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말 한국이 국제통화기금(IMF)에서 구제금융을 받기로 한 뒤 정부 고위 인사들은 서울 힐튼호텔 23층 펜트하우스를 수시로 드나들어야 했다. 외채협상 실무단장으로 파견된 휴버트 나이스 당시 IMF 아시아태평양 국장(82·사진)이 머물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지금까지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의 집무실로 쓰이고 있는 그 장소다.

짧은 스포츠머리가 트레이드마크인 그는 처음부터 “2개 시중은행과 12개 종합금융회사를 폐쇄하라”고 요구하며 고금리·고환율·고강도 긴축 프로그램을 밀어붙였다. 예상했던 것보다 더 가혹한 요구에 한국 측 협상대표단이 반발했지만 결국 그의 요구를 받아들여야 했다.

20년이 지난 지금, 세상은 적잖이 변했다. 그가 맡았던 자리에는 한국인(이창용 현 아태국장)이 앉아 있다. 그와의 이메일 인터뷰를 통해 당시 정책에 관한 의견을 다시 물었다. 나이스 전 국장은 IMF의 처방 중 대부분은 옳았다고 했지만 몇 가지는 실수를 인정했다. 예컨대 당시 IMF의 재정 긴축 요구에 대해 “긴축이 아니라 완화했더라면 빠른 경제 회복에 더 도움이 됐을 것”이라고 했다. 최근 IMF 내에서 고강도 긴축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반성 기조가 있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그는 다만 많은 불확실성을 상대해야 하는 위기 한복판의 상황을 들어 자신을 변호했다.

▷외환위기 당시 한국 경제에 ‘근본적인’ 문제는 없었으며 다만 외환 통제 등이 제대로 되지 않았을 뿐이라는 주장이 여전히 나온다.

“당시 위기가 (한국 시장에 대한) 신뢰가 사라지면서 외화가 대규모로 빠져나간 데 따른 것이라는 점은 사실이다. 또 주변 지역에서 위기가 ‘전염’된 측면도 있다. 그러나 한국 경제에는 심각한 취약성이 내재돼 있었다. 특히 은행의 관리감독 부문이 그랬고, 금융구조와 기업 지배구조에도 문제가 있었다. 한국 정부가 이런 취약점을 개선하자 시장의 신뢰가 돌아왔고 경제도 회복세를 나타내기 시작했다.”

▷한국에 내린 처방전을 지금 재평가한다면.

“위기의 한복판에서 불확실성에 대응하다 보면 일부 실수를 피하기는 어렵다. 상황 전개를 정확히 예상하기도 어렵다. 과거 상황을 되짚어보면서 무엇이 더 적절했을지 알게 될 따름이다. 한국의 경우 위기 초반에 경제활동이 빠르게 위축된 것을 감안하면 초기에는 (긴축 정책보다는) 완화적인 재정정책을 쓰는 것이 더 나았을 것이라고 본다. 또 초반에 금리를 더 빠르게 끌어올렸으면 외환시장의 흐름이 더 신속하게 바뀌었을 테고 고금리가 필요한 기간 자체를 단축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는 올초 한 포럼에서 한국에 고금리 정책이 너무 오래 적용됐다며 더 빨리 정상화해야 했다고 회고했다.)”
▷위기 당시 말레이시아는 IMF 권고와 반대로 강력하게 자본 유출입을 통제했고, 성공했다고 주장한다. 말레이시아 모델을 한국에 적용할 수 있었을까.

“말레이시아는 외환을 통제하고 IMF와 같은 국제 금융기관의 지원을 받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충격을 피해갈 순 없었다. 말레이시아 상황은 한국과 달랐고, 한국 정부도 그 방식을 취할 생각이 없었다. 이후 (한국 경제의) 발전상은 국제 경제에 문호를 개방한 선택이 위기에서 빠르게 벗어나게 하고 경제를 튼튼하게 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다른 방식을 취했더라면 이 정도로 잘 작동했을지 의문스럽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후 경제 위기에 대한 대응 방식은 상당히 달라졌다. 통화책은 고금리보다 저금리를, 재정정책은 긴축보다 부양을 강조하는 분위기다. 최근엔 그리스 구제금융 과정이 적절치 않았다는 IMF 내부 비판도 나왔다.

“위기 상황에서 어떤 통화 및 재정정책을 쓰느냐는 그 나라가 처한 구체적인 상황에 달린 문제다. 한국과 달리 그리스는 환율을 방어하기 위해서 금리를 올릴 필요가 없었다. 그리스는 유로존(유로화 사용 19개국)에 속한 나라이기 때문이다. 대신 그리스는 심각한 재정적자 문제를 해소해야만 했다. 한국은 그렇게 할 필요가 없었다.”

▷한국에는 가혹했던 IMF가 ‘부드러워지고’ 있는 것 같아 보인다.

“위기 관리 방식은 진화하고 있다. 각국뿐 아니라 IMF도 과거의 위기 경험에서 배우는 중이다. 이런 과정에서 서로 다른 접근방법에 대한 토론은 항상 있게 마련이다. 이런 변화는 환영할 만한 일이다.”

▷한국 대기업들은 외환위기를 계기로 400%가 넘던 부채비율(자본 대비 부채 규모)을 200% 밑으로 끌어내리는 등 체질을 상당히 바꿨다. 그런데도 여전히 지배구조 개선 등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크다. 한국 대기업에 문제가 있다고 보나.

“외환위기를 계기로 한국 기업들은 다양한 개혁을 했지만 아직 개혁이 완료됐다고 볼 순 없다. 한국 기업들이 재무적으로 더 튼튼해지고, 더 투명해지고, 더 시장친화적으로 바뀌기 위해서는 개혁 노력을 지속해야 한다. 이런 노력을 통해 한국 기업들이 기술적인 측면에서도, 글로벌 발전 측면에서도 더 우위를 점할 수 있을 것이다.”

▷20년이 흘렀지만 한국인에게 외환위기는 트라우마로 남아 있다.

“그런 상황을 미연에 방지할 수는 없었겠지만 사회적 보호를 통해 고통을 줄일 수는 있었을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한국 정부는 상당한 노력을 했다. 위기가 발생하면 사람들이 고통받는 것은 어느 정도 불가피하다. 그렇기 때문에 경제정책이 할 수 있는 최선은 위기를 방지하는 일이다. 한국은 1997년 위기의 경험에서 많은 것을 배웠고 그렇기 때문에 지금껏 심각한 위기를 피할 수 있었다고 본다.”

이상은 기자 se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