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권도 세계화' 이끈 한국 스포츠의 주역 김운용 전 IOC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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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권도 올림픽 정식 종목·2000년 시드니올림픽 남북동시 입장의 주역
역대 한국인 최고 지위 IOC 부위원장 역임…솔트레이크시티 스캔들로 나락 3일 오전 86세를 일기로 별세한 김운용 전 국제올림픽위원회(IOC) 부위원장은 우리나라의 국기(國技) 태권도를 전 세계에 널리 보급해 세계 스포츠계에서 역대 한국인으로는 가장 높은 자리에 올라간 인물이다.
지난달 페루 리마에서 열린 IOC 총회에서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IOC 위원들의 비위를 조사하는 IOC 윤리위원장이라는 고위직에 선출됐으나 그에 앞서 김 전 부위원장이 먼저 한국인 고위직 진출의 터를 닦았다.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외무장관 의전비서관으로 직업 외교관의 길을 걸은 김 전 부위원장은 주 유엔대표부 참사관, 영국 참사관을 거쳐 마흔 살이던 1971년 대한태권도협회장에 취임하며 스포츠와 본격적으로 인연을 시작했다.
이듬해 국기원 창설원장을 맡고 1973년 우리나라 주도의 세계태권도연맹(WTF)을 창설해 태권도의 세계화를 주도했다.
김 전 부위원장은 태권도와 유창한 외국어 실력을 발판삼아 국내외 스포츠 무대에서 입지를 넓혀갔다.
1974년 대한체육회 부회장 겸 대한올림픽위원회(KOC) 부위원장으로 승격됐고, 서울이 일본 나고야를 제치고 1988년 하계올림픽 개최지로 결정된 뒤인 1982년엔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선임돼 대회 준비에 전력을 쏟았다.
외교관 시절 갈고 닦은 김 전 부위원장의 친화력과 폭넓은 대외 관계는 세계 스포츠 무대에서 한국의 외교력을 높인 비장의 무기였다.
김 전 부위원장은 1986년 IOC 총회에서 한국인으로는 역대 6번째 IOC 위원으로 선출돼 마침내 세계 스포츠의 중심 무대로 진입했다.
그는 1986년부터 10년간 IOC TV·라디오 분과 위원장을 지내고 IOC 집행위원(1988∼2002년)과 IOC 부위원장을 오랜 기간 지내며 IOC의 핵심 인물로 활동했다.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는 동안 김 전 부위원장은 태권도의 올림픽 정식 종목 채택에 크게 기여했다.
1988 서울올림픽에서 시범 종목으로 열린 태권도는 1994년 프랑스 파리 IOC 총회에서 2000년 시드니올림픽 정식 종목으로 채택됐다.
이후 태권도는 하계올림픽에서 우리나라의 메달 박스로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다.
장웅 북한 IOC 위원과 더불어 2000년 시드니올림픽 개회식에서 남북공동 입장을 끌어낸 것도 김 전 부위원장의 최대 치적이다.
지구상 유일한 분단국가인 남북한이 주 경기장에 공동 입장하는 순간 전 세계는 평화의 상징인 남북한 선수들을 향해 크게 환호하며 열띤 박수를 보냈다.
남북 해빙 무드를 타고 이뤄진 남북 올림픽 동시 입장은 이후에도 여러 국제대회에서 남북 공동응원의 산파 노릇을 했다.
IOC 위원들의 지지 속에 김 전 부위원장은 2001년 백인들의 전유물인 IOC 위원장에 도전하기도 했으나 낙선했다.
IOC의 거목으로 입지를 다진 김 전 부위원장을 필두로 1996년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IOC 위원으로 선출되고, 박용성 국제유도연맹회장이 국제경기연맹(IF) 회장 자격으로 2002년 IOC 위원이 되면서 한국 스포츠는 IOC 위원 3명을 둔 최전성기를 맞기도 했다.
그러나 김 전 부위원장은 IOC 역사상 최악의 추문으로 평가받는 솔트레이크시티 스캔들에 연루돼 IOC의 엄중 경고를 받은 뒤 나락으로 떨어졌다.
솔트레이크시티 스캔들은 2002년 동계올림픽을 유치한 미국 유타주 솔트레이크시티가 유치 과정에서 IOC 위원들에게 뇌물을 건넨 것이 드러나 수 명의 IOC 위원들이 제명된 사건이다.
김 전 부위원장은 2004년엔 체육 단체 공금을 개인적으로 유용한 혐의로 구속기소 돼 대법원 확정판결에 따라 징역 2년, 추징금 7억8천800만원의 형량이 확정돼 복역하기도 했다.
결국, 대한태권도협회장, 세계태권도연맹 총재, 그리고 대한체육회장 등 주요 공직을 차례로 내놓은 김 전 부위원장은 IOC의 제명 직전인 2005년 5월 IOC 위원마저도 사임했다.
오명을 피하진 못했으나 김 전 부위원장은 한국 체육계의 살아 있는 전설이자 큰 어른으로서 이후에도 크고 작은 행사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지난달 27일 진천 국가대표 선수촌 개촌식이 생전에 참석한 마지막 공식 행사가 되고 말았다.
대한체육회의 한 관계자는 "다음 달 체육회에서 발간하는 '스포츠영웅 김운용 편' 편찬 작업을 위해 최근에도 집필자와 열심히 얘기를 나누셨다"면서 김 전 부위원장의 갑작스러운 타계에 안타까움을 전했다.
(서울연합뉴스) 장현구 기자 cany9900@yna.co.kr
역대 한국인 최고 지위 IOC 부위원장 역임…솔트레이크시티 스캔들로 나락 3일 오전 86세를 일기로 별세한 김운용 전 국제올림픽위원회(IOC) 부위원장은 우리나라의 국기(國技) 태권도를 전 세계에 널리 보급해 세계 스포츠계에서 역대 한국인으로는 가장 높은 자리에 올라간 인물이다.
지난달 페루 리마에서 열린 IOC 총회에서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IOC 위원들의 비위를 조사하는 IOC 윤리위원장이라는 고위직에 선출됐으나 그에 앞서 김 전 부위원장이 먼저 한국인 고위직 진출의 터를 닦았다.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외무장관 의전비서관으로 직업 외교관의 길을 걸은 김 전 부위원장은 주 유엔대표부 참사관, 영국 참사관을 거쳐 마흔 살이던 1971년 대한태권도협회장에 취임하며 스포츠와 본격적으로 인연을 시작했다.
이듬해 국기원 창설원장을 맡고 1973년 우리나라 주도의 세계태권도연맹(WTF)을 창설해 태권도의 세계화를 주도했다.
김 전 부위원장은 태권도와 유창한 외국어 실력을 발판삼아 국내외 스포츠 무대에서 입지를 넓혀갔다.
1974년 대한체육회 부회장 겸 대한올림픽위원회(KOC) 부위원장으로 승격됐고, 서울이 일본 나고야를 제치고 1988년 하계올림픽 개최지로 결정된 뒤인 1982년엔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선임돼 대회 준비에 전력을 쏟았다.
외교관 시절 갈고 닦은 김 전 부위원장의 친화력과 폭넓은 대외 관계는 세계 스포츠 무대에서 한국의 외교력을 높인 비장의 무기였다.
김 전 부위원장은 1986년 IOC 총회에서 한국인으로는 역대 6번째 IOC 위원으로 선출돼 마침내 세계 스포츠의 중심 무대로 진입했다.
그는 1986년부터 10년간 IOC TV·라디오 분과 위원장을 지내고 IOC 집행위원(1988∼2002년)과 IOC 부위원장을 오랜 기간 지내며 IOC의 핵심 인물로 활동했다.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는 동안 김 전 부위원장은 태권도의 올림픽 정식 종목 채택에 크게 기여했다.
1988 서울올림픽에서 시범 종목으로 열린 태권도는 1994년 프랑스 파리 IOC 총회에서 2000년 시드니올림픽 정식 종목으로 채택됐다.
이후 태권도는 하계올림픽에서 우리나라의 메달 박스로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다.
장웅 북한 IOC 위원과 더불어 2000년 시드니올림픽 개회식에서 남북공동 입장을 끌어낸 것도 김 전 부위원장의 최대 치적이다.
지구상 유일한 분단국가인 남북한이 주 경기장에 공동 입장하는 순간 전 세계는 평화의 상징인 남북한 선수들을 향해 크게 환호하며 열띤 박수를 보냈다.
남북 해빙 무드를 타고 이뤄진 남북 올림픽 동시 입장은 이후에도 여러 국제대회에서 남북 공동응원의 산파 노릇을 했다.
IOC 위원들의 지지 속에 김 전 부위원장은 2001년 백인들의 전유물인 IOC 위원장에 도전하기도 했으나 낙선했다.
IOC의 거목으로 입지를 다진 김 전 부위원장을 필두로 1996년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IOC 위원으로 선출되고, 박용성 국제유도연맹회장이 국제경기연맹(IF) 회장 자격으로 2002년 IOC 위원이 되면서 한국 스포츠는 IOC 위원 3명을 둔 최전성기를 맞기도 했다.
그러나 김 전 부위원장은 IOC 역사상 최악의 추문으로 평가받는 솔트레이크시티 스캔들에 연루돼 IOC의 엄중 경고를 받은 뒤 나락으로 떨어졌다.
솔트레이크시티 스캔들은 2002년 동계올림픽을 유치한 미국 유타주 솔트레이크시티가 유치 과정에서 IOC 위원들에게 뇌물을 건넨 것이 드러나 수 명의 IOC 위원들이 제명된 사건이다.
김 전 부위원장은 2004년엔 체육 단체 공금을 개인적으로 유용한 혐의로 구속기소 돼 대법원 확정판결에 따라 징역 2년, 추징금 7억8천800만원의 형량이 확정돼 복역하기도 했다.
결국, 대한태권도협회장, 세계태권도연맹 총재, 그리고 대한체육회장 등 주요 공직을 차례로 내놓은 김 전 부위원장은 IOC의 제명 직전인 2005년 5월 IOC 위원마저도 사임했다.
오명을 피하진 못했으나 김 전 부위원장은 한국 체육계의 살아 있는 전설이자 큰 어른으로서 이후에도 크고 작은 행사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지난달 27일 진천 국가대표 선수촌 개촌식이 생전에 참석한 마지막 공식 행사가 되고 말았다.
대한체육회의 한 관계자는 "다음 달 체육회에서 발간하는 '스포츠영웅 김운용 편' 편찬 작업을 위해 최근에도 집필자와 열심히 얘기를 나누셨다"면서 김 전 부위원장의 갑작스러운 타계에 안타까움을 전했다.
(서울연합뉴스) 장현구 기자 cany9900@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