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칼럼] 교수 정년보장, 이대로는 안 된다
교수 정년보장 제도를 이야기하면 대학 밖의 많은 사람은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세상인데 무슨 그런 일이 있냐며 대부분 부정적 반응을 보인다.

실제로 대학교수는 30대에 조교수로 처음 임명된 뒤 10년 정도 지나 40대 중반이면 정년을 보장받는다. 그 후 65세까지 아무런 간섭 없이 일할 수 있는 곳이 대학이니 다른 조직과 비교하면 그야말로 꿈 같은 이야기다. 특히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 시각이라면 정년보장이란 업무의 성취 동기를 제거하는 어리석은 제도다. 대학 내에서도 정년보장은 불성실한 교수를 보호하는 제도, 심지어는 교수를 게으르게 만들어 대학 경쟁력을 저하시키는 불필요한 제도라는 지적이 적지 않다.

사실 교수 정년보장은 정치적 자유를 위한 것으로, 본격적 도입은 20세기 초 여성 참정권 확보 등에 앞장선 진보적 분위기의 미국 위스콘신대가 처음이었다. 마침 보수적이던 우드로 윌슨이 1913년에 대통령이 됐는데, 그런 상황에서도 교수가 정치적 보복을 두려워하지 않고 어떤 의견이라도 자유롭게 표현하기 위해 시작된 후 이 제도는 전 세계 대학에 널리 자리잡았다. “자유는 저항의 역사와 궤를 같이한다”고 이야기한 윌슨 스스로의 말처럼 정년보장 제도 역시 저항을 통해 얻어진 것이다.

그러면 요즘 같은 세상에서도 정치적 표현의 자유를 위한 정년보장 제도가 의미를 갖고 있을까? 표현의 자유는 대학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 어디에서건 오히려 조금은 절제가 요구되는 상황이므로 그런 제도는 더 이상 필요 없다는 주장도 일리는 있다.

그러나 우리 대학을 돌아보면 교수가 비교적 완벽한 정치적·학문적 자유를 누리는 일은 몇몇 유명 대학에 국한돼 있으며, 만약 정년보장 제도가 폐지된다면 많은 대학은 확실히 교수를 통제하는 방향으로 운영할 것이다. 대학은 오케스트라 같은 것이며 어떤 측면에서는 지휘자도 없이 즉흥 연주를 곁들이는 재즈악단이나 혹은 흥에 따라 추임새를 넣는 판소리 같은 것이기에 정년보장을 통한 자유는 소중한 가치를 지닌다.

그런데 자유와 권한을 얻었으면 그에 따른 의무도 필연적이며 교수도 이를 수용해야 마땅하다. 학문적 측면에서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고 교수 개인 의지대로 사고하며 행동하는 자유는 물론 바람직하지만 교육자의 기본인 성실성이나 책임감이 결여된 경우에도 정년보장의 보호막 뒤에 서는 것은 옳지 않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교수 사회도 다른 조직과 똑같다. 무슨 일을 해도 괜찮은 성인(聖人)들만 있는 곳이 아니다.

“대학에는 대체로 규칙이 없어졌다. 약간 다르게 이야기하자면, 정년보장을 받은 교수는 각자 스스로의 규칙을 만든다. 교수에게는 어떤 공적인 규칙이나 관습도 강제성을 지니지 못하며 이들은 성문법 혹은 관습법도 거의 없이 지낸다. 교수 사회는 형편없는 집단이다.” 이는 미국 하버드대 문리대 학장 겸 교무처장을 지낸 헨리 로조브스키가 이미 30년 전에 발표한 보고서 내용이다. 우리는 과연 미국 대학과 다를까?

이런 측면이라면 우리는 오히려 훨씬 뒤떨어져 있는데, 그 이유는 미국 대학에서는 연봉제로 인해 정년보장 후에도 교수들은 계속 평가를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평가 결과를 개인 소득과 직접적으로 연계시키는 것이 연봉제이기에 실제로 책정된 연봉이 과거에 비해 떨어지면 교수는 이를 학교에서 물러나야 하는 강력한 경고로 여긴다. 그에 비해 호봉제의 우리 대학에선 일단 정년보장을 받은 뒤에는 평가와 아무 관계없이 은퇴까지 교수 봉급은 계속 오른다.

정년보장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교수 각자가 좀 더 생산적인 미래를 만들고 대학이 경쟁력을 갖기 위해서는 정년보장 교수에 대해서도 정기적으로 교육과 연구 업적을 평가하는 일이 꼭 필요하다. 아울러 그 평가 결과에 기초해 합당한 격려와 질책이 교수 각자에게 돌아가야 한다. 그런 측면에서 대학의 교수 연봉제는 정년보장을 보완하는 불가피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김도연 < 포스텍 총장 dohyeonkim@postech.ac.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