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소기업 '하나의 브랜드'로 승부하라
20여 년 전 국내의 한 중견기업이 ‘기회의 땅’ 미국에 진출했다. 좁은 한국 시장에서 벗어나 ‘아메리칸 드림’을 실현하기 위해 로스앤젤레스를 비롯한 캘리포니아주에 10개가 넘는 직영매장을 열었다. 제품을 팔기 위해 의욕적으로 현지 미디어를 통해 자사 브랜드를 알렸다. 많은 돈을 쏟아부었다. 하지만 좀처럼 광고 효과가 나질 않았다.

이 회사 사장은 고민에 빠졌다. 한국에서는 이 정도 광고를 했으면 어느 정도 매출이 늘어나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미국에선 반응이 거의 없었다. 밑빠진 독에 물붓기였다. 나중에 원인을 파악해본 뒤 한탄했다. 로스앤젤레스가 속한 캘리포니아에는 ‘와스프(WASP: 화이트 앵글로색슨 프로테스탄트·앵글로 색슨계 백인 신교도)’로 대표되는 전통적인 미국인은 물론 히스패닉, 한국인, 일본인, 중국인, 인도인 등 수많은 국가의 이민자들이 모여 사는 곳이었다. 특정 매체에 광고해도 다른 민족 사람들은 전혀 보지 않아 큰 효과를 내기 힘들었다. 그렇다고 수많은 매체에 동시다발적으로 광고할 형편도 되지 않았다. 이 회사는 결국 미국에 상륙한 지 몇 년 안 돼 눈물을 머금고 현지 법원에 파산신청서를 제출할 수밖에 없었다.

현대는 광고의 시대다. ‘광고의 아버지’로 불리는 데이비드 오길비는 ‘아무리 창의적이고 독창적인 아이디어가 있어도 자신이 창조한 것을 팔 수 없다면 무용지물’이라는 말을 남겼다. 혁신을 통해 좋은 제품을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팔지 못하면 회사는 망한다. 브랜드가 없으면 팔기 힘들다.

제품 판매에 날개를 달아주는 게 브랜드다. 대기업들이 천문학적인 돈을 쏟아부어 광고에 나서는 것도 브랜드 인지도를 올리기 위한 것이다. 소비자들은 동일한 품질의 제품이라도 유명 브랜드에 더 높은 구매 의욕을 갖게 마련이다.

중소기업 현실은 어떤가. 중소기업중앙회 조사에 따르면 중소기업의 98.2%는 기업을 성장시키는 데 브랜드가 필요하지만 82.6%는 브랜드가 알려지지 않아 영업에 한계를 느낀다고 대답했다. 인력과 자금이 부족해 브랜드 홍보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이다. 중견기업조차 브랜드 이미지 제고가 어려운데 중소기업은 말할 것도 없다.
중소기업 '하나의 브랜드'로 승부하라
외국 중소기업도 브랜드 홍보가 어려운 것은 마찬가지다. 이런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공동브랜드 전략을 쓰고 있다. 미국의 감귤류 브랜드 ‘썬키스트’, 이탈리아의 칼과 가위류 브랜드 ‘프리막스’, 뉴질랜드 과일 브랜드 ‘제스프리’가 대표적이다. 이를 생산하는 농가들은 공동브랜드를 만들어 세계시장을 공략하고 있다.

국가 차원에서 공동브랜드를 제정하는 경우도 있다. 부존자원이 없고 국토가 좁은 스위스는 인구가 823만 명에 불과하지만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7만8245달러(2017년, 국제통화기금·IMF 기준)로 세계 2위다. 스위스는 자국 제품의 우수성을 알리기 위해 빨간색 바탕의 흰 십자가인 ‘스위스 레이블’을 탄생시켰다. 스위스 레이블은 정부의 육성 의지와 철저한 관리를 통해 세계인에게 신뢰받고 있다. 적용 제품은 시계, 초콜릿, 기계, 가방 등 다양한 분야로 확산되고 있다. 스위스 레이블의 지난해 매출은 6조원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스위스는 야외활동을 위한 만능 도구인 빅토리녹스나 명품 시계인 롤렉스 오메가, 식품인 네스카페, 의약품인 로쉬 노바티스 등 신뢰할 만한 브랜드를 다수 갖고 있다. 특히 정밀기계나 화학, 제약 분야에 강점을 갖고 있다. 스위스 레이블의 전략도 ‘스위스산=고품질’이라는 이미지를 심어주기 위한 것이다.

국내에는 1만여 종의 공동브랜드가 존재한다. 중소벤처기업부에 따르면 공동브랜드는 ‘하나의 브랜드를 5인 이상 중소기업이 공동의 마케팅 목적으로 사용하는 브랜드’를 의미한다. 코사마트 등이 그 예다. 지역별 농산물에 적용하는 것도 있고, 특정 제품에 사용하는 브랜드도 있다. 이 중에는 성공적으로 정착한 브랜드도 있지만 유명무실한 것도 많다. 공동브랜드의 장점은 규모가 작고 경쟁력이 약한 중소기업에 브랜드 파워와 마케팅 능력을 강화시켜 줄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전자상거래 확산으로 브랜드가 약한 중소기업이 활동무대를 세계로 넓혀 중견기업으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전략이다. ‘후광 효과(Halo effect)’도 있다. 공동브랜드에 참여하는 유명 기업이 있다면 후발기업은 그 기업의 명성을 함께 누릴 수 있다. 참여 기업 간 공동구매, 연구개발, 생산 및 판매 등 다양한 협력사업으로 확대하고, 시너지 효과를 통해 제품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다.

최근 산업구조 변화도 브랜드 정책에 새로운 과제를 부여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해외 기업들은 유명 브랜드를 앞세워 한국 중소기업을 대상으로 손쉽게 수익을 창출한다. 중소기업들이 새로운 ‘종속 경영’의 틀에 갇히고 있다. 해외 브랜드를 쓰고 있는 일부 중소기업은 ‘급격한 로열티 인상 요구 등 일방적 계약 변경’, ‘마케팅 활동에 과도한 간섭’, ‘라이선스 계약 종료 후 상표권자의 국내 시장 직접 진출’ 등의 애로를 털어놓고 있다.

새 정부도 중소기업 공동브랜드 정책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새로운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 개별 기업에 대한 지원보다는 네트워크형 공동사업을 지원한다는 전략을 펴고 있다. 기획재정부에서는 신규 사업으로 내년 정부 예산에 5억원을 배정했다.

중기중앙회도 최근 정책 변화에 힘을 보내고 있다. 공동브랜드를 지원할 전담 부서를 신설하고 전문가들과 회의를 시작했다. 중소기업 브랜드 사용에 대한 활용 실태 조사에 나섰다. 유영호 중기중앙회 회원지원본부장은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기울어진 운동장의 원인은 기술, 자본 등 여러 분야가 있겠지만 브랜드는 막대한 자금이 장기간 투자돼야 해 중소기업이 극복하기 어려웠던 분야”라며 “공동브랜드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정부와 민간이 힘을 합쳐 홍보 마케팅과 판로 전략을 만들고 다양한 협력사업을 시행해 효과를 확대해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또 공동브랜드 성공을 위해 더욱 중요한 것은 운영주체의 역량이다. 과거 대부분 공동브랜드는 시장에 제대로 안착하기 위해 소요되는 시간과 투입 자금의 ‘데스밸리(death-valley)’를 무사히 넘기지 못해 운영자들이 포기하는 경우가 많았다. 유 본부장은 “공동브랜드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운영주체가 사업 추진 역량과 규모가 있어야 하고 정부의 뒷받침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김낙훈 중소기업전문기자 nh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