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훈 기자 hkshin@hankyung.com
신경훈 기자 hkshin@hankyung.com
2000년대 초 지지층의 반발을 무릅쓰고 강력한 노동·복지 개혁 정책인 ‘아젠다 2010’을 추진해 오늘날 독일 부흥의 기틀을 다진 게르하르트 슈뢰더 전 독일 총리(사진)는 “개혁을 추진했던 정치인은 (그에 대한 반발로) 선거에서 패할지 모르지만 리더라면 시대의 과제를 피하지 않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의 미래는 독일의 ‘히든 챔피언(강소기업)’처럼 독자적인 연구개발(R&D)과 혁신을 통해 세계적 경쟁력을 갖춘 중소·중견기업을 얼마나 많이 키워낼 수 있느냐에 달렸다”고도 했다. 《게르하르트 슈뢰더 자서전-문명국가로의 귀환》의 한국 번역·출간을 계기로 방한(8~13일) 중인 슈뢰더 전 총리를 10일 숙소인 서울 그랜드하얏트호텔에서 만났다.

▷아젠다 2010 개혁 당시 지지기반인 노조는 물론 소속 정당인 사회민주당(SPD) 내에서 반대가 많았다. 개혁이 성공한 비결은 뭔가.

“개혁 정책을 끊임없이 설득했다는 점이다. 아젠다 2010의 목표는 크게 세 가지였다. 노동시장 유연화를 통해 실직자들이 신속하게 일자리를 갖도록 하는 것, 사회보장 제도를 재정적으로 지속 가능하게 만드는 것, 정부 예산을 미래 경쟁력의 핵심인 R&D와 교육에 더 많이 투자할 수 있도록 여력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문제는 의원들 중에서도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점이다. 노조와 가까운 의원들, 좌파적 성향이 강한 의원들의 반대가 심했다. 우리는 그들을 끊임없이 설득했다. 개혁을 관철할 수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당시 우리 정부의 성패가 달려있었다.”

(2002년 독일의 실업률은 14%에 달했고 경제는 마이너스 성장을 했다. 통일 이후 1800만 명의 동독인이 새로 독일 국민에 포함되면서 과거의 사회보장 정책과 고용정책이 한계에 다다랐다. 이런 상황에서 슈뢰더 정부가 2003년 발표한 아젠다 2010 개혁안에는 해고 요건을 완화하고 실업수당을 받는 기간을 32개월에서 12개월로 축소하는 동시에 사회보장연금을 받는 나이를 65세에서 67세로 높이는 방안 등이 담겼다.)

▷개혁으로 독일 경제는 살아났지만 개혁 추진 당시 치러진 2005년 총선에서 사민당은 정권을 잃었다. 서운한 마음은 없는가.

“그런 마음이 없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그러나 개혁이 반드시 필요하고 정당의 이익보다 국가의 이익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개혁을 멈출 수 없었다. 그 덕분에 ‘유럽의 병자(病者)’ 소리를 듣던 독일이 오늘날 유럽의 최대 경제대국이 됐다. 아젠다 2010만이 그 요인이라고 할 순 없지만 분명 큰 기여를 한 건 사실이다. 지금은 누구나 그걸 인정한다. 개혁을 추진하는 시점과 개혁의 성과가 나는 시점은 차이가 날 수밖에 없고 그 사이 선거가 치러지면 개혁 정책을 밀어붙였던 정치인이 패배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리더라면 시대의 과제를 회피하지 않아야 한다.”

(2005년 총선에서 슈뢰더를 누르고 정권을 잡은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이후 독일 경제가 살아나자 “오늘날 독일이 유럽의 리더로 떠오른 것은 슈뢰더의 용기 있고 과감한 개혁 덕분”이라고 그에게 공을 돌렸다.)

▷한국에선 노동·복지개혁 수단으로 노사정 대타협이 거론된다.

“우리도 동일한 시도를 해봤다. ‘노동을 위한 동맹’이란 기구를 설치해 노·사·정이 머리를 맞댔다. 그런데 노조는 노조대로, 사용자는 사용자대로 정부에 요구만 했다. 결국 타협이 안 됐다. 노·사·정이 합의해서 개혁하는 것이 최선이지만 타협이 불가능할 땐 정부가 행동에 나설 수밖에 없다. 그렇게 하라고 국민들이 선거를 통해 정부를 뽑은 것이다.”

▷한국은 양극화 해소가 최대 숙제 중 하나다.

“사회에서 차이가 없어진다는 건 불가능하다.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 교육의 기회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아이들도 교육의 기회를 균등하게 갖고 기회의 차별을 받지 않도록 해야 한다. 교육 기회에 대한 자유로운 접근이야말로 국가의 미래를 결정하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다. 교육을 통해 양극화 문제를 완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회보장 제도를 통해 병원비를 줄이고, 실업자가 됐을 때 새로운 일자리를 신속하게 얻도록 하고, 최소한의 생계를 유지할 연금을 지급하는 것도 (양극화 해소에) 중요하다.”

▷한국은 1인당 국민소득이 10년 넘게 3만달러를 못 넘으면서 ‘중진국 함정에 빠진 것 아니냐’는 우려가 많다.

“한국을 생각할 때 늘 떠올리는게 중소·중견기업이다. 4차 산업혁명 시대다. 미래에는 큰 기업이 아니라 빠른 기업이 성공할 것이다. 환경과 기술 변화에 재빠르게 대처하는 기업이 성공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의 중소·중견기업은 대기업에 종속돼 경쟁력이 떨어진다. 독일 중소·중견기업들은 독자적인 R&D와 혁신 능력을 통해 세계 시장을 선도하면서 ‘히든 챔피언’으로 불린다. 지금 독일 경제가 탄탄한 건 이런 중소·중견기업이 많기 때문이다. 한국의 미래도 이런 중소·중견기업을 얼마나 키워내느냐에 달렸다.”

▷문재인 정부의 탈원전 정책은 어떻게 보나.

“중요한 건 원전의 대안을 찾는 데 필요한 기간을 얼마로 하느냐에 있다. 독일은 2000년 탈원전을 준비하면서 에너지 기업들과 협상했다. 이후 탈원전 시점을 2035년으로 잡았다. 그런데 2011년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메르켈 총리가 탈원전 시점을 2022년으로 앞당겼다. 그때까지는 시간이 너무 촉박하다는 게 내 생각이다. 산업도, 소비자도 전기가 필요하고 (대안 에너지에 맞는) 전력망도 갖춰야 하기 때문에 탈원전은 충분한 시간을 갖고 추진해야 한다.”

▷북핵 문제가 심각하다. 한국 정부는 대화를 하고 싶어도 북한의 핵 실험과 미사일 발사로 긴장 국면이 이어지고 있다.

“이런 갈등을 해결하려면 미국이 러시아 중국과 협력해야 한다. 미국이 계속해서 러시아를 고립시키려는 시도를 하고 중국에 경제적 압박을 한다면 한반도 갈등의 해결은 어렵다고 본다. 미국 러시아 중국은 협력 파트너가 돼야지 적이 돼선 안 된다.”

▷한국은 어떻게 해야 한다고 보나.

“한국은 ‘햇볕정책’을 추진했고 그 핵심이 대화라고 알고 있다. 아무리 ‘제 정신이 아닌(crazy) 정부’라 해도 한국은 ‘대화할 자세가 돼 있다’는 시그널(신호)을 주는 게 중요하다. 독일은 과거 (동독과) 대결 국면에서도 긴장 완화 기조를 유지했고 인도주의적 지원을 계속했다. 지금 한반도 상황에서 대놓고 ‘대화하자’고 할 순 없더라도 ‘대화할 수 있다’는 신호를 끊임없이 보내는 것도 중요하다. 압박과 대화 중 무엇이 몇% 더 중요하다고 딱 잘라 말할 순 없다. 그건 외교 프로세스다. 중요한 건 균형을 잘 잡는 것이다.”

▷한국 정치권에선 여야 갈등이 심하다. 협치를 위해서는 여야가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가.

“서로 타협하고 협력하는 것이 중요하다. 독일은 모든 정당이 협치에 나설 준비가 돼 있다. 오랜 연정(聯政)의 전통 때문이다. 한국은 독일과 상황이 다르기 때문에 한국 상황에 맞는 협력 방안을 치열하게 고민할 필요가 있다.”

▷한국은 전통적으로 ‘제왕적 대통령제’가 문제가 됐다.

“한국의 정치 제도를 언급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다만 중요한 건 대통령과 의회, 정부의 균형이다.”

슈뢰더 전 총리는 방한 기간 청와대를 예방할 예정이다. 11일에는 정세균 국회의장과 만나고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다룬 영화 ‘택시운전사’도 관람한다.

■ 슈뢰더 前 독일 총리는…'유럽의 病者' 독일 치유한 개혁가

게르하르트 슈뢰더 전 독일 총리(73)는 독일의 국가 개혁을 이끈 정치인이다. 집권(1998~2005년) 당시 ‘유럽의 병자(病者)’로 불리던 독일을 ‘유럽의 패자(覇者)’로 바꾸는 기틀을 마련했다. 2003년 3월 발표한 ‘아젠다 2010’(하르츠개혁)이 그 중심에 있다. 노동시장 유연화, 사회보장제도 축소, 세율 인하 등 슈뢰더가 속한 사회민주당(SPD)의 전통과는 거리가 먼 정책들이었다.

당장 지지 기반인 노조는 강력 반발했고 사민당 내에서도 불만이 터져나왔다. 결국 2005년 총선에서 슈뢰더는 앙겔라 메르켈이 이끄는 중도우파 기독민주당(CDU)에 패해 총리 자리에서 물러났다. 하지만 신임 메르켈 총리는 사민당과 대연정을 통해 아젠다 2010 개혁을 이어갔고 이후 독일 경제가 부활하면서 슈뢰더는 ‘정파의 이익보다 국가의 이익을 중시하는 정치인’으로 재조명받았다.

슈뢰더는 입지전적 인물이다. 1944년 독일 서부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의 소도시 리페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어려운 집안 형편 때문에 철물점에서 일하며 야간 직업학교를 다녔다. 주경야독으로 괴팅겐대에 입학해 변호사가 됐다. 18세에 사민당 청년 당원으로 정치를 시작했고 1998년 총선 승리 후 녹색당과의 연정으로 총리에 올랐다.

주용석 기자 hoho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