셔먼 "70년대 한국 발전에 기여했을 때를 잊지못하죠"
“1970년대 당시 김용환 재무부 장관, 정인용 장관(추후 부총리) 등과 밤새워 일했습니다. 그 공로로 한국 훈장도 받았죠. 그때를 잊지 못해 강연을 만들었습니다.”

27일 미국 뉴욕 맨해튼의 코리아소사이어티에선 ‘셔먼패밀리 코리아 이머징 스칼라 렉처(Sherman Family Korea Emerging Scholar Lecture)’ 첫 회가 열렸다. 미국 내 한국 관련 공부를 하는 소장학자를 지원하는 행사다. 이 강연은 1970년대 씨티은행 한국지점 대표(매니저)를 지낸 필립 셔먼 씨(77·사진)가 거액을 기부해 마련됐다.

소감을 묻자 그는 40여 년 전 함께 일했던 당시 정부 관료들 이름을 스펠링까지 줄줄이 읊어댔다. 그만큼 고되고 보람찬 일을 했기 때문이었으리라.

셔먼 씨는 “한국에 부임하던 1974년은 한창 중화학 공업 등에 투자를 시작하던 한국이 1차 오일쇼크로 매우 어려운 때였다”며 “경제가 어려워지자 정부는 초긴축을 했고 시민들은 겨울에도 집집마다 온도를 10도대로 낮췄다”고 회상했다. 당시는 여전히 신발 섬유 등을 수출해 근근이 외화를 벌던 때였다. 1973년 10월 사우디아라비아가 배럴당 3달러이던 원유값을 12달러로 올리자 한국은 1974년 20억달러가 넘는 무역적자를 기록했다.

셔면 씨는 “당시 석유 수입에 10억달러가 넘게 필요했는데 그때 한국엔 엄청난 돈이었다”며 “차관을 해외에서 조달해야 했는데 농업과 경공업을 주력으로 하던 나라로선 쉽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1974년 10월 추석 명절 때 해외은행 임직원들은 한자리에 모여 소프트볼 대회를 열었다. 셔먼 씨는 재무부 장관 등이 직접 찾아와 응원하고 지원을 요청하던 일을 회상했다. 씨티은행은 그 직후 미국 은행 컨소시엄을 꾸려 2억달러 상업차관을 주선했다. 그 후에도 포항제철, 한국전력, 전주제지, 상업은행, 외환은행 등에 수억달러씩 차관을 공여해 경제 개발에 힘을 보탰다.

셔먼 씨는 “당시는 한국의 경제성장률이 매년 10%를 훌쩍 넘을 때로 정말 재밌었다”며 “좋은 리더십과 정책, 그리고 국민의 참여가 성공을 이끌었다고 본다”고 했다. 그는 “한국은 내가 예상한 것보다 훨씬 빠르게 발전해왔다”며 “지난달에도 다녀왔는데 한국이 자랑스럽다”고 했다.

그는 1996년 부행장을 끝으로 씨티은행을 은퇴했다. 이후 투자 관련 컨설턴트로 일하며 돈을 벌었다. 2000년부터는 노스캐롤라이나대에도 기부금을 내 역사 강의를 지원하고 있다.

이날 강연에선 카트린 카츠 미국 국제전략문제연구소(CSIS) 한국석좌 연구원이 독도 이슈 등 동북아 해양 분쟁에 대해 발표했다. 카츠 연구원은 국가안보위원회(NSC) 아·태 보좌관 등을 거쳤다. 주한 미국대사로 내정된 것으로 알려진 빅터 차 조지타운대 교수, 이성윤 터프츠대 교수 등이 토론에 참여했다.

뉴욕=김현석 특파원 realis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