성전자를 비롯한 대부분 계열사가 최근 직원들의 주당 근로시간 상한선을 종전 68시간에서 52시간으로 대폭 단축한 것으로 확인됐다. 정부가 근로기준법상 주 최대 법정근로시간을 68시간(주중 40시간+주중 연장근로 12시간+주말 근로 16시간)에서 52시간(주중 40시간+연장근로 12시간)으로 줄이는 정책을 추진하고 있는 데 따른 선제 조치다. 삼성전자 인사팀 관계자는 “20만 명에 가까운 그룹 임직원의 근무시스템을 하루아침에 바꿀 수는 없는 것 아니냐”며 “올가을 관련 법안이 정기국회를 통과할 것으로 보고 미리 근로시간을 줄인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삼성 계열사 인사팀은 뜻밖의 반발(?)에 맞닥뜨리고 있다. 근무시간이 줄어서 좋다는 직원도 많지만 연구원 엔지니어 디자이너 마케터 등 특정 시기에 집중적으로 업무를 해야 하는 직무 종사자들은 P대리처럼 갑작스러운 근무조건 변화에 불만을 나타내는 경우도 적지 않다.
실제 업무에 차질이 빚어지는 사례들도 나타나고 있다. 폭염이 기승을 부린 올여름 최대 성수기를 맞은 에어컨 사업부의 엔지니어들이 대표적이다. “밀려드는 주문과 ‘칼퇴근 압력’ 사이에서 당혹스러운 적이 많았어요. 근로시간 규제를 성수기와 비수기를 가리지 않고 획일적으로 적용하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L과장)
어려움을 가장 많이 호소하는 곳은 연구개발(R&D) 관련 부서다. 한정된 시간에 개발 목표 등을 달성하려면 시간이든 인력이든 고도의 집중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해당 부서장들은 연구원이 주당 연장 근로시간 12시간을 넘기면 하던 일을 중단시키고 다른 사람에게 업무를 넘긴다. 과제에 대한 이해도가 사람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보니 효율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래도 인사팀은 요지부동이다. 예외를 두기 시작하면 다른 사업부도 달려들 게 뻔하다는 이유에서다. 이 같은 상황에 대해 삼성전자 수원사업장의 한 R&D 부서장은 이렇게 말했다. “어느날 한 직원이 퇴근가방을 챙기면서 이렇게 말하더군요. ‘부장님, 우리 이렇게 해도 되는 겁니까?’ 갑자기 등골이 서늘해졌습니다.”
디자인 소프트웨어 등 이른바 ‘소프트 파워’ 쪽 업무를 하는 직원들도 비슷한 정서를 갖고 있다. 스마트폰 사업부의 한 디자이너는 “개인별로 축적된 경험과 지식이 다르고 같은 시간을 일해도 성과가 천양지차인 것이 디자인의 세계”라며 “출중한 인재 한 사람이 집중적으로 일할 수 있어야 하는데 걱정”이라고 말했다.
생산직종에서는 ‘생계형 특근’ 줄이기로 논란이 일고 있다. 일부 계열사는 근무시간에 비례해 급여가 올라가는 생산직 특성상 자발적으로 연장 근로를 하겠다는 근로자가 많지만 부서장들이 이를 막고 있다. 부서장들도 어쩔 수 없다. 인사팀이 직원별 주간 누적 근로시간 통계를 내 매주 금요일 오후에 통보하고 지침을 어긴 경우에는 경고까지 곁들이기 때문이다. 근로시간 감소로 급여가 5~10%가량 줄어들게 된 생산직 근로자의 불만이 커져도 어쩔 도리가 없다.
삼성전자 안팎에서는 이재용 부회장 구속으로 구심점이 사라진 상황에서 갑작스러운 근로시간 단축으로 경쟁력이 약해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를 내놓고 있다. 반도체 부문의 한 수석급 엔지니어는 “세계 최대 제조업체로 우뚝선 삼성전자 경쟁력의 양대 축은 빠르고 정확한 의사결정과 뛰어난 생산성이었다”며 “지금 이 두 개의 축이 다 흔들리고 있어 직원들이 우려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 부회장 부재에 관해선 지난 1일 독일 베를린에서 한국 기자들을 만난 윤부근 삼성전자 소비자가전 대표도 “너무 두렵고 참담하다”고 우려한 바 있다.
삼성전자와 세계 시장을 놓고 다투는 미국 인텔의 연봉 10만달러 이상 직원에게는 근로시간 제한이 없다. 미국이 사무직 고액 연봉자에게는 근로시간 제한을 두지 않는 ‘화이트칼라 이그젬프션(white collar exemption)’ 제도를 운영하고 있어서다. 독일은 전문직 재량근로제, 일본은 기획업무형 재량근로제 등을 통해 R&D 종사자들의 자유로운 근무를 보장하고 있다.
미국 언론인 마이클 말론은 “인텔의 반도체 엔지니어들에게 토·일요일 출근은 일상”이라고 했다. 애플도 마찬가지다. 여름에 한 달 가까이 휴가를 갈 때도 있지만 엔지니어나 연구원들이 평소 근무할 때는 근로시간 제한을 거의 받지 않는다.
애플이 스마트폰 수익성에서 삼성전자를 압도하는 이유에 대해 “삼성전자 직원들은 밤 11시, 애플 직원들은 밤 12시에 퇴근하기 때문”이라는 얘기가 과거 공공연하게 나돌았을 정도다. 해외 기업의 유연근로제와 관련해선 지난해 한국경영자총협회가 정부에 비슷한 제도 도입을 건의했지만 아무런 답변을 듣지 못했다.
수원=노경목/박재원/강현우 기자 autonom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