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인터뷰] 1992년 남북기본합의서, 한·중 수교 지휘했던 정원식 전 국무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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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외교, 연속성 없는 게 문제
주변국에 일관된 메시지 줘야"
당시 북한은 한국과 손잡아야 경제회복 가능 판단
합의서 내용에 우리쪽 요구 훨씬 더 많이 반영
외교·대북정책 담당자 자주 바뀌니 정책도 수시 변경
현실 직시하고 변화엔 능동적으로 대처해야
현재의 일을 과거에 끼워 맞추면 오류 생겨
주변국에 일관된 메시지 줘야"
당시 북한은 한국과 손잡아야 경제회복 가능 판단
합의서 내용에 우리쪽 요구 훨씬 더 많이 반영
외교·대북정책 담당자 자주 바뀌니 정책도 수시 변경
현실 직시하고 변화엔 능동적으로 대처해야
현재의 일을 과거에 끼워 맞추면 오류 생겨
“남북고위급회담에 참여한 지 어느덧 25년이나 지났습니다. 총리직에서 물러난 뒤 한 번도 남북관계에 대해 다시 다뤄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 내게 지금의 남북 문제를 논할 자격이 어디 있겠습니까.”
정원식 전 국무총리(90)는 지난 12일 서울 신당동의 개인 사무실에서 한국경제신문과 인터뷰를 시작하며 이같이 운을 뗐다. 뜻밖이었다. 정 전 총리만큼 한국 정치·외교사에서 여러 번 중요한 순간에 서 있던 인물이 흔치 않은 상황에서 나온 대답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1992년 2월 북측 대표였던 연형묵 당시 정무원 총리와 함께 ‘남북기본합의서’(정식 명칭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와 ‘한반도비핵화선언’에 서명했다. 남북기본합의서에선 남과 북을 통일 지향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관계라고 규정했다. 남북 간 무력 사용 금지, 불가침 구역 설정, 군사 당국자 간 직통전화 설치 등에도 합의했다. 그해 8월엔 한국과 중국이 전격 수교했고, 당시 총리로서 관련 작업을 총지휘했다.
인터뷰 시작 후 그가 자신의 생각을 진짜 꺼내기 시작한 건 10분 정도 지나서였다. 구순(九旬)에도 불구하고 발음에 흔들림이 없는 중저음의 목소리였다.
▷남북기본합의서는 2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가장 앞서 나간 남북 공동선언’이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당시 어떻게 합의서 체결이 가능했습니까.
“당시 남북한은 서로 화해 분위기를 조성해야 한다는 필요성이 있었습니다. 한국 정부는 계속 평화통일을 주창해왔고, 북한은 경제 회복을 위한 돌파구 마련이 필요했습니다. 특히 그때 김일성 북한 주석이 우리 쪽과 경제와 기술 협력을 아주 강력히 원하고 있었던 상황이어서 회담은 우리 쪽에 유리하게 흘러갔죠. 합의서 내용 역시 우리 정부 쪽 내용이 훨씬 많이 반영됐고요. 지금이라면 ‘남북한은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관계라는 것을 인정하고, 평화통일을 성취하기 위한 공동의 노력을 경주할 것을 다짐한다’는 내용을 북한에서 수용한다는 것을 상상하지 못할 겁니다.”
▷북한이 당시 왜 고개를 숙이면서까지 회담에 적극 나섰다고 봅니까.
“6·25전쟁 휴전 후 우리 쪽 피해도 컸지만 북한이 입은 타격도 상당히 컸어요. 평양 시내에 멀쩡한 건물이 하나도 없을 정도였으니까요. 북한으로선 한국과 손을 잡아야 경제 회복이 가능하다고 봤을 겁니다. 내가 대학생이던 1940~1950년대 시절만 하더라도 북한이 한국보다 훨씬 잘 살았어요. 학문과 각종 공업기술 등 여러 분야에서 앞서 있었죠.”
▷합의서 체결 당시 미국을 비롯한 주변국의 반응은 어땠습니까.
“한반도 문제는 남북한이 알아서 해야 한다는 분위기였어요. 미국과 일본, 중국과 러시아도 다 그런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남북고위급회담 당시에도 주변국에서 큰 반발이 없었어요. 지금처럼 북핵 문제가 대두되던 시절이 아니었으니까요.”
▷남북고위급회담 때 김일성 주석 등 북한 주요 인사들을 만났습니다.
“4~8차 회담에 참여했는데 그때 평양에 세 번 갔습니다. 김일성을 세 번 만났죠. 사람을 다루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위압적 분위기를 조성하기보단 상대방에게 최대한 예의를 갖추며 부드럽게 대하는 스타일이었습니다. 사실 그게 무섭거든요. 회담 파트너였던 연형묵 총리도 상당히 스마트했습니다. 북한에선 온건파, 화해파로 꼽힌 인물인데 군수공업과 경제 정책 전문가였어요. 체코에서 유학도 하고 해외 방문 경험이 많아 꽤 개방적인 인물이었습니다. 북한 경제를 살려야 한다는 사명감도 강했고요. 그래서 회담할 때 말이 잘 통한다는 느낌을 받았죠.”
▷하지만 이듬해 제1차 북핵 위기가 발생했는데 정말 안타까웠을 것 같습니다.
“그토록 노력한 게 한순간에 다 물거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북한에선 우리와 회담한 결과물을 전부 백지화시킨 것이었으니까요. 북한이 핵무기를 개발하지 않았다면 지금처럼 최악의 상태까진 오지 않았을 것이라고 봐요. 하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이죠.”
▷그때의 북한과 지금의 북한은 어떻게 다르다고 봅니까.
“나는 1990년대 초반까지의 북한만을 알고 있어요. 이제 그때 활동한 사람들은 생존해 있지 않습니다. 1990년대의 잣대로 현재의 북한을 보면 곤란합니다. 지금의 북한은 강경파가 득세하고 있지 않습니까. 완전히 변했어요. 그래서 솔직히 말해 전 남북 문제의 현재에 대해 진단할 자격이 없습니다.”
▷한국과 중국 간 수교 당시에도 총리로서 큰 역할을 하지 않았습니까. 그 당시 한·중 수교가 전격 체결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한·중 수교가 성공한 건 결국 민간 경제교류가 선행됐기 때문이었습니다. 양국 수교 이전에도 한국 기업들이 중국에 지사를 많이 세우며 활발히 진출하기 시작했고, 중국에서도 이른바 보따리장수라고 하죠? 그 사람들이 무역 중개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수교의 필요성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아주 컸죠.”
▷교류에서 가장 중요한 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교류의 성공 여부는 결국 현실적으로 그게 얼마나 절실한가에 달려 있다고 봅니다. 한·중 수교도 그래서 성공했고요. 남북 교류가 이런 점에서 좀 아쉽습니다. 지나치게 정부가 억지로 끌고 간 게 많았어요. 개성공단도, 금강산 관광도 그랬습니다. 민간에서 먼저 나서기보단 정부가 먼저 아이디어를 제시한 뒤 민간에 참여를 요구하는 방식이었죠.”
▷한국 정부의 외교와 대북정책에서 제일 아쉬운 부분은 무엇입니까.
“공직에 있을 때 해당 부문의 담당자가 너무 자주 바뀌는 게 정말 큰 문제라고 생각했습니다. 1~2년이 멀다 하고 바뀌다 보니 관련 정책도 수시로 변경됐죠. 그래서 주변국에 일관된 메시지를 주기 어렵게 했어요. 연속성이 보장되지 못하는 것이죠. 이 점에서 북한에 크게 밀린다고 봅니다. 북한은 이 분야에선 사람을 쉽게 바꾸지 않거든요. 인수인계도 확실히 하는 편이고요.”
▷한반도 현대사의 폭풍 한가운데 서 있던 주인공으로서 한국 정부가 대내외 정세를 판단하고 외교 정책을 짤 때 어떤 점을 유념해야 한다고 봅니까.
“날 그렇게 평가하지 마세요. 그 당시 함께 일하며 고생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다만 강조하고 싶은 게 하나 있긴 합니다. 현실 직시입니다. 항상 현실을 똑바로 보고 있어야 해요. 그리고 변화에 능동적으로 유연하게 대처해야 합니다. 과거의 시각으로 현실을 보면 오류가 생길 가능성이 있습니다.”
▷과거 역사를 제대로 진단하는 것도 중요할 것 같은데요.
“맞아요. 하지만 현재 일어나는 일들을 과거 비슷한 역사적 사실과 억지로 끼워 맞춰 해석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역사는 반복되는 듯하지만 반복되지 않습니다. 어떤 것을 공부하든 거기서 지혜를 얻어야지 단순한 지식만을 얻으려 하면 안 됩니다.”
■ 정원식 전 국무총리는
정원식 전 국무총리는 1991년 6월 총리 취임을 앞둔 당시 한국외국어대에서 강의를 마치고 나온 뒤 학생들에게 밀가루·달걀 세례, 폭행을 당하는 모습의 사진으로 각인돼 있는 인물이다. 본인조차도 “나에 대해 찾아보면 가장 먼저 나올 사진이 ‘멀쩡한 모습’은 아닐 것”이라고 헛웃음을 지을 정도다.
정 전 총리는 1991년 7월부터 이듬해 10월까지 1년3개월간 국무총리를 지냈다. 그는 남북관계 역사상 가장 급진전된 내용의 극적 합의로 꼽히는 ‘남북기본합의서’ 체결의 주인공이다. 또 한·중 수교 당시에도 물밑 교섭부터 최종 완료까지 진두지휘했다. 총리직에서 물러난 뒤엔 김영삼 전 대통령의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이후 정계에서는 완전히 손을 뗐으며 대외 활동을 거의 하지 않고 있다.
정 전 총리는 교육계에서도 유명하다. 유대인의 가정교육 방식을 소개한 《머리를 써서 살아라》를 비롯해 《인간과 교육》 《교육환경론》 등 교육 분야 저서를 다수 집필했다. 지금은 서울 신당동에서 한 중소기업을 운영 중이다.
△1928년 황해도 재령 출생 △해주동공립중, 서울대 교육학과 졸업 △미국 조지피바디대 심리학 석사, 교육심리학 박사 △서울대 교육학과 교수 △방송심의위원회 위원장(1987~1988년) △문화교육부 장관(1988~1990년) △제23대 국무총리(1991~1992년) △김영삼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위원장(1993년) △안중근의사숭모회 이사장 △대한적십자사 총재(1997~2000년) △유한재단 이사장
이미아 기자 mia@hankyung.com
정원식 전 국무총리(90)는 지난 12일 서울 신당동의 개인 사무실에서 한국경제신문과 인터뷰를 시작하며 이같이 운을 뗐다. 뜻밖이었다. 정 전 총리만큼 한국 정치·외교사에서 여러 번 중요한 순간에 서 있던 인물이 흔치 않은 상황에서 나온 대답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1992년 2월 북측 대표였던 연형묵 당시 정무원 총리와 함께 ‘남북기본합의서’(정식 명칭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와 ‘한반도비핵화선언’에 서명했다. 남북기본합의서에선 남과 북을 통일 지향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관계라고 규정했다. 남북 간 무력 사용 금지, 불가침 구역 설정, 군사 당국자 간 직통전화 설치 등에도 합의했다. 그해 8월엔 한국과 중국이 전격 수교했고, 당시 총리로서 관련 작업을 총지휘했다.
인터뷰 시작 후 그가 자신의 생각을 진짜 꺼내기 시작한 건 10분 정도 지나서였다. 구순(九旬)에도 불구하고 발음에 흔들림이 없는 중저음의 목소리였다.
▷남북기본합의서는 2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가장 앞서 나간 남북 공동선언’이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당시 어떻게 합의서 체결이 가능했습니까.
“당시 남북한은 서로 화해 분위기를 조성해야 한다는 필요성이 있었습니다. 한국 정부는 계속 평화통일을 주창해왔고, 북한은 경제 회복을 위한 돌파구 마련이 필요했습니다. 특히 그때 김일성 북한 주석이 우리 쪽과 경제와 기술 협력을 아주 강력히 원하고 있었던 상황이어서 회담은 우리 쪽에 유리하게 흘러갔죠. 합의서 내용 역시 우리 정부 쪽 내용이 훨씬 많이 반영됐고요. 지금이라면 ‘남북한은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관계라는 것을 인정하고, 평화통일을 성취하기 위한 공동의 노력을 경주할 것을 다짐한다’는 내용을 북한에서 수용한다는 것을 상상하지 못할 겁니다.”
▷북한이 당시 왜 고개를 숙이면서까지 회담에 적극 나섰다고 봅니까.
“6·25전쟁 휴전 후 우리 쪽 피해도 컸지만 북한이 입은 타격도 상당히 컸어요. 평양 시내에 멀쩡한 건물이 하나도 없을 정도였으니까요. 북한으로선 한국과 손을 잡아야 경제 회복이 가능하다고 봤을 겁니다. 내가 대학생이던 1940~1950년대 시절만 하더라도 북한이 한국보다 훨씬 잘 살았어요. 학문과 각종 공업기술 등 여러 분야에서 앞서 있었죠.”
▷합의서 체결 당시 미국을 비롯한 주변국의 반응은 어땠습니까.
“한반도 문제는 남북한이 알아서 해야 한다는 분위기였어요. 미국과 일본, 중국과 러시아도 다 그런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남북고위급회담 당시에도 주변국에서 큰 반발이 없었어요. 지금처럼 북핵 문제가 대두되던 시절이 아니었으니까요.”
▷남북고위급회담 때 김일성 주석 등 북한 주요 인사들을 만났습니다.
“4~8차 회담에 참여했는데 그때 평양에 세 번 갔습니다. 김일성을 세 번 만났죠. 사람을 다루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위압적 분위기를 조성하기보단 상대방에게 최대한 예의를 갖추며 부드럽게 대하는 스타일이었습니다. 사실 그게 무섭거든요. 회담 파트너였던 연형묵 총리도 상당히 스마트했습니다. 북한에선 온건파, 화해파로 꼽힌 인물인데 군수공업과 경제 정책 전문가였어요. 체코에서 유학도 하고 해외 방문 경험이 많아 꽤 개방적인 인물이었습니다. 북한 경제를 살려야 한다는 사명감도 강했고요. 그래서 회담할 때 말이 잘 통한다는 느낌을 받았죠.”
▷하지만 이듬해 제1차 북핵 위기가 발생했는데 정말 안타까웠을 것 같습니다.
“그토록 노력한 게 한순간에 다 물거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북한에선 우리와 회담한 결과물을 전부 백지화시킨 것이었으니까요. 북한이 핵무기를 개발하지 않았다면 지금처럼 최악의 상태까진 오지 않았을 것이라고 봐요. 하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이죠.”
▷그때의 북한과 지금의 북한은 어떻게 다르다고 봅니까.
“나는 1990년대 초반까지의 북한만을 알고 있어요. 이제 그때 활동한 사람들은 생존해 있지 않습니다. 1990년대의 잣대로 현재의 북한을 보면 곤란합니다. 지금의 북한은 강경파가 득세하고 있지 않습니까. 완전히 변했어요. 그래서 솔직히 말해 전 남북 문제의 현재에 대해 진단할 자격이 없습니다.”
▷한국과 중국 간 수교 당시에도 총리로서 큰 역할을 하지 않았습니까. 그 당시 한·중 수교가 전격 체결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한·중 수교가 성공한 건 결국 민간 경제교류가 선행됐기 때문이었습니다. 양국 수교 이전에도 한국 기업들이 중국에 지사를 많이 세우며 활발히 진출하기 시작했고, 중국에서도 이른바 보따리장수라고 하죠? 그 사람들이 무역 중개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수교의 필요성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아주 컸죠.”
▷교류에서 가장 중요한 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교류의 성공 여부는 결국 현실적으로 그게 얼마나 절실한가에 달려 있다고 봅니다. 한·중 수교도 그래서 성공했고요. 남북 교류가 이런 점에서 좀 아쉽습니다. 지나치게 정부가 억지로 끌고 간 게 많았어요. 개성공단도, 금강산 관광도 그랬습니다. 민간에서 먼저 나서기보단 정부가 먼저 아이디어를 제시한 뒤 민간에 참여를 요구하는 방식이었죠.”
▷한국 정부의 외교와 대북정책에서 제일 아쉬운 부분은 무엇입니까.
“공직에 있을 때 해당 부문의 담당자가 너무 자주 바뀌는 게 정말 큰 문제라고 생각했습니다. 1~2년이 멀다 하고 바뀌다 보니 관련 정책도 수시로 변경됐죠. 그래서 주변국에 일관된 메시지를 주기 어렵게 했어요. 연속성이 보장되지 못하는 것이죠. 이 점에서 북한에 크게 밀린다고 봅니다. 북한은 이 분야에선 사람을 쉽게 바꾸지 않거든요. 인수인계도 확실히 하는 편이고요.”
▷한반도 현대사의 폭풍 한가운데 서 있던 주인공으로서 한국 정부가 대내외 정세를 판단하고 외교 정책을 짤 때 어떤 점을 유념해야 한다고 봅니까.
“날 그렇게 평가하지 마세요. 그 당시 함께 일하며 고생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다만 강조하고 싶은 게 하나 있긴 합니다. 현실 직시입니다. 항상 현실을 똑바로 보고 있어야 해요. 그리고 변화에 능동적으로 유연하게 대처해야 합니다. 과거의 시각으로 현실을 보면 오류가 생길 가능성이 있습니다.”
▷과거 역사를 제대로 진단하는 것도 중요할 것 같은데요.
“맞아요. 하지만 현재 일어나는 일들을 과거 비슷한 역사적 사실과 억지로 끼워 맞춰 해석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역사는 반복되는 듯하지만 반복되지 않습니다. 어떤 것을 공부하든 거기서 지혜를 얻어야지 단순한 지식만을 얻으려 하면 안 됩니다.”
■ 정원식 전 국무총리는
정원식 전 국무총리는 1991년 6월 총리 취임을 앞둔 당시 한국외국어대에서 강의를 마치고 나온 뒤 학생들에게 밀가루·달걀 세례, 폭행을 당하는 모습의 사진으로 각인돼 있는 인물이다. 본인조차도 “나에 대해 찾아보면 가장 먼저 나올 사진이 ‘멀쩡한 모습’은 아닐 것”이라고 헛웃음을 지을 정도다.
정 전 총리는 1991년 7월부터 이듬해 10월까지 1년3개월간 국무총리를 지냈다. 그는 남북관계 역사상 가장 급진전된 내용의 극적 합의로 꼽히는 ‘남북기본합의서’ 체결의 주인공이다. 또 한·중 수교 당시에도 물밑 교섭부터 최종 완료까지 진두지휘했다. 총리직에서 물러난 뒤엔 김영삼 전 대통령의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이후 정계에서는 완전히 손을 뗐으며 대외 활동을 거의 하지 않고 있다.
정 전 총리는 교육계에서도 유명하다. 유대인의 가정교육 방식을 소개한 《머리를 써서 살아라》를 비롯해 《인간과 교육》 《교육환경론》 등 교육 분야 저서를 다수 집필했다. 지금은 서울 신당동에서 한 중소기업을 운영 중이다.
△1928년 황해도 재령 출생 △해주동공립중, 서울대 교육학과 졸업 △미국 조지피바디대 심리학 석사, 교육심리학 박사 △서울대 교육학과 교수 △방송심의위원회 위원장(1987~1988년) △문화교육부 장관(1988~1990년) △제23대 국무총리(1991~1992년) △김영삼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위원장(1993년) △안중근의사숭모회 이사장 △대한적십자사 총재(1997~2000년) △유한재단 이사장
이미아 기자 mi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