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날로그의 재발견] (2) "서점은 더이상 책을 파는 곳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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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국내 1위 서점 교보문고는 2015년 11월17일 광화문점에 대형 서가 12개를 걷어내고 방문객들이 편히 앉아 책을 읽을 수 있도록 큰 테이블과 50개의 의자를 설치했다. 교보문고 광화문점 방문객 수는 이 테이블을 들여놓은 이후 월평균 13.2% 늘었다.
# 2. 복합쇼핑몰인 신세계 스타필드 코엑스점은 지난 5월31일 쇼핑몰 한가운데에 책 5만권과 잡지 600종을 구비한 대형 도서관을 만든 뒤 소비자들이 자유롭게 책을 읽을 수 있도록 했다. 스타필드에 따르면 이 도서관이 문을 연 뒤 코엑스점에 입점한 매장의 평균 방문객 수는 약 10% 증가했다.
# 3. 지난 7월15일 부산 기장군에 호텔을 연 전 세계적 호텔 체인 브랜드 힐튼은 지하 1층에 핵심 수익원인 식음료 객장 대신 책 2만권과 아이들이 놀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다. 기장지역 주민들과 부산 시민들은 이곳을 자유롭게 드나들었다. 힐튼부산은 이곳을 찾은 방문객 중 약 35%가 실제 투숙까지 이어진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비효율'의 대명사로 낙인 찍혔던 오프라인 공간이 조용한 혁명을 만들어 내고 있다. 매출 감소로 어려움을 겪던 오프라인 서점이 공간을 탈바꿈시켜 방문객을 늘리는가 하면, 삼성동 노른자위 땅 한복판에 수익성이 전혀 없는 도서관을 만들어 새로운 매출을 끌어내는 쇼핑몰도 있다. 또 명품 매장과 카지노, 식음료 객장이 들어서야 할 고급 호텔 지하 1층에 지역 주민들이 부담 없이 방문할 수 있는 서점과 어린이 놀이방을 설치한 호텔도 등장했다. '공간=돈'으로 인식하고 있는 오프라인 업체들이 이처럼 '비효율'에 나서는 이유는 왜일까.
◆"서점은 더 이상 책을 파는 곳이 아니다"
2015년 10월 교보문고 광화문점이 대형 서가 12개를 걷어내고 그 자리에 책 읽기에 좋은 큰 테이블과 의자를 설치했을 때 출판업계에서는 "가뜩이나 어려운 출판시장에 국내 1등 서점인 교보문고가 마침내 사망선고를 내리려고 작정을 했다"는 걱정이 봇물처럼 쏟아졌다. 소비자들이 자신이 원하는 책을 정확하게 알고 빠르게 그 책을 집어든 뒤 계산대로 향하는 소매점들의 '이상적인' 목표와 정반대의 결과를 가져올 것이란 우려 때문이었다.
테이블과 의자를 설치하면 소비자들은 서점에 들어와 "저 읽기 좋은 테이블에 구매하지도 않을 책을 펴놓고 시간을 보낼 것이 뻔하다"는 것이 출판업계의 대체적인 반응이었다. 게다가 그 테이블은 뉴질랜드 늪지대에 묻혀 4만6000년이나 자연 보존 상태로 있었던 카우리 소나무로 만들어져 관심도도 높았다.
한 출판사 대표는 "한 권이라도 더 팔아야 할 상황에서 방문객들이 실컷 책을 읽은 뒤 다시 제자리에 꽂고 빈손으로 돌아가는 '최악의 상황'이 빚어질 것이란 불안한 전망이 쏟아졌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출판업계의 이 같은 예상은 빗나갔다. 괜히 책만 더럽힌 뒤 빈손으로 떠나는, 서점 입장에선 반갑지 않은 소비자도 있었지만 그들 대부분은 꼭 책이 아니더라도 음반, 노트, 만년필, 이어폰, 굿즈(테마 상품) 등을 손에 들고 나가기 시작했다. 또 이들은 책을 읽다가 목이 마르면 서점 안에 있는 카페에서 커피를 사 마시기도 하고 배가 고프면 역시 서점 안에 있는 음식점에서 간단한 식사를 해결하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서점 입장에선 그 '반갑지 않은' 소비자조차 잠재적 고객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책 자체가 상품이기도 하지만 같은 공간 안에 있는 다른 매대(교보문고 광화문점 안에는 책을 판매하는 공간 외에도 음반, 사무용품, 전자제품 판매장, 카페 등 여러 부대시설이 있다)로 방문객을 안내하는 매개체처럼 활용됐다.
점점 책을 읽지 않는 사회적인 분위기를 어떻게 할 수 없다면 공간을 활용해 '유인 판매 효과'를 거두는 방식으로 이 서점은 진화하기 시작했다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교보문고가 이처럼 변신을 시도한 계기는 국내 출판 시장이 점점 불황을 겪으면서다. 2012년 5556억원이던 교보문고 매출액은 2015년 5234억원으로 5.8% 감소했다. 교보문고가 줄어든 금액의 규모보다 더 심각하다고 생각한 것은 매출이 반등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교보문고 신점포개발팀은 2014~2015년에 걸쳐 일본 츠타야, 대만 청핀, 미국 아마존 오프라인 서점 등 '공간 실험'을 하고 있는 전 세계 유명 서점을 돌며 벤치마킹 대상으로 삼고 변신에 돌입했다.
진영균 교보문고 브랜드관리팀 담당은 "책 판매가 줄어들고 있다는 것을 넘어 사람들이 아예 서점에 오지 않고 있다는 게 더 큰 문제로 인식됐다"며 "과거에는 서점이 책을 파는 공간이었다면 이제는 그 자체로 매력적인 공간이 돼 소비자들의 발길을 끌고 오래 머무르도록 해야 한다는 게 변화의 출발점"이라고 말했다.
이 테이블을 설치한지 1년 되던 지난해 교보문고는 5255억원의 매출을 기록해 반전을 맞았다. 진영균 담당은 "큰 규모의 액수는 아니지만 공간 실험을 한 이후 4년 만에 매출이 반등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며 "광화문점을 방문하는 소비자들의 선호도도 올라가는 등 긍정적인 방향으로 바뀌고 있다"고 설명했다.
실제 교보문고가 테이블 설치 및 인테리어를 바꾼 리뉴얼을 실시한 뒤 소비자 481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전체의 74%가 '리뉴얼 이후 광화문점에 대한 선호도가 높아졌다'고 답했다. 47%의 응답자는 '서점 이용시간이 과거보다 늘었다'고 했고, 79%는 '리뉴얼이 구매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답했다.
리뉴얼이 책 구매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 이유에 대해선 '공간이 늘어 책을 접할 기회가 많아졌기 때문', '쾌적한 환경이 확보됐기 때문' 순으로 나타났다. 반면 전체의 3% 응답자만이 '서가가 줄어 예전보다 좋지 않다', '방문객이 많아져 붐빈다' 등의 이유로 부정적인 답변을 내놨다.
◆글로벌 호텔의 '신의 한수'는 도서관 지난 7월 부산 기장군에 문을 연 힐튼부산 호텔 지하 1층에는 낯선 풍경이 연출됐다. 전 세계적으로 14개의 계열 브랜드와 4900개의 호텔을 소유한 이 최고급 호텔 브랜드는 보통 레드카펫이 깔려 있는 고급 레스토랑과 명품 매장, 스파 등 호텔 핵심 수익원이 되는 시설을 지하 1층에 둔다.
힐튼부산 지하 1층에는 명품 매장 대신 2만여권의 책과 아이들이 놀 수 있는 1652㎡(약 500평)의 공간이 한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다. 투숙객은 물론이고 기장지역 주민들과 부산시민들이 자유롭게 이곳을 방문해 독서를 하고, 커피를 마시고, 대화를 나눌 수 있도록 꾸몄다.
호텔을 지어 힐튼에 위탁경영을 맡긴 뒤 이 같은 아이디어를 낸 이만규 에머슨퍼시픽 대표는 "다소 부담스러울 수 있는 호텔의 심리적 문턱을 낮추고 투숙객들과 지역주민들이 부담 없이 쉴 수 있는 공간이 무엇일까 고민한 끝에 서점(이름 '이터널 저니')을 만들기로 한 것"이라며 "앞으로 이 공간이 호텔 내에서 가장 중요한 곳이 될 것"이라고 소개했다.
호텔업계에선 호텔과 다소 어울리지 않는 이 공간을 오히려 투숙율을 높이기 위한 힐튼부산의 '신의 한수'로 평가하고 있다. 한 호텔업계 관계자는 "최고급 시설을 자랑함에도 불구하고 힐튼부산의 단점이라면 부산 시내 및 공항과 거리가 멀어 접근성이 떨어진다는 것"이라며 "기장 지역이 해운대 등에 비해 개발이 덜 돼 인접한 상업 시설도 전무해 지역 주민들도 발길이 뜸한 곳"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 관계자는 "'이터널 저니'는 마치 6성급 어린이집, 6성급 카페 같은 곳으로 누구나 한번쯤 방문하고 싶은 곳으로 인식되고 있다"며 "부담스러울 정도로 고급스럽고 거리도 멀어 접근성이 떨어지던 곳이 서점을 설치하자 주민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자기 집 드나들 듯 편하게 찾아오고 있다"고 말했다.
'호텔은 가격이 비싸 방문하기 부담스러운 곳'이라는 소비자의 인식을 바꾸고자 한 힐튼부산의 선택은 효과를 보고 있다. 실제 지난 여름 시즌(7~8월) 100%에 가까운 예약률을 기록한 이 호텔은 투숙객의 35%가량이 호텔을 이용하기 전 이터널 저니를 경험한 뒤 투숙까지 이어진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김아현 에머슨퍼시픽 마케팅팀 선임은 "힐튼부산은 가족 단위의 투숙객이 전체의 70%에 달할 정도로 다른 호텔에 비해 상대적으로 아이들을 동반한 고객들이 많다"며 "이터널 저니가 호텔과 소비자간 심리적 거리를 줄이는 효과를 내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고 설명했다.
◆삼성동 쇼핑몰 한복판에 H&M 대신 무료 책방 신세계프라퍼티에서 운영하는 복합쇼핑몰 스타필드 코엑스점은 지난 5월31일 쇼핑몰 한복판(센트럴플라자 중심)에 책 5만권과 잡지 600여종을 비치한 2800㎡(약 850평) 규모의 대형 도서관 '별마당'을 만들었다. 다른 쇼핑몰이라면 'H&M'이나 '유니클로' 같은 최신 유행의 SPA(제조유통일괄) 브랜드나 스마트폰을 판매하는 전자제품 매장 등이 있는 알짜 공간이다.
스타필드 코엑스점은 매주 이곳에 명사를 초청해 특강을 하거나, 클래식을 연주하거나, 탱고 같은 댄스 공연을 연다. 모든 티켓은 무료다. 특별한 공연이 없을 땐 대부분의 소비자들은 이곳에서 책을 읽거나, 잡지를 보거나, 통화를 하거나, 지인을 기다리는 약속 장소로 활용한다.
이곳에서 만난 주부 김현숙 씨(40, 송파구)는 "책으로 둘러싸인 공간에 많은 사람들이 열심히 책을 읽는 분위기가 좋아 아이들을 데리고 자주 온다"며 "복잡한 쇼핑몰 내에서 책도 읽을 수 있고 잠시라도 편하게 있을 수 있는 공간이 생겨 활용도가 높다"고 말했다.
스타필드 코엑스점이 아무런 경영 계획 없이 도서관을 만들어 놓은 것은 아니다. 코엑스몰 특유의 복잡한 구조로 쇼핑의 편의성이 떨어진다는 소비자들의 지적과, 복합쇼핑몰간 경쟁 심화로 점차 분산되고 있는 방문객 규모를 어떻게 하면 늘릴 수 있을까라는 두 가지 고민 끝에 탄생했다.
코엑스몰 한가운데에 눈에 쉽게 띄는 개방형 도서관을 만들어 쇼핑몰 전체의 등대 역할을 맡기는 동시에 쇼핑 이외의 목적으로도 부담 없이 찾을 수 있는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는 것이다.
쇼핑을 목적으로 오는 소비자 외에도 도서관을 찾았다가 우연히 소비를 하는 '잠재적 고객'들이 증가하면서 쇼핑몰 내에 입점한 매장들도 덕을 보고 있다. 스타필드 코엑스점에 따르면 별마당이 들어선 이후 코엑스몰에 입점한 매장들의 일평균 방문객 수는 5% 증가했다. 특히 별마당 근처에 있는 매장들의 경우 이보다 두 배 많은 10% 늘어나는 효과가 있었다.
실제 별마당의 벤치마킹 모델로 알려진 일본의 다케오 시립도서관도 그 지역에서 유사한 역할을 한다. 20만권의 장서가 밖에서 모두 보이도록 설계된 이 도서관은 눈에 잘 띄어 지역의 랜드마크 역할을 하고 있다.
또 커피를 마시면서 독서를 하고 싶어 하는 지역 주민들의 요구를 반영해 도서관 안에 카페를 들여놨고, 요리, 여행, 인문 등 주민들의 라이프 스타일에 영향을 미치는 3가지 테마를 중심으로 서가를 꾸몄다.
다케오 지역 주민 외에도 일본 국민이라면 누구나 무료 입장이 가능해 인구가 불과 5만명에 불과한 소도시에 매년 100만명이 넘는 관광객이 유입되고 있다. 다케오시에 따르면 이 도서관 하나가 지역경제에 이바지 하는 효과가 연간 200억원에 달한다. 보통 폐쇄적으로 운영되는 일본 내 다른 지역 도서관들과 다른 행보로 차별화를 꾀하고 있다.
노정동 한경닷컴 기자 dong2@hankyung.com
# 2. 복합쇼핑몰인 신세계 스타필드 코엑스점은 지난 5월31일 쇼핑몰 한가운데에 책 5만권과 잡지 600종을 구비한 대형 도서관을 만든 뒤 소비자들이 자유롭게 책을 읽을 수 있도록 했다. 스타필드에 따르면 이 도서관이 문을 연 뒤 코엑스점에 입점한 매장의 평균 방문객 수는 약 10% 증가했다.
# 3. 지난 7월15일 부산 기장군에 호텔을 연 전 세계적 호텔 체인 브랜드 힐튼은 지하 1층에 핵심 수익원인 식음료 객장 대신 책 2만권과 아이들이 놀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다. 기장지역 주민들과 부산 시민들은 이곳을 자유롭게 드나들었다. 힐튼부산은 이곳을 찾은 방문객 중 약 35%가 실제 투숙까지 이어진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비효율'의 대명사로 낙인 찍혔던 오프라인 공간이 조용한 혁명을 만들어 내고 있다. 매출 감소로 어려움을 겪던 오프라인 서점이 공간을 탈바꿈시켜 방문객을 늘리는가 하면, 삼성동 노른자위 땅 한복판에 수익성이 전혀 없는 도서관을 만들어 새로운 매출을 끌어내는 쇼핑몰도 있다. 또 명품 매장과 카지노, 식음료 객장이 들어서야 할 고급 호텔 지하 1층에 지역 주민들이 부담 없이 방문할 수 있는 서점과 어린이 놀이방을 설치한 호텔도 등장했다. '공간=돈'으로 인식하고 있는 오프라인 업체들이 이처럼 '비효율'에 나서는 이유는 왜일까.
◆"서점은 더 이상 책을 파는 곳이 아니다"
2015년 10월 교보문고 광화문점이 대형 서가 12개를 걷어내고 그 자리에 책 읽기에 좋은 큰 테이블과 의자를 설치했을 때 출판업계에서는 "가뜩이나 어려운 출판시장에 국내 1등 서점인 교보문고가 마침내 사망선고를 내리려고 작정을 했다"는 걱정이 봇물처럼 쏟아졌다. 소비자들이 자신이 원하는 책을 정확하게 알고 빠르게 그 책을 집어든 뒤 계산대로 향하는 소매점들의 '이상적인' 목표와 정반대의 결과를 가져올 것이란 우려 때문이었다.
테이블과 의자를 설치하면 소비자들은 서점에 들어와 "저 읽기 좋은 테이블에 구매하지도 않을 책을 펴놓고 시간을 보낼 것이 뻔하다"는 것이 출판업계의 대체적인 반응이었다. 게다가 그 테이블은 뉴질랜드 늪지대에 묻혀 4만6000년이나 자연 보존 상태로 있었던 카우리 소나무로 만들어져 관심도도 높았다.
한 출판사 대표는 "한 권이라도 더 팔아야 할 상황에서 방문객들이 실컷 책을 읽은 뒤 다시 제자리에 꽂고 빈손으로 돌아가는 '최악의 상황'이 빚어질 것이란 불안한 전망이 쏟아졌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출판업계의 이 같은 예상은 빗나갔다. 괜히 책만 더럽힌 뒤 빈손으로 떠나는, 서점 입장에선 반갑지 않은 소비자도 있었지만 그들 대부분은 꼭 책이 아니더라도 음반, 노트, 만년필, 이어폰, 굿즈(테마 상품) 등을 손에 들고 나가기 시작했다. 또 이들은 책을 읽다가 목이 마르면 서점 안에 있는 카페에서 커피를 사 마시기도 하고 배가 고프면 역시 서점 안에 있는 음식점에서 간단한 식사를 해결하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서점 입장에선 그 '반갑지 않은' 소비자조차 잠재적 고객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책 자체가 상품이기도 하지만 같은 공간 안에 있는 다른 매대(교보문고 광화문점 안에는 책을 판매하는 공간 외에도 음반, 사무용품, 전자제품 판매장, 카페 등 여러 부대시설이 있다)로 방문객을 안내하는 매개체처럼 활용됐다.
점점 책을 읽지 않는 사회적인 분위기를 어떻게 할 수 없다면 공간을 활용해 '유인 판매 효과'를 거두는 방식으로 이 서점은 진화하기 시작했다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교보문고가 이처럼 변신을 시도한 계기는 국내 출판 시장이 점점 불황을 겪으면서다. 2012년 5556억원이던 교보문고 매출액은 2015년 5234억원으로 5.8% 감소했다. 교보문고가 줄어든 금액의 규모보다 더 심각하다고 생각한 것은 매출이 반등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교보문고 신점포개발팀은 2014~2015년에 걸쳐 일본 츠타야, 대만 청핀, 미국 아마존 오프라인 서점 등 '공간 실험'을 하고 있는 전 세계 유명 서점을 돌며 벤치마킹 대상으로 삼고 변신에 돌입했다.
진영균 교보문고 브랜드관리팀 담당은 "책 판매가 줄어들고 있다는 것을 넘어 사람들이 아예 서점에 오지 않고 있다는 게 더 큰 문제로 인식됐다"며 "과거에는 서점이 책을 파는 공간이었다면 이제는 그 자체로 매력적인 공간이 돼 소비자들의 발길을 끌고 오래 머무르도록 해야 한다는 게 변화의 출발점"이라고 말했다.
이 테이블을 설치한지 1년 되던 지난해 교보문고는 5255억원의 매출을 기록해 반전을 맞았다. 진영균 담당은 "큰 규모의 액수는 아니지만 공간 실험을 한 이후 4년 만에 매출이 반등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며 "광화문점을 방문하는 소비자들의 선호도도 올라가는 등 긍정적인 방향으로 바뀌고 있다"고 설명했다.
실제 교보문고가 테이블 설치 및 인테리어를 바꾼 리뉴얼을 실시한 뒤 소비자 481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전체의 74%가 '리뉴얼 이후 광화문점에 대한 선호도가 높아졌다'고 답했다. 47%의 응답자는 '서점 이용시간이 과거보다 늘었다'고 했고, 79%는 '리뉴얼이 구매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답했다.
리뉴얼이 책 구매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 이유에 대해선 '공간이 늘어 책을 접할 기회가 많아졌기 때문', '쾌적한 환경이 확보됐기 때문' 순으로 나타났다. 반면 전체의 3% 응답자만이 '서가가 줄어 예전보다 좋지 않다', '방문객이 많아져 붐빈다' 등의 이유로 부정적인 답변을 내놨다.
◆글로벌 호텔의 '신의 한수'는 도서관 지난 7월 부산 기장군에 문을 연 힐튼부산 호텔 지하 1층에는 낯선 풍경이 연출됐다. 전 세계적으로 14개의 계열 브랜드와 4900개의 호텔을 소유한 이 최고급 호텔 브랜드는 보통 레드카펫이 깔려 있는 고급 레스토랑과 명품 매장, 스파 등 호텔 핵심 수익원이 되는 시설을 지하 1층에 둔다.
힐튼부산 지하 1층에는 명품 매장 대신 2만여권의 책과 아이들이 놀 수 있는 1652㎡(약 500평)의 공간이 한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다. 투숙객은 물론이고 기장지역 주민들과 부산시민들이 자유롭게 이곳을 방문해 독서를 하고, 커피를 마시고, 대화를 나눌 수 있도록 꾸몄다.
호텔을 지어 힐튼에 위탁경영을 맡긴 뒤 이 같은 아이디어를 낸 이만규 에머슨퍼시픽 대표는 "다소 부담스러울 수 있는 호텔의 심리적 문턱을 낮추고 투숙객들과 지역주민들이 부담 없이 쉴 수 있는 공간이 무엇일까 고민한 끝에 서점(이름 '이터널 저니')을 만들기로 한 것"이라며 "앞으로 이 공간이 호텔 내에서 가장 중요한 곳이 될 것"이라고 소개했다.
호텔업계에선 호텔과 다소 어울리지 않는 이 공간을 오히려 투숙율을 높이기 위한 힐튼부산의 '신의 한수'로 평가하고 있다. 한 호텔업계 관계자는 "최고급 시설을 자랑함에도 불구하고 힐튼부산의 단점이라면 부산 시내 및 공항과 거리가 멀어 접근성이 떨어진다는 것"이라며 "기장 지역이 해운대 등에 비해 개발이 덜 돼 인접한 상업 시설도 전무해 지역 주민들도 발길이 뜸한 곳"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 관계자는 "'이터널 저니'는 마치 6성급 어린이집, 6성급 카페 같은 곳으로 누구나 한번쯤 방문하고 싶은 곳으로 인식되고 있다"며 "부담스러울 정도로 고급스럽고 거리도 멀어 접근성이 떨어지던 곳이 서점을 설치하자 주민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자기 집 드나들 듯 편하게 찾아오고 있다"고 말했다.
'호텔은 가격이 비싸 방문하기 부담스러운 곳'이라는 소비자의 인식을 바꾸고자 한 힐튼부산의 선택은 효과를 보고 있다. 실제 지난 여름 시즌(7~8월) 100%에 가까운 예약률을 기록한 이 호텔은 투숙객의 35%가량이 호텔을 이용하기 전 이터널 저니를 경험한 뒤 투숙까지 이어진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김아현 에머슨퍼시픽 마케팅팀 선임은 "힐튼부산은 가족 단위의 투숙객이 전체의 70%에 달할 정도로 다른 호텔에 비해 상대적으로 아이들을 동반한 고객들이 많다"며 "이터널 저니가 호텔과 소비자간 심리적 거리를 줄이는 효과를 내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고 설명했다.
◆삼성동 쇼핑몰 한복판에 H&M 대신 무료 책방 신세계프라퍼티에서 운영하는 복합쇼핑몰 스타필드 코엑스점은 지난 5월31일 쇼핑몰 한복판(센트럴플라자 중심)에 책 5만권과 잡지 600여종을 비치한 2800㎡(약 850평) 규모의 대형 도서관 '별마당'을 만들었다. 다른 쇼핑몰이라면 'H&M'이나 '유니클로' 같은 최신 유행의 SPA(제조유통일괄) 브랜드나 스마트폰을 판매하는 전자제품 매장 등이 있는 알짜 공간이다.
스타필드 코엑스점은 매주 이곳에 명사를 초청해 특강을 하거나, 클래식을 연주하거나, 탱고 같은 댄스 공연을 연다. 모든 티켓은 무료다. 특별한 공연이 없을 땐 대부분의 소비자들은 이곳에서 책을 읽거나, 잡지를 보거나, 통화를 하거나, 지인을 기다리는 약속 장소로 활용한다.
이곳에서 만난 주부 김현숙 씨(40, 송파구)는 "책으로 둘러싸인 공간에 많은 사람들이 열심히 책을 읽는 분위기가 좋아 아이들을 데리고 자주 온다"며 "복잡한 쇼핑몰 내에서 책도 읽을 수 있고 잠시라도 편하게 있을 수 있는 공간이 생겨 활용도가 높다"고 말했다.
스타필드 코엑스점이 아무런 경영 계획 없이 도서관을 만들어 놓은 것은 아니다. 코엑스몰 특유의 복잡한 구조로 쇼핑의 편의성이 떨어진다는 소비자들의 지적과, 복합쇼핑몰간 경쟁 심화로 점차 분산되고 있는 방문객 규모를 어떻게 하면 늘릴 수 있을까라는 두 가지 고민 끝에 탄생했다.
코엑스몰 한가운데에 눈에 쉽게 띄는 개방형 도서관을 만들어 쇼핑몰 전체의 등대 역할을 맡기는 동시에 쇼핑 이외의 목적으로도 부담 없이 찾을 수 있는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는 것이다.
쇼핑을 목적으로 오는 소비자 외에도 도서관을 찾았다가 우연히 소비를 하는 '잠재적 고객'들이 증가하면서 쇼핑몰 내에 입점한 매장들도 덕을 보고 있다. 스타필드 코엑스점에 따르면 별마당이 들어선 이후 코엑스몰에 입점한 매장들의 일평균 방문객 수는 5% 증가했다. 특히 별마당 근처에 있는 매장들의 경우 이보다 두 배 많은 10% 늘어나는 효과가 있었다.
실제 별마당의 벤치마킹 모델로 알려진 일본의 다케오 시립도서관도 그 지역에서 유사한 역할을 한다. 20만권의 장서가 밖에서 모두 보이도록 설계된 이 도서관은 눈에 잘 띄어 지역의 랜드마크 역할을 하고 있다.
또 커피를 마시면서 독서를 하고 싶어 하는 지역 주민들의 요구를 반영해 도서관 안에 카페를 들여놨고, 요리, 여행, 인문 등 주민들의 라이프 스타일에 영향을 미치는 3가지 테마를 중심으로 서가를 꾸몄다.
다케오 지역 주민 외에도 일본 국민이라면 누구나 무료 입장이 가능해 인구가 불과 5만명에 불과한 소도시에 매년 100만명이 넘는 관광객이 유입되고 있다. 다케오시에 따르면 이 도서관 하나가 지역경제에 이바지 하는 효과가 연간 200억원에 달한다. 보통 폐쇄적으로 운영되는 일본 내 다른 지역 도서관들과 다른 행보로 차별화를 꾀하고 있다.
노정동 한경닷컴 기자 dong2@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