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사, 수주보다 어려운 '수주 가이드라인'
‘돈 되는 선박만 수주하라’는 정부와 국책은행의 수주 가이드라인이 역설적으로 조선업체의 실적을 악화시킨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조선업 부실의 원인이 된 저가 수주를 차단하는 데는 효과를 거뒀지만 중국, 일본 업체와의 수주경쟁에서 밀리면서 ‘일감절벽’을 불러오는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획일화된 가이드라인이 더 큰 손실을 불러올 것이라는 비판과 어떤 경우에도 적자 수주를 용인하면 안 된다는 반론이 팽팽히 맞서고 있다.

적자 수주 바람직하지 않지만…

18일 조선업계에 따르면 최근 삼성중공업과 대우조선해양은 세계 최대 규모인 2만2000TEU(1TEU=20피트짜리 컨테이너 1개)급 컨테이너선 11척을 수주하기 위해 세계 2위 해운사인 스위스 MSC와 막판 협상을 벌이고 있다. 수주 시 계약금액은 총 15억달러(약 1조7000억원)에 달해 두 회사의 일감 부족을 해소하는 데 큰 도움이 될 전망이다.

두 조선사는 그러나 MSC 측에 제시한 금액이 정부의 수주 가이드라인을 맞추지 못해 계약에 어려움을 겪는 것으로 나타났다. 계약을 따내기 위해서는 수출입은행 등에서 선수금 환급보증(RG)을 받아야 하는데 적자 수주를 금지한 가이드라인이 걸림돌이 되고 있는 것이다. 시중은행이 RG 발급을 사실상 중단한 상태여서 국내 조선사는 정부 가이드라인에 맞춰 선박 가격을 책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정부는 대우조선 부실 사태를 겪은 뒤 지난 7월 해양금융종합센터를 통해 ‘수주가격이 원가보다 높아야 한다’는 내용을 담은 수주 가이드라인을 마련했다. 영업이익이 나지 않은 적자 수주를 원천적으로 금지한 것이다. 예외 조항도 있다. 10개월치 미만의 일감만 남으면 수주 가격이 원가를 밑돌더라도 설비 감가상각비와 일반관리비 수준의 손실은 허용해주기로 했다.

하지만 조선업계 관계자는 “글로벌 선복 과잉으로 선박 가격이 역사상 최저 수준으로 떨어진 상황에서 정부가 요구하는 기준을 도저히 맞출 수 없다”고 토로했다. 이대로 가면 웬만한 일감은 모두 중국 업체가 가져갈 것이라고 덧붙였다. 현대중공업은 지난달 중국업체에 밀려 1조6000억원 규모의 초대형 컨테이너선 9척의 수주 기회를 놓쳤다. 일부 조선사는 가이드라인을 적용한 결과 일본보다 입찰 가격이 높아지는 사례가 발생해 수주 영업에 어려움을 겪는 것으로 나타났다.

일감절벽은 어떻게 하나…

정부와 은행권은 조선업계의 고질적 문제인 과당 경쟁을 막고 구조조정을 차질없이 하기 위해서는 가이드라인이 불가피하다는 입장이다. 정부 관계자는 “기준을 완화하면 조선사들이 자구 노력을 게을리할지 모른다”며 “인력 감축을 통해 생산 효율을 높여 가격경쟁력을 키우는 것이 당장 기준을 완화하는 것보다 중요하다”고 반박했다.

반면 조선업계는 가이드라인과 현실의 괴리가 크다고 지적했다. 선박 가격이 원가 이하로 떨어지는 바람에 가이드라인을 따르면 중국과의 수주경쟁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해진다는 것이다. 영국 조사기관인 클락슨에 따르면 국내 조선사가 많이 건조하는 초대형유조선(VLCC) 가격은 9월 현재 척당 8100만달러로 2008년 9월(1억6200만달러)의 절반 수준까지 떨어졌다.

일감이 없는 상황에서 발생하는 고정비 손실이 가이드라인에 반영되지 않았다는 지적도 나온다. 한 척당 수주 가격이 원가보다 낮으면 당장 손실을 보는 것처럼 보이지만 많은 물량을 수주하면 고정비를 충당하면서 결과적으로 이득을 볼 수 있다는 주장이다. 한국업체를 고사시키려는 중국 업체의 ‘시간벌기 전략’도 이 같은 계산을 바탕으로 한 것이라는 분석이다. 한 중견 조선사 관계자는 “관리·감독 책임이 있는 정부의 입장을 이해하지만 현 수준의 가이드라인으로는 빈 도크를 채울 수 없다”며 “합리적 수준의 조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안대규 기자 powerzanic@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