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제티 아지즈 전 말레이시아 중앙은행 총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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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을 때 경제 회복력 다지는 게 중요…두 차례 위기서 배운 교훈"
"위기상황에선 도덕적해이 따지는 것보다 빨리 위기 벗어나는 게 중요"
"IMF 같은 국제기구도 잘못된 판단 책임져야"
"위기상황에선 도덕적해이 따지는 것보다 빨리 위기 벗어나는 게 중요"
"IMF 같은 국제기구도 잘못된 판단 책임져야"
“위기 상황에서는 도덕적 해이 문제를 따지기보다 빠르게 안정을 찾고 경제성장의 길로 돌아오는 것이 중요합니다. 외환위기와 금융위기, 두 차례의 경험을 통해 얻은 교훈이죠.”
지난 20년간 말레이시아 통화 및 경제정책의 핵심 결정자였던 제티 아크타르 아지즈 전 말레이시아 중앙은행 총재(사진)는 지난달 말 한국경제신문과의 이메일 인터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경제의 ‘회복력’을 다져놓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제티 전 총재는 외환위기 당시 말레이시아 중앙은행인 뱅크네가라말레이시아의 수석 이코노미스트이자 총재 대리로 일했으며 부총재를 거쳐 2000년 5월 첫 여성 중앙은행 총재로 발탁돼 지난해 4월까지 장기간 통화정책을 총괄했다.
말레이시아는 외환위기 때 한국과 정반대 접근법을 취했다. 국제통화기금(IMF) 권고를 무시하고 강력한 자본통제 조치와 고정환율제 도입을 결정했다. 이후 말레이시아 경제는 한국처럼 회복됐고, 이는 한국 내에서 여전히 IMF 처방이 틀렸다는 주장의 근거로 사용되고 있다.
제티 전 총재는 이 문제에 관해 말레이시아의 접근법이 정당했다고 옹호했다. 또 “위기 시 (한국처럼) 고강도 (개혁)정책을 쓸 것이냐, 점진적으로 변화를 이끌어낼 것이냐는 각국의 선택 문제며 해당 경제가 치러야 할 비용의 문제”라며 “나는 연속적인 개혁작업을 통한 점진적 변화 쪽을 선호한다”고 말했다.
그는 “(IMF 같은) 국제기구나 금융시장, 신용평가회사는 (각국 정부의) 잘못된 판단이나 실패를 규율하려 하고 도덕적 해이를 우려하지만 성장과 안정이라는 최종 결과를 끌어내는 것도 중요한 과제”라고 역설했다.
IMF에 대해서는 “위기 시 모든 조건이 불안정하지만 IMF 구제금융 프로그램은 각국에 선택의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며 여전히 비판적인 시각을 유지했다. “책임 소재를 따지는 게 최선의 정책 결정을 끌어낸다면 각국 정부뿐만 아니라 그런 외부기관도 자신들의 판단에 책임을 져야 하는 것 아니냐”고 날을 세웠다.
그는 외환위기와 금융위기를 통해 얻은 교훈으로 “위기는 언제든 다시 일어날 수 있으며 금융시스템과 경제 충격을 최소화하기 위해 취약부문 점검을 강화해야 한다는 점”을 첫손에 꼽았다. 또 “국가적인 리스크 관리 역량을 확보해 선제적 조치를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제티 전 총재는 위기 상황에서 “위험에 처한 금융회사에만 도움을 줄 것이 아니라 채무자에도 손을 내밀어 부도사태가 퍼져나가는 것을 방지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 모든 것은 특히 “(위기가 오기 전) 좋은 시절에 대비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말레이시아 중앙은행과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 슬론경영대학원이 2015년 공동 설립한 아시아경영대학원(ASB) 이사회 의장 및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고문으로 일하고 있다.
다음은 제티 전 총재와의 일문일답.
▶외환위기 당시 말레이시아는 한국과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대응했습니다. 당시 중앙은행 수석 이코노미스트로서 여러 선택지를 검토했을 텐데, IMF 같은 서구 기관 및 이코노미스트들의 견해와 180도 다른 방법을 택한 것은 매우 이례적입니다. 그런 결정을 뒷받침할 만한 데이터나 신념이 있었습니까.
“그 시기는 상당히 도전적인 때였습니다. 여러 정책 선택지가 제안됐지만 말레이시아는 우리가 달성하고자 하는 목표에 집중했습니다. 그 목표는 금융시장 특히 외환시장의 안정성을 되찾는 것과 금융기관 대출을 재개하는 것, 경제성장을 회복하는 것이었습니다. 종합적인 정책 묶음이 요구됐지요. 하나의 특별한 정책에 의존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초기 결정은 환율을 전략적 시장개입을 통해 점진적으로 조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특정한 환율 수준을 방어하기 위해 노력하지는 않았고, 그래서 말레이시아 링깃화 가치는 갑자기 떨어지지 않고 점진적으로 내려갔습니다. 그 덕분에 외환보유액도 격감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해외의 투기적인 행동에 대해 이렇게 대응한 지 1년이 지나자 이것이 결코 끝나지 않을 것처럼 보이게 됐죠. 그래서 조심스럽게 링깃화 가치가 무의미한 수준까지 떨어지는 (환율의) 티핑 포인트에 이를 가능성을 평가했습니다. 우리 주변국가에서 그런 상황이 발생하는 것을 봤고요. 자본 통제 수단이 고려되던 시점이었습니다. 3개월간 논의가 이뤄졌습니다. 최종적으로 도입된 수단은 기업활동이나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 투기적인 활동을 겨냥했습니다.
두 번째 도입된 정책수단은 압박을 받고 있는 금융기관을 다루기 위한 기구를 설립하는 것이었습니다. 구제금융은 아니었고, 1차적으로 책임이 있는 금융기관이 손실을 감내하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대기업, 중소기업, 가계에 대한 부채 구조조정으로 더 강화됐습니다. 이같은 수단을 도입한 지 6개월만에 말레이시아 경제는 'V자' 형태의 회복을 할 수 있었습니다.”
▶다른 아시아 국가와 달리 말레이시아는 외환위기 당시 링깃화 가치를 미국 달러에 연동(페그)시켰고, 페그제를 오랫동안 유지했습니다. 그 선택이 최선이었다고 지금도 생각하나요.
“자본통제 조치를 도입한 바로 다음날 말레이시아 링깃화는 달러당 4.2링깃에서 3.8링깃으로 10% 절상됐고 그 수준에서 고정환율이 결정됐습니다. 이 조치는 금융시장의 안정을 찾아줬고, 기업인들에게 확실성과 예측성을 제공했죠. 또 다른 정책들이 효과적으로 적용될 수 있도록 하는 기반이 되어주기도 했습니다.
말레이시아가 1년 후 자본통제 조치를 해제했을 때도 고정환율 제도는 2005년 7월까지 지속됐습니다. 외환시장이 효율적으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많은 전제조건이 필요했습니다. 국내 금융사들의 체질이 강화돼야 했고, 채권시장도 발전해야 했으며 시장에서 금리가 결정될 수 있도록 여러 금융개혁도 이뤄져야 했습니다. 중앙은행의 감독 역량이 강화됐고 관련 법률 등도 정비됐습니다. 또 우리의 외환보유액을 더 늘릴 기회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이런 조치는 전체 솔루션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지요. 이를 통해 안정성을 회복하고 다른 정책들이 효과적으로 작동하는 환경이 마련됐고, 그렇지 않았더라면 그렇게 강한 경제회복은 어려웠을 것입니다.(주: 인도네시아의 경제성장률은 1998년 -7.36%(세계은행 기준)에서 이듬해 6.14%, 2000년 8.86%를 기록했다.)”
▶고정환율제에서 변동환율제로 돌아간 후 말레이시아 링깃화 가치는 지난 수년간 상당한 변동성을 보였습니다. 시장의 자연스러운 움직임으로 보십니까, 아니면 뭔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말레이시아는 연 5%대 경제성장률을 경험하고 있고 경상수지 흑자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외환보유액도 현재 1000억달러에 이릅니다. 물가상승률은 안정적인 수준이고, 은행부문 건전성도 괜찮습니다.
최근 링깃화 변동성이 커진 것은 국내 요인과 국제 요인이 둘 다 작동한 것입니다. 때때로 시장은 비 경제적인 요인에 의해 움직이기도 합니다. 그럴 때 중요한 것은 한 나라의 회복력입니다. 나는 이 모든 것이 '회복력을 다지는(building resilience)의 문제'라고 수없이 강조해 왔습니다.
회복력을 다진다는 것은 취약한 부분들을 찾아내어 충격을 흡수하고 조정할 수 있는 대응 역량을 갖춘다는 말입니다. 특정한 구체적인 정책수단이 있을 수도 있지만 그런 것은 일시적인 대책 밖에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강화해야 하는 것은 경제와 금융구조의 토대입니다.”
▶말레이시아 중앙은행은 아시아 외환위기 당시 기준금리를 5%포인트 이상 올리라는 압력을 받았지만 하지 않았습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는 금리를 낮춰서 위기에 대응하는 것이 일반화됐지만, 20년 전엔 그렇지 않았지요.
“외환위기 때 우리는 금리를 안 올렸죠. 왜냐하면 외환시장의 안정성을 되찾는 결과로 이어지리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경제에 심각한 역효과가 날 수도 있다고 봤습니다. 우리는 경제를 지지하기 위해 금리를 도리어 인하했습니다. 그러나 경제 회복세가 빠르게 나타나면서 금리를 다시 올려서 정상화했습니다.”
▶부실기업 구조조정이 지연되는 등 위기 상황에서 금리를 낮추는 정책으로 인한 문제도 있습니다.
“금리가 너무 낮은 수준으로, 너무 오랫동안 지속된다면 역효과가 납니다. (기업 등의) 부채비율이 지나치게 높아지고 과도한 리스크를 추구하는 경향이 생깁니다. 자산가격이 상승하고 경제 내 자원 배분을 왜곡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습니다. 금리정책은 다른 거시건전성 정책 등과 함께 보강되어야 합니다.”
▶외환위기와 금융위기를 통해 얻게 된 가장 중요한 교훈이 무엇이었습니까.
“가장 중요한 교훈은 위기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회복력을 갖춰야 한다는 것이죠. 위기는 언제든지 재발할 수 있습니다. 회복력을 갖추는 것은 한 국가가 위기시에 금융시스템과 경제가 받게 될 충격을 최소화한다는 뜻입니다. 간과하고 넘어갔다가 위기 시에 리스크의 원인이 될 수 있는 주요 취약부문을 찾아내야 합니다.
두 번째 교훈은 국가적으로 리스크를 관리감독할 수 있는 역량을 강화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금융시스템과 경제를 위협하는 요인을 조기에 찾아내고 선제적 대응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죠.
세 번째는 특정 수단에 의존하거나 단편적으로 대응하지 말고 종합적으로 대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부실해진 기관만 다루는 메커니즘으로는 안 되고 살릴 수 있는 채무자들까지 고려해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압류 및 부도사태가 퍼져나가는 것을 막을 수 있습니다.
네 번째, 좋은 시기에 (위기의) 버퍼를 갖춰야 합니다. 다섯 번째는 공공부문의 여러 기관이 위기에 잘 공조 대응하기 위한 거버넌스 체제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위기에 대응할 수 있는 태세를 갖춰야 하고요.
마지막으로, 아시아 지역 전체가 위기에 대응할 수 있는 협력체제를 구축함으로써 아시아 지역의 위기 대응력은 향상되었습니다. 이미 그 효과를 보고 있죠. 아시아는 10년 전 금융위기에서 미국이나 유럽보다 더 강한 회복력을 과시했습니다.”
▶같은 외환위기 상황에서 한국의 대응방식은 말레이시아와 정 반대였습니다. 왜 이런 대응 방식의 차이가 생겼다고 생각하십니까.
“금융위기의 상황은 나라마다 다르고 위기의 사이클에 따라 제반 조건도 계속 변합니다. 그러나 이미 상황이 어렵고 매우 불안정한 시기에 고강도의 개혁을 도입하고, 무질서하게 구조조정을 하는 것은 안정성을 되찾고 성장을 회복할 가능성을 떨어뜨리는 조치입니다. 필요한 것은 질서 잡힌 조치를 위한 안정된 메커니즘이죠.
(위기 시에) 강력한 조치를 취하고 극심한 고통을 겪느냐, 점진주의와 연속적인 변화를 채택하느냐 여부는 그 나라의 선택의 문제입니다. 둘 다 제각기 성과를 낼 수 있습니다. 양쪽은 경제가 치러야 할 비용이 다르죠. 나는 연속적인 개혁을 통한 점진주의를 선호합니다.
위기 상황은 혼란 속에서 이미 여러 조건이 불안정한 상태입니다. 그렇지만 IMF (구제금융) 프로그램을 받은 나라들은 다른 선택을 할 여지가 없습니다. 또 이런 (IMF가 권고한) 정책을 적용하지 않은 나라들은 국제 사회에서 강한 비판을 받습니다. 아시아 외환위기 때 우리는 아주 고통스러웠죠. 말레이시아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평가하기에 가장 적합한 결과를 낼 정책을 고수했습니다.”
▶1997~1998년 외환위기 당시 한국인으로서 정책 결정자였다면 어떻게 판단했을 것 같습니까.
“(IMF와 같은) 국제기구를 포함한 국제사회와 금융시장, 그리고 신용평가회사들은 (정책적) 실수와 실패를 규율해야만 (좋은) 결과를 낸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또 도덕적 해이를 우려하죠.
그러나 그만큼 중요한 문제는, 그래서 성장과 안정이라는 최종 결과를 달성할 수 있느냐의 문제입니다. 한 나라에 대한 정책 솔루션을 내놓기 위해서는 그 나라가 처한 독특한 상황을 이해해야 합니다.
나는 일반적으로 유동성을 제공하고 성장촉진 수단을 도입해서 당면한 리스크를 해소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이 기간 동안 점진적으로 구조적인 조정과 개혁을 하고, 정책 선택의 책임을 가져가려 합니다.
이런 책임은 한 나라에 특정한 정책을 도입하는 (IMF와 같은) 외부 기구에 대해서도 적용돼야 합니다. 잘못된 정책을 써 놓고 그냥 넘어가려고 해서는 안 되죠. 그렇게 해야만 가장 나은 정책적 결과를 가져올 가능성을 높일 수 있으니까요.”
▶최근 일부 IMF 이코노미스트들은 그리스에 대한 구제금융 과정이 잘못됐다고 지적하거나, 신자유주의적 조치가 적절치 않다고 주장하는 등 달라지는 분위기입니다. 이들의 시각에 동의하십니까?
“(그리스의 경우처럼) 재정 문제를 해결해야 할 때는 채무조정 프로그램이 함께 제공돼야 합니다. 동시에 성장을 촉진하기 위한 수단들이 적용돼야 하죠. (부채 등이) 과도하다거나 (정책적인) 실수가 있었다고 해서 국가를 벌하는 것은 건설적인 일이 아닙니다. 규율을 세우고 좋은 거버넌스와 책임성을 강조하기 위해선 다른 수단들이 존재합니다.
그리스의 경우, IMF 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유럽 공동체와그리스 본인들이 문제에 대응하기 위해 어떤 수단을 적용할지에 대해 합의해야 하는 상황이죠.”
▶아시아 경영대학원(ASB)의 이사회 공동 의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ASB에 대해 간략히 한국 독자들에게 소개해 주신다면.
“2015년 출범한 ASB는 말레이시아 중앙은행이 MIT 슬론 경영대학원과 협력해 설립한 20개월 과정의 MBA 프로그램입니다. 가장 차별화되는 점은 아시아에서 비즈니스를 하기 위한 도구를 제공하면서도 MIT 슬론의 이론적인 배경과 분석 도구, 철저한 분위기를 고스란히 가지고 있다는 점이지요. 실제 비즈니스 과정에서 맞닥뜨리는 문제를 해결하도록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입니다. 아시아 전 지역의 기업들을 겨냥하고 있습니다. 혁신과 기업가정신, 공급사슬관리 등의 영역에서 MIT 슬론이 가진 강점도 가져왔습니다. 개혁적이고 신흥국, 특히 아시아 지역에 대한 이해를 갖춘 미래 지도자를 양성하고자 합니다.”
정리=이상은 기자 selee@hankyung.com
지난 20년간 말레이시아 통화 및 경제정책의 핵심 결정자였던 제티 아크타르 아지즈 전 말레이시아 중앙은행 총재(사진)는 지난달 말 한국경제신문과의 이메일 인터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경제의 ‘회복력’을 다져놓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제티 전 총재는 외환위기 당시 말레이시아 중앙은행인 뱅크네가라말레이시아의 수석 이코노미스트이자 총재 대리로 일했으며 부총재를 거쳐 2000년 5월 첫 여성 중앙은행 총재로 발탁돼 지난해 4월까지 장기간 통화정책을 총괄했다.
말레이시아는 외환위기 때 한국과 정반대 접근법을 취했다. 국제통화기금(IMF) 권고를 무시하고 강력한 자본통제 조치와 고정환율제 도입을 결정했다. 이후 말레이시아 경제는 한국처럼 회복됐고, 이는 한국 내에서 여전히 IMF 처방이 틀렸다는 주장의 근거로 사용되고 있다.
제티 전 총재는 이 문제에 관해 말레이시아의 접근법이 정당했다고 옹호했다. 또 “위기 시 (한국처럼) 고강도 (개혁)정책을 쓸 것이냐, 점진적으로 변화를 이끌어낼 것이냐는 각국의 선택 문제며 해당 경제가 치러야 할 비용의 문제”라며 “나는 연속적인 개혁작업을 통한 점진적 변화 쪽을 선호한다”고 말했다.
그는 “(IMF 같은) 국제기구나 금융시장, 신용평가회사는 (각국 정부의) 잘못된 판단이나 실패를 규율하려 하고 도덕적 해이를 우려하지만 성장과 안정이라는 최종 결과를 끌어내는 것도 중요한 과제”라고 역설했다.
IMF에 대해서는 “위기 시 모든 조건이 불안정하지만 IMF 구제금융 프로그램은 각국에 선택의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며 여전히 비판적인 시각을 유지했다. “책임 소재를 따지는 게 최선의 정책 결정을 끌어낸다면 각국 정부뿐만 아니라 그런 외부기관도 자신들의 판단에 책임을 져야 하는 것 아니냐”고 날을 세웠다.
그는 외환위기와 금융위기를 통해 얻은 교훈으로 “위기는 언제든 다시 일어날 수 있으며 금융시스템과 경제 충격을 최소화하기 위해 취약부문 점검을 강화해야 한다는 점”을 첫손에 꼽았다. 또 “국가적인 리스크 관리 역량을 확보해 선제적 조치를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제티 전 총재는 위기 상황에서 “위험에 처한 금융회사에만 도움을 줄 것이 아니라 채무자에도 손을 내밀어 부도사태가 퍼져나가는 것을 방지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 모든 것은 특히 “(위기가 오기 전) 좋은 시절에 대비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말레이시아 중앙은행과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 슬론경영대학원이 2015년 공동 설립한 아시아경영대학원(ASB) 이사회 의장 및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고문으로 일하고 있다.
다음은 제티 전 총재와의 일문일답.
▶외환위기 당시 말레이시아는 한국과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대응했습니다. 당시 중앙은행 수석 이코노미스트로서 여러 선택지를 검토했을 텐데, IMF 같은 서구 기관 및 이코노미스트들의 견해와 180도 다른 방법을 택한 것은 매우 이례적입니다. 그런 결정을 뒷받침할 만한 데이터나 신념이 있었습니까.
“그 시기는 상당히 도전적인 때였습니다. 여러 정책 선택지가 제안됐지만 말레이시아는 우리가 달성하고자 하는 목표에 집중했습니다. 그 목표는 금융시장 특히 외환시장의 안정성을 되찾는 것과 금융기관 대출을 재개하는 것, 경제성장을 회복하는 것이었습니다. 종합적인 정책 묶음이 요구됐지요. 하나의 특별한 정책에 의존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초기 결정은 환율을 전략적 시장개입을 통해 점진적으로 조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특정한 환율 수준을 방어하기 위해 노력하지는 않았고, 그래서 말레이시아 링깃화 가치는 갑자기 떨어지지 않고 점진적으로 내려갔습니다. 그 덕분에 외환보유액도 격감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해외의 투기적인 행동에 대해 이렇게 대응한 지 1년이 지나자 이것이 결코 끝나지 않을 것처럼 보이게 됐죠. 그래서 조심스럽게 링깃화 가치가 무의미한 수준까지 떨어지는 (환율의) 티핑 포인트에 이를 가능성을 평가했습니다. 우리 주변국가에서 그런 상황이 발생하는 것을 봤고요. 자본 통제 수단이 고려되던 시점이었습니다. 3개월간 논의가 이뤄졌습니다. 최종적으로 도입된 수단은 기업활동이나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 투기적인 활동을 겨냥했습니다.
두 번째 도입된 정책수단은 압박을 받고 있는 금융기관을 다루기 위한 기구를 설립하는 것이었습니다. 구제금융은 아니었고, 1차적으로 책임이 있는 금융기관이 손실을 감내하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대기업, 중소기업, 가계에 대한 부채 구조조정으로 더 강화됐습니다. 이같은 수단을 도입한 지 6개월만에 말레이시아 경제는 'V자' 형태의 회복을 할 수 있었습니다.”
▶다른 아시아 국가와 달리 말레이시아는 외환위기 당시 링깃화 가치를 미국 달러에 연동(페그)시켰고, 페그제를 오랫동안 유지했습니다. 그 선택이 최선이었다고 지금도 생각하나요.
“자본통제 조치를 도입한 바로 다음날 말레이시아 링깃화는 달러당 4.2링깃에서 3.8링깃으로 10% 절상됐고 그 수준에서 고정환율이 결정됐습니다. 이 조치는 금융시장의 안정을 찾아줬고, 기업인들에게 확실성과 예측성을 제공했죠. 또 다른 정책들이 효과적으로 적용될 수 있도록 하는 기반이 되어주기도 했습니다.
말레이시아가 1년 후 자본통제 조치를 해제했을 때도 고정환율 제도는 2005년 7월까지 지속됐습니다. 외환시장이 효율적으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많은 전제조건이 필요했습니다. 국내 금융사들의 체질이 강화돼야 했고, 채권시장도 발전해야 했으며 시장에서 금리가 결정될 수 있도록 여러 금융개혁도 이뤄져야 했습니다. 중앙은행의 감독 역량이 강화됐고 관련 법률 등도 정비됐습니다. 또 우리의 외환보유액을 더 늘릴 기회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이런 조치는 전체 솔루션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지요. 이를 통해 안정성을 회복하고 다른 정책들이 효과적으로 작동하는 환경이 마련됐고, 그렇지 않았더라면 그렇게 강한 경제회복은 어려웠을 것입니다.(주: 인도네시아의 경제성장률은 1998년 -7.36%(세계은행 기준)에서 이듬해 6.14%, 2000년 8.86%를 기록했다.)”
▶고정환율제에서 변동환율제로 돌아간 후 말레이시아 링깃화 가치는 지난 수년간 상당한 변동성을 보였습니다. 시장의 자연스러운 움직임으로 보십니까, 아니면 뭔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말레이시아는 연 5%대 경제성장률을 경험하고 있고 경상수지 흑자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외환보유액도 현재 1000억달러에 이릅니다. 물가상승률은 안정적인 수준이고, 은행부문 건전성도 괜찮습니다.
최근 링깃화 변동성이 커진 것은 국내 요인과 국제 요인이 둘 다 작동한 것입니다. 때때로 시장은 비 경제적인 요인에 의해 움직이기도 합니다. 그럴 때 중요한 것은 한 나라의 회복력입니다. 나는 이 모든 것이 '회복력을 다지는(building resilience)의 문제'라고 수없이 강조해 왔습니다.
회복력을 다진다는 것은 취약한 부분들을 찾아내어 충격을 흡수하고 조정할 수 있는 대응 역량을 갖춘다는 말입니다. 특정한 구체적인 정책수단이 있을 수도 있지만 그런 것은 일시적인 대책 밖에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강화해야 하는 것은 경제와 금융구조의 토대입니다.”
▶말레이시아 중앙은행은 아시아 외환위기 당시 기준금리를 5%포인트 이상 올리라는 압력을 받았지만 하지 않았습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는 금리를 낮춰서 위기에 대응하는 것이 일반화됐지만, 20년 전엔 그렇지 않았지요.
“외환위기 때 우리는 금리를 안 올렸죠. 왜냐하면 외환시장의 안정성을 되찾는 결과로 이어지리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경제에 심각한 역효과가 날 수도 있다고 봤습니다. 우리는 경제를 지지하기 위해 금리를 도리어 인하했습니다. 그러나 경제 회복세가 빠르게 나타나면서 금리를 다시 올려서 정상화했습니다.”
▶부실기업 구조조정이 지연되는 등 위기 상황에서 금리를 낮추는 정책으로 인한 문제도 있습니다.
“금리가 너무 낮은 수준으로, 너무 오랫동안 지속된다면 역효과가 납니다. (기업 등의) 부채비율이 지나치게 높아지고 과도한 리스크를 추구하는 경향이 생깁니다. 자산가격이 상승하고 경제 내 자원 배분을 왜곡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습니다. 금리정책은 다른 거시건전성 정책 등과 함께 보강되어야 합니다.”
▶외환위기와 금융위기를 통해 얻게 된 가장 중요한 교훈이 무엇이었습니까.
“가장 중요한 교훈은 위기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회복력을 갖춰야 한다는 것이죠. 위기는 언제든지 재발할 수 있습니다. 회복력을 갖추는 것은 한 국가가 위기시에 금융시스템과 경제가 받게 될 충격을 최소화한다는 뜻입니다. 간과하고 넘어갔다가 위기 시에 리스크의 원인이 될 수 있는 주요 취약부문을 찾아내야 합니다.
두 번째 교훈은 국가적으로 리스크를 관리감독할 수 있는 역량을 강화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금융시스템과 경제를 위협하는 요인을 조기에 찾아내고 선제적 대응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죠.
세 번째는 특정 수단에 의존하거나 단편적으로 대응하지 말고 종합적으로 대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부실해진 기관만 다루는 메커니즘으로는 안 되고 살릴 수 있는 채무자들까지 고려해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압류 및 부도사태가 퍼져나가는 것을 막을 수 있습니다.
네 번째, 좋은 시기에 (위기의) 버퍼를 갖춰야 합니다. 다섯 번째는 공공부문의 여러 기관이 위기에 잘 공조 대응하기 위한 거버넌스 체제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위기에 대응할 수 있는 태세를 갖춰야 하고요.
마지막으로, 아시아 지역 전체가 위기에 대응할 수 있는 협력체제를 구축함으로써 아시아 지역의 위기 대응력은 향상되었습니다. 이미 그 효과를 보고 있죠. 아시아는 10년 전 금융위기에서 미국이나 유럽보다 더 강한 회복력을 과시했습니다.”
▶같은 외환위기 상황에서 한국의 대응방식은 말레이시아와 정 반대였습니다. 왜 이런 대응 방식의 차이가 생겼다고 생각하십니까.
“금융위기의 상황은 나라마다 다르고 위기의 사이클에 따라 제반 조건도 계속 변합니다. 그러나 이미 상황이 어렵고 매우 불안정한 시기에 고강도의 개혁을 도입하고, 무질서하게 구조조정을 하는 것은 안정성을 되찾고 성장을 회복할 가능성을 떨어뜨리는 조치입니다. 필요한 것은 질서 잡힌 조치를 위한 안정된 메커니즘이죠.
(위기 시에) 강력한 조치를 취하고 극심한 고통을 겪느냐, 점진주의와 연속적인 변화를 채택하느냐 여부는 그 나라의 선택의 문제입니다. 둘 다 제각기 성과를 낼 수 있습니다. 양쪽은 경제가 치러야 할 비용이 다르죠. 나는 연속적인 개혁을 통한 점진주의를 선호합니다.
위기 상황은 혼란 속에서 이미 여러 조건이 불안정한 상태입니다. 그렇지만 IMF (구제금융) 프로그램을 받은 나라들은 다른 선택을 할 여지가 없습니다. 또 이런 (IMF가 권고한) 정책을 적용하지 않은 나라들은 국제 사회에서 강한 비판을 받습니다. 아시아 외환위기 때 우리는 아주 고통스러웠죠. 말레이시아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평가하기에 가장 적합한 결과를 낼 정책을 고수했습니다.”
▶1997~1998년 외환위기 당시 한국인으로서 정책 결정자였다면 어떻게 판단했을 것 같습니까.
“(IMF와 같은) 국제기구를 포함한 국제사회와 금융시장, 그리고 신용평가회사들은 (정책적) 실수와 실패를 규율해야만 (좋은) 결과를 낸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또 도덕적 해이를 우려하죠.
그러나 그만큼 중요한 문제는, 그래서 성장과 안정이라는 최종 결과를 달성할 수 있느냐의 문제입니다. 한 나라에 대한 정책 솔루션을 내놓기 위해서는 그 나라가 처한 독특한 상황을 이해해야 합니다.
나는 일반적으로 유동성을 제공하고 성장촉진 수단을 도입해서 당면한 리스크를 해소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이 기간 동안 점진적으로 구조적인 조정과 개혁을 하고, 정책 선택의 책임을 가져가려 합니다.
이런 책임은 한 나라에 특정한 정책을 도입하는 (IMF와 같은) 외부 기구에 대해서도 적용돼야 합니다. 잘못된 정책을 써 놓고 그냥 넘어가려고 해서는 안 되죠. 그렇게 해야만 가장 나은 정책적 결과를 가져올 가능성을 높일 수 있으니까요.”
▶최근 일부 IMF 이코노미스트들은 그리스에 대한 구제금융 과정이 잘못됐다고 지적하거나, 신자유주의적 조치가 적절치 않다고 주장하는 등 달라지는 분위기입니다. 이들의 시각에 동의하십니까?
“(그리스의 경우처럼) 재정 문제를 해결해야 할 때는 채무조정 프로그램이 함께 제공돼야 합니다. 동시에 성장을 촉진하기 위한 수단들이 적용돼야 하죠. (부채 등이) 과도하다거나 (정책적인) 실수가 있었다고 해서 국가를 벌하는 것은 건설적인 일이 아닙니다. 규율을 세우고 좋은 거버넌스와 책임성을 강조하기 위해선 다른 수단들이 존재합니다.
그리스의 경우, IMF 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유럽 공동체와그리스 본인들이 문제에 대응하기 위해 어떤 수단을 적용할지에 대해 합의해야 하는 상황이죠.”
▶아시아 경영대학원(ASB)의 이사회 공동 의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ASB에 대해 간략히 한국 독자들에게 소개해 주신다면.
“2015년 출범한 ASB는 말레이시아 중앙은행이 MIT 슬론 경영대학원과 협력해 설립한 20개월 과정의 MBA 프로그램입니다. 가장 차별화되는 점은 아시아에서 비즈니스를 하기 위한 도구를 제공하면서도 MIT 슬론의 이론적인 배경과 분석 도구, 철저한 분위기를 고스란히 가지고 있다는 점이지요. 실제 비즈니스 과정에서 맞닥뜨리는 문제를 해결하도록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입니다. 아시아 전 지역의 기업들을 겨냥하고 있습니다. 혁신과 기업가정신, 공급사슬관리 등의 영역에서 MIT 슬론이 가진 강점도 가져왔습니다. 개혁적이고 신흥국, 특히 아시아 지역에 대한 이해를 갖춘 미래 지도자를 양성하고자 합니다.”
정리=이상은 기자 se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