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포럼] 전통산업 잣대에 가로막힌 블록체인 경쟁력
최근 비트코인의 기반 기술인 블록체인에 관한 연구를 하다가 좋은 아이디어가 생겨 이를 기반으로 벤처 창업까지 생각하며 기술개발을 하고 있다. 물론 연구실 대학원생들은 창업하는 회사의 주주가 될 것이다. 이에 고무돼 연구실 학생들은 공부하란 얘기를 안 해도 연구개발 열기가 뜨겁다. 착실하게 창업 준비를 하던 중 한 박사과정 학생이 찾아와 하는 얘기가 굳이 창업해 벤처투자사로부터 노예 계약이라 불릴 정도의 불리한 조건으로 계약하거나, 최소한 2~3년 이상의 준비 기간을 거쳐 상장하지 않아도 회사의 자금을 빠른 시간에 확보할 방법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 학생이 제안한 방법은 ICO(initial coin offering·가상화폐 공개)였다.

ICO는 기술을 보유한 벤처기업이 인터넷상에서 유통될 수 있는 가상화폐(코인)를 발행해 그 화폐를 구매하는 사람들로부터 자금을 충당하고, 그 화폐를 구매한 사람은 기업의 성장과 함께 화폐 가치가 높아짐으로써 이익을 취하는 자금 조달 방법이다. 이는 기존 자본시장이 기업은 IPO(initial public offering·기업공개)를 통해 주식을 발행해 자금을 모으고 투자자는 주식 가치 상승을 기대하며 주식을 구매하는 방식과 비슷하다. 차이점은 전자는 인터넷상에서 발행자와 구매자 간 거래가 직접 이뤄진다는 것이고, 후자는 증권거래소라는 중앙 기관을 통해 거래가 이뤄진다는 것이다.

중앙에서 컨트롤하는 기관 없이 자본시장이 형성된다고 해서 혹자는 ICO를 자본시장의 민주화라고 부르고 있다. 지난 6월 기준 세계적으로 ICO를 통한 벤처기업 투자 규모(5억5000만달러)가 벤처캐피털을 통한 투자(3억달러)를 앞지르는 현상마저 보인다. 올 들어 8월까지 세계적으로 92개의 ICO가 이뤄졌으며, 이를 통해 총 12억5000만달러의 자금이 벤처기업에 유입됐다. 프로토콜랩스란 미국 벤처기업은 파일코인이란 이름으로 8월 ICO를 통해 2억5700만달러(약 2893억원)의 자금을 조달했다. 국내에서는 블록체인OS란 기업이 5월 초 1200만달러를 조달했고, 더루프라는 벤처기업은 8월 ICO를 통해 233억원을 모금했다.

ICO는 그 대상이 글로벌 마켓이란 점에서도 매력적이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지난주 금융위원회는 “ICO를 앞세워 투자를 유도하는 유사수신 등 사기 위험 증가, 투기 수요 증가로 인한 시장 과열 및 소비자 피해 확대 등 부작용이 우려되는 상황”이라며 ICO를 전면 금지한다고 발표했다. 한 정부 관계자는 “기술력 있는 정상적인 업체라면 ICO가 아니라 주식공모나 크라우드펀딩과 같은 투명한 방법을 통해 얼마든지 자금 모집이 가능하다”는 언급도 덧붙였다. 신기술 기반의 혁신 벤처기업이 전통산업 기준으로 기업을 평가하고 가치를 산정하는 관행 속에서 얼마나 힘들게 사업하는지 많이 목격한 필자로서는, 그리고 이런 사업을 준비하는 예비 창업가로서 정부 관계자의 이런 말은 과연 현장을 이해하고 하는 것인지 실망스럽기 그지없다.

최근 정부는 기업이 초기에 수익이 나지 않더라도 기술가치를 평가해 상장시킨다는 소위 ‘테슬라 상장’ 제도를 만들었다. 그러나 작년 한 해 과연 몇 개의 기업이 이 제도를 통해 상장됐는가. 크라우드펀딩 제도 역시 광고도 제대로 못하게 하고 투자금액도 250만원으로 제한하고 있다. 투자자를 보호한다는 명분은 이해하지만 그것이 되레 투자해 이득을 볼 기회마저 빼앗는 것은 아닐까. 불확실하고 투명하지 못한 부분이 있다면 제도를 보완하면 될 일이다.

4차 산업혁명이란 혁신의 바람이 불고 있는 이 시대에 새로운 기술과 방법이 나오면 일단 우려하고 시장질서 확립이라는 명분 아래 싹을 자르고 제한하고 하는 일들이 계속되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 아닌가. 4차 산업혁명 시대를 선도하려면 신기술과 새로운 시장을 먼저 만들고 적용해 앞선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무조건 금지하고 제한하는 현실 속에서는 4차 산업혁명을 선도할 수 없다. 새로운 자금조달 방법을 찾았다고 외치던 학생이 실망하는 모습을 보며 우리가 이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주고 있는 것인지 생각해본다. 4차 산업혁명은 정부가 개입할수록 멀어져가는 신기루 같은 존재는 아닌가.

박수용 < 서강대 교수·컴퓨터공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