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수첩] '판사 블랙리스트'를 보는 두 시선
‘블랙리스트’는 영국 극작가 필립 매신저가 《이상한 전쟁(The unnatural combat)》이라는 작품에서 처음 언급한 것으로 전해진다. 17세기 영국 의회와 왕의 갈등을 그려낸 작품이다. 왕 찰스 1세는 의회와 갈등을 빚은 끝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뒤를 이은 찰스 2세는 아버지의 사형 집행에 찬성한 특별재판관 59명의 이름을 들고 복수에 나섰다. 그 명단이 블랙리스트로 불렸다. 말하자면 ‘정치보복 리스트’였던 것이다.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죽음을 두고 복수에 나선 정조의 얘기와 비슷하다.

지난 25일 취임한 ‘진보성향’ 김명수 대법원장이 ‘사법부 블랙리스트’와 관련해 활발한 행보로 주목받고 있다. 취임 일성으로 사법부 블랙리스트 문제 해결이 시급하다고 천명하더니, 28일에는 문제를 제기한 전국판사대표자회의 소속 소장판사들과 회동했다.

사법부 블랙리스트는 전임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자신의 이름을 걸고’ 사실무근으로 결론 내린 문제다. 그런 탓에 재조사 자체가 전임 대법원장에 대한 불신으로 받아들여지는 분위기다. 수장이 바뀌었다고 해서 불과 며칠 만에 사법부의 시각이 바뀌는 것은 사법 신뢰를 훼손하는 부적절한 일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블랙리스트라는 말만 무성할 뿐 개념부터 불명확한 점도 혼란을 가중시키고 있다. ‘누가, 왜, 무엇을 위해’라는 블랙리스트의 구성 요건은 차치하더라도, 결정적으로 피해자가 한 명도 나타나지 않은 상태다. 법원 일각에서는 블랙리스트라는 용어는 부적절하며 ‘문제리스트’일 뿐이라는 말도 나온다. 등산 학회 등을 핑계대며 부적절하게 정치인들을 만나고, 차기 대법원장을 추천하고 다닌 일부 법관의 명단이라는 주장이다. 사실이라면 법관 윤리 강령에 어긋나는 징계감이다. 하필 회자되는 그 일부 법관은 김 대법원장이 회장을 지낸 국제인권법연구회 소속이 다수다.

블랙리스트는 한쪽은 있다고 하고, 다른 한쪽은 없다고 하는 혼탁한 진실게임으로 치닫고 있다. 김 대법원장은 흔들리는 사법부를 안정시키겠다며 칼을 뽑아들었다. 어떤 쪽으로 결론이 나든 사법부 내 깊은 상처를 남길 수밖에 없다. 자칫하면 자신에게 칼자루를 쥐어준 이들에게 칼을 돌려야 할 수도 있다. 솔로몬의 지혜를 기대해본다.

고윤상 지식사회부 기자 ky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