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형(學兄)! 이렇게 운(韻)을 떼니 한결 마음이 놓입니다. 망설이고 망설이다가 그냥 편하게 글을 쓰자고 마음먹었습니다.

지난달 ‘CEO 커넥션스(CEO Connections)’라는 민간단체가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와튼스쿨에서 개최한 행사에 참석했습니다. 동기들의 우상이던 학형이 30여 년 전 이곳에 첫발을 내디디며 얼마나 가슴 벅찼을지 떠올려 보기도 했지요. 이 단체는 12년 전 미국 중견기업 오너와 경영인들이 모여 만든, 말 그대로 ‘최고경영자들’을 ‘연결’하기 위한 것입니다. 영업 영역 확장과 정보 교환 및 사업 외연 확대 등을 위해, 미국 기업을 규모에 따라 3등분했을 때 중간 부분에 해당하는 민간기업들이 의기투합했습니다. 공교롭게도 매출 규모로 우리의 중견기업에 해당하는 기업이 대부분이었습니다. 행사는 첫날의 와튼스쿨 특별 교육 프로그램, 회원사들의 선별적 니즈와 기업 현장 일반의 구체적인 현안에 관한 이틀간의 패널토론, 결과 공유의 장(場) 등으로 밀도 있게 구성됐습니다.

학형! 솔직히 부럽고, 부끄럽고, 부산한 마음을 어쩔 수 없었습니다. 한국중견기업연합회가 법정단체로 출범한 지 4년이나 지났는데도 우리는 눈만 뜨면 규모에 의한 차별, 세상 어디에도 없는 법들의 양산, 기업과 경영의 영속성에 대한 치열한 고민을 결여한 상속·증여에 대한 편견, 특정 집단의 이익 추구로 변질돼 가는 중소기업적합업종 규제, 통상임금 압박, 근로시간 단축, 많은 선진국을 ‘병자’로 만든 과도한 복지 피해, 시장경제와 사회 시스템의 근간을 무너뜨리는 강성 노조의 횡행 등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의 비(非)기업, 반(反)기업적 상황들에 억눌려 아까운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학형은 나를 학창시절부터 지금까지 술 먹고, 공부 안 하고, 정신 못 차리고, 세상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일종의 망나니로 항상 야단치고 있지요. 내가 진짜 그런가 하는 자책감에 그 야단을 받아들이고만 있었던 가슴앓이의 세월이었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합니다. 이런 망나니의 눈에도 요즘은 나라 안팎을 망라해 나보다 더한 이들이 많이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것을 보면 내가 진짜로 망나니가 돼 가고 있는 모양입니다.

일본 제조업의 체감경기가 10년 만에 최고치를 경신한 덕분에 내년 3월 졸업예정자 88%의 취업이 확정됐고, 이들 중 66.2%는 평균 2.5개 기업으로부터 복수의 러브콜을 받았답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미국, 중국, 유로존 등 많은 나라가 내년 초까지 높은 성장 속도를 유지할 것으로 전망했습니다. 반면 한국의 8월 산업생산, 소매판매, 설비투자는 감소세를 기록했고 청년실업률 9.4%는 1999년 이후 최고치라는 소식을 접하고 있습니다. 그 외에도 우리를 둘러싼 국내외 여러 상황을 고려하면 가슴이 쓰리고 아립니다.

산업 전체의 성장동력이 식어간다는 한탄의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높습니다. 우리는 지정학적 요인을 포함한 여러 가지 이유로 ‘강한 나라’는 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지난 반세기를 돌아보면 분명히 ‘잘사는 나라’는 될 수 있다는 것을 확실히 체득한 나라이고 세상이 인정도 하고 있습니다.

백범 김구 선생이 인생의 좌표로 삼았다는 말씀을 하나 인용할까 합니다. 선생은 “답설야중거(踏雪夜中去) 불수호란행(不須胡亂行) 금일아행적(今日我行跡) 수작후인정(遂作後人程). 눈 덮인 밤길 모름지기 함부로 걷지 마라. 오늘 나의 발자취는 오는 사람들의 이정표가 될 것이니”라고 읊은 서산대사의 깊은 뜻을 평생 가슴에 품었다고 합니다. 지금이 이런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정신을 갈고 닦을 때라고 생각합니다.

치열하게 스스로를 담금질해 온 학형의 삶을 기억합니다. 반드시 책임질 줄 아는 권력이 되도록 이 세상을 올바르게 이끌어주는 큰 빛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소망합니다. 우리가 젊었던 시절, 창의와 혁신의 아이콘이던 디즈니의 만화영화 ‘라이온 킹’의 주제곡을 생각합니다. ‘서클 오브 더 라이프(Circle of the Life)’. 모든 것은 오고 간다고 하지 않습니까. 오직 역사만이 기억합니다. 이제는 아침저녁으로 찬바람이 낯설지 않습니다. 오로지 국민만 생각해 주세요.

강호갑 < 한국중견기업연합회 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