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영권 승계 과정에서 승계자가 이익을 얻었다 하더라도 이사회를 통한 절차적 정당성이 확보됐다면 이를 문제 삼을 수 없다는 취지의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이 이끌었던 경제개혁연대가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이 계열사 주식을 자녀에게 헐값에 팔아 경영권을 승계하게 했다”며 낸 손해배상 소송에서다. 경영권 승계 과정에서 이사회의 재량권을 폭넓게 인정한 판결이다.

◆7년 걸린 경영권 승계 소송 종지부

대법원 3부(주심 김창석 대법관)는 경제개혁연대와 한화 소액주주 2명이 김 회장과 한화그룹 임직원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에서 원고 패소한 원심을 12일 확정했다.

경제개혁연대 등은 2005년 한화 이사회가 (주)한화가 보유하던 계열사(한화S&C) 주식 40만 주를 김 회장의 장남 동관씨에게 전량 매각하자 “계열사 주식을 장남에게 저가로 넘겨 회사에 손해를 끼쳤다”며 손해배상 소송을 냈다. 당시 한화S&C의 주식 평가액과 실거래 차액인 894억원을 (주)한화에 지급하라는 요구다. 앞서 김 회장과 남모 대표 등은 이 사건과 관련해 배임 혐의로 검찰에 기소당했지만 모두 무죄 확정을 받았다.

1심 재판부는 김 회장의 책임을 인정해 89억6680만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당시 재판부는 “경영권 승계 목적으로 주식을 장남인 동관씨에게 매각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지배하고 있는 한화그룹 경영기획실을 통해 주식가치를 저가로 평가할 것을 지시하거나 이를 인용했으므로 한화에 손해를 입혔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2심부터 판단이 달라졌다. 2심 재판부는 “가령 이사들이 모두 주식매매에 찬성했고, 동관씨가 한화그룹 경영권을 승계하는 이익을 얻었다고 해도 이를 김 회장 본인의 이익이라고 보긴 어렵다”고 설명했다. 그러자 김상조 당시 경제개혁연대 소장은 “상법에는 아들 등 특수관계인에게 이득을 몰아준 것도 처벌하도록 돼 있다”며 대법원에 상고했다.

대법원의 판단도 2심과 같았다. 대법원은 이사회가 동관씨에게 이득을 몰아주는 결정을 했더라도 충분한 정보를 수집·분석하고 정당한 절차를 거쳐 주식매매를 승인했다면 이사들은 충실의무를 지킨 것으로 봐야 한다고 판단했다. 경영권 승계에 따른 이익은 이사회의 경영상 판단 사항이라는 취지다. 또 주식매매 자체도 부당히 저가로 평가한 것으로 보기 어렵다는 2심 판결을 받아들였다. 대법원은 회계법인의 가치평가 과정과 결과가 부당하다고 할 수 없고, 주가 상승도 주식매매 뒤 사정에 따른 것이라고 봤다.

◆이사회의 경영 재량권 폭넓게 인정

법조계에서는 경영권 승계에 대한 이사회의 판단을 존중함으로써 기업의 자율경영권을 보장하는 판결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이사회에서 자기거래를 결의하거나 회사기회를 이용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충분한 정보’와 ‘절차적 정당성’이라는 두 가지 기둥만 흔들리지 않는다면 그 결과는 기업의 경영상 판단으로 볼 수 있다는 취지여서다.

이번 판결은 기업이 경영권 승계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이익의 충돌’에 대한 분쟁에도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제기된다. 승계를 위한 ‘1보 후퇴’가 기업의 ‘즉각 실현 가능한 이익’과 충돌할 때 승계를 택한 이사회 결정을 배임으로 볼 수 있느냐는 문제다. 한 대형로펌 상법 전문 변호사는 “경영권 승계 결정을 모두 존중해야 한다고 적시한 건 아니지만 경영권 승계에 따른 이익 또는 손해는 이사회의 결정 사항이라는 취지로 의미가 큰 판결”이라고 설명했다.

일각에서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재판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앞서 이 부회장에게 징역 5년을 선고한 1심은 이 부회장이 ‘승계작업’을 위해 최순실 씨와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뇌물을 공여했다고 판단했다.

문제는 1심이 개별 현안에서 뇌물공여액을 이 부회장 개인의 횡령액으로 본 점이다. 이 부회장이 경영권 승계라는 개인의 이익 실현을 위해 회삿돈을 횡령했다는 취지다. 물론 삼성의 승마 지원 등이 이사회에서 결의된 사항은 아니었다. 하지만 경영권 승계를 회사의 이익으로 볼 수 있다는 판결 자체는 시사점이 있다는 시각이다.

고윤상 기자 ky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