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날로그의 재발견] (4) CG보다 종이가 좋다…'보드게임'의 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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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우리에게 '게임'이란 곧 디지털 게임을 뜻한다. PC는 물론이고 플레이스테이션을 비롯한 콘솔 게임기의 위용도 여전하다. 최근 들어서는 핸드폰이 이들을 뛰어넘는 '게임기'가 됐다.
하지만 이 '전자오락'의 반대편에도 '게임'은 존재한다. 종이로 된 판을 펼치고, 나무를 깎아 만든 말을 손으로 옮긴다. 수많은 카드를 쌓아 놓고 점수를 일일이 계산한다. 가장 오래된 인류의 게임. 보드게임이다.
보드게임 카페 열풍이 사그라들며 많은 이들이 보드게임을 잊었지만 오히려 마니아는 늘어났다. 트렌드성 확장이 아닌, 생활 속에서 보드게임을 즐기는 유저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의미다. 크라우드펀딩 등 투자를 받아 직접 나만의 보드게임을 만드는 이들도 있다.
◆ 보드게임 열풍은 지나갔지만 유산은 남았다
1990년대까지 국내 보드게임 시장은 '부루마블'로 대표되는 모노폴리 스타일이 주류를 이뤘다. 이와 함께 외국 보드 게임을 카피한 게임들이 문방구점 등에서 아이들 대상으로 팔리는 정도였다. 마땅히 시장이라 부를 만한 게 없었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 보드게임 카페가 우후죽순 늘어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말 그대로 남녀노소 즐길 수 있는 데다가 수십 종류의 보드게임을 번갈아 해볼 수 있어 스타크래프트에 빠져 있던 젊은이들에게도 아날로그의 재미를 깨닫게 했다. 클루, 루미큐브 등 초보자용 게임부터 푸에르토리코, 카탄, 아그리콜라 등 다소 복잡한 룰의 마니아형 보드게임까지 골고루 인기를 끌었다. 전혀 다른 시장이 형성된 것이다.
물론 보드게임 카페 열풍은 오래가지 않았다. 보드게임에 대한 이해도가 낮은 상태에서 너도 나도 창업에 뛰어들면서 얼마 지나지 않아 시장이 포화됐다. 많은 단골을 보유한 몇몇 매장을 제외하면 대부분 트렌디한 카페로 바뀐 지 오래다.
하지만 이 한 때의 유행이 남긴 유산도 있다. 보드게임 카페는 쇠퇴했지만 보드게임을 취미로 삼은 사람들이 늘어난 것이다. 보드게임 카페에서 플레이하던 사람들이 이제는 직접 게임을 구매해 친구들이나 가족들과 게임을 즐긴다.
친구들이 집에 놀러 왔을 때 함께 즐길 수 있는 낮은 난이도의 소위 '접대용 게임'은 물론 마니아들이 즐길 만한 고난이도 게임도 찾아보기 어렵지 않다. 대형 마트나 토이저러스 등의 완구 매장에서도 보드게임 매대가 따로 놓일 정도다. 각종 행사도 사람들을 불러모으고 있다. 지난달 열린 서울보드게임페스타는 이틀간 1만 명이 넘는 관람객을 모을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현재 국내 보드게임 시장 규모는 1000억 원 수준으로 추산된다. 이 중 280억 원대 매출로 업계 1위인 코리아보드게임즈는 지난해 10%대 매출 성장률과 17%의 영업이익률을 기록했다. 중소 업체들의 성장세도 이어지고 있다.
◆ 보드게임의 재미, 눈과 입과 손
보드게이머들은 디지털 게임과 다른 보드게임만의 맛이 있다고 강조한다. 컴퓨터 게임이 대체할 수 없는 영역이 보드게임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잘 만든 게임 자체의 매력이야 컴퓨터 게임이든 보드게임이든 다를 리 없지만 직접 점수를 계산해 가며 종이에 기록을 남기는 아날로그적 재미는 보드게임에서만 찾을 수 있다. 모든 계산을 컴퓨터에게 일임한 모바일 게임 '모두의 마블'이 부루마블과 똑같지 않게 느껴지는 이유다. 다양한 구성물에서 느껴지는 '손맛'도 보드게임만이 가진 아날로그적 특징이다. 나무로 만든 채소와 동물들을 놓아 농장을 운영하는 게임 아그리콜라는 게임성 이전에 컴포넌트의 아름다움으로 먼저 눈길을 끌었다. 흔들리는 나무 블럭 더미에서 블럭을 하나씩 빼내는 젠가, 잘그락거리는 숫자 블럭을 만지는 재미가 있는 루미큐브도 인기가 높은 게임이다.
보드게임에서 가장 빼놓을 수 없는 장점은 바로 '대화'다. 요즘에는 온라인 게임도 헤드셋을 이용해 서로 대화를 나누며 플레이하는 경우가 많지만 보드게임에 비할 바는 아니다. 대화 없이 진행할 수 있는 보드게임은 없다. 사람들이 보드게임을 좋아하는 이유로 가장 많이 꼽는 것 역시 함께 플레이하며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것이 첫 손에 꼽힌다.
국내 최대 온라인 보드게임 카페 다이브다이스에서는 늘 함께 게임을 즐길 사람을 찾는 글이 올라온다. 이곳에서는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이라도 누구나 함께 게임을 즐길 수 있다. 나이도 성별도 관계 없다. 게임을 들고 가서 인사를 나누는 순간 이미 '보드게이머'가 되는 식이다.
◆ 진짜 손맛…내 손으로 직접 만들어 가는 게임
보드게임의 '손맛'은 게임을 수동적으로 즐기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간단하게는 게임에 이용할 구성물을 다른 아이템으로 대체하는 것만으로도 몰입도를 크게 높일 수 있다. 종이로 만든 엽전을 대신해 실제 엽전을 구해 사용하는 식이다.
아예 직접 게임 제작에 나서는 경우도 있다. 최근에는 크라우드펀딩을 통해 보드게임을 개발하는 사례도 적지 않다. 개인 혹은 단체가 만든 게임을 소개하고 투자를 받아 게임을 제작하는 방식이다. 크라우드펀딩 플랫폼인 텀블벅에는 보통 7~10개의 보드게임이 펀딩을 기다리고 있다. 최근에도 '던전 뒤편'과 '남극 The Antarctic'은 모두 펀딩 기간을 남겨두고 목표 금액을 달성, 제작이 확정됐다.
'남극 The Antarctic'을 제작 중인 창업동아리 KEPSC의 송민준 회장은 "오랫동안 사랑받는 스테디셀러처럼 보드게임 역시 콘셉트와 게임 디자인이 잘 돼 있다면 꾸준하게 소비될 수 있을 것"이라며 "일반인들에게 보드게임의 접근성이 점점 더 좋아지고 있어 경쟁력이 있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던전 뒤편' 펀딩에 성공한 박태우 씨는 회사 동료들과 보드게임을 즐기다가 이제는 회사를 그만두고 보드게임 개발에 몰두하고 있다.
박 씨는 "나뿐 아니라 크라우드 펀딩이나 퍼블리셔를 통해 게임을 출시하고자 하는 보드게임 개발자분들이 생각보다 많다"며 "십수 년 전부터 초창기 보드게임 관련자 분들이 길을 잘 닦아와 좋은 환경 속에서 작업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박 씨는 보드게임 시장의 미래에 대해 낙관했다. 미련 없이 회사를 떠날 수 있었던 이유다. 그는 "요즘은 학교에서도 교육용 보드게임을 많이 즐겨 친밀도가 높다. 그 세대가 성장해 구매력을 가지게 된다면 자연스레 보드게임 시장은 커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김아름 한경닷컴 기자 armijjang@hankyung.com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open@hankyung.com
하지만 이 '전자오락'의 반대편에도 '게임'은 존재한다. 종이로 된 판을 펼치고, 나무를 깎아 만든 말을 손으로 옮긴다. 수많은 카드를 쌓아 놓고 점수를 일일이 계산한다. 가장 오래된 인류의 게임. 보드게임이다.
보드게임 카페 열풍이 사그라들며 많은 이들이 보드게임을 잊었지만 오히려 마니아는 늘어났다. 트렌드성 확장이 아닌, 생활 속에서 보드게임을 즐기는 유저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의미다. 크라우드펀딩 등 투자를 받아 직접 나만의 보드게임을 만드는 이들도 있다.
◆ 보드게임 열풍은 지나갔지만 유산은 남았다
1990년대까지 국내 보드게임 시장은 '부루마블'로 대표되는 모노폴리 스타일이 주류를 이뤘다. 이와 함께 외국 보드 게임을 카피한 게임들이 문방구점 등에서 아이들 대상으로 팔리는 정도였다. 마땅히 시장이라 부를 만한 게 없었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 보드게임 카페가 우후죽순 늘어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말 그대로 남녀노소 즐길 수 있는 데다가 수십 종류의 보드게임을 번갈아 해볼 수 있어 스타크래프트에 빠져 있던 젊은이들에게도 아날로그의 재미를 깨닫게 했다. 클루, 루미큐브 등 초보자용 게임부터 푸에르토리코, 카탄, 아그리콜라 등 다소 복잡한 룰의 마니아형 보드게임까지 골고루 인기를 끌었다. 전혀 다른 시장이 형성된 것이다.
물론 보드게임 카페 열풍은 오래가지 않았다. 보드게임에 대한 이해도가 낮은 상태에서 너도 나도 창업에 뛰어들면서 얼마 지나지 않아 시장이 포화됐다. 많은 단골을 보유한 몇몇 매장을 제외하면 대부분 트렌디한 카페로 바뀐 지 오래다.
하지만 이 한 때의 유행이 남긴 유산도 있다. 보드게임 카페는 쇠퇴했지만 보드게임을 취미로 삼은 사람들이 늘어난 것이다. 보드게임 카페에서 플레이하던 사람들이 이제는 직접 게임을 구매해 친구들이나 가족들과 게임을 즐긴다.
친구들이 집에 놀러 왔을 때 함께 즐길 수 있는 낮은 난이도의 소위 '접대용 게임'은 물론 마니아들이 즐길 만한 고난이도 게임도 찾아보기 어렵지 않다. 대형 마트나 토이저러스 등의 완구 매장에서도 보드게임 매대가 따로 놓일 정도다. 각종 행사도 사람들을 불러모으고 있다. 지난달 열린 서울보드게임페스타는 이틀간 1만 명이 넘는 관람객을 모을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현재 국내 보드게임 시장 규모는 1000억 원 수준으로 추산된다. 이 중 280억 원대 매출로 업계 1위인 코리아보드게임즈는 지난해 10%대 매출 성장률과 17%의 영업이익률을 기록했다. 중소 업체들의 성장세도 이어지고 있다.
◆ 보드게임의 재미, 눈과 입과 손
보드게이머들은 디지털 게임과 다른 보드게임만의 맛이 있다고 강조한다. 컴퓨터 게임이 대체할 수 없는 영역이 보드게임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잘 만든 게임 자체의 매력이야 컴퓨터 게임이든 보드게임이든 다를 리 없지만 직접 점수를 계산해 가며 종이에 기록을 남기는 아날로그적 재미는 보드게임에서만 찾을 수 있다. 모든 계산을 컴퓨터에게 일임한 모바일 게임 '모두의 마블'이 부루마블과 똑같지 않게 느껴지는 이유다. 다양한 구성물에서 느껴지는 '손맛'도 보드게임만이 가진 아날로그적 특징이다. 나무로 만든 채소와 동물들을 놓아 농장을 운영하는 게임 아그리콜라는 게임성 이전에 컴포넌트의 아름다움으로 먼저 눈길을 끌었다. 흔들리는 나무 블럭 더미에서 블럭을 하나씩 빼내는 젠가, 잘그락거리는 숫자 블럭을 만지는 재미가 있는 루미큐브도 인기가 높은 게임이다.
보드게임에서 가장 빼놓을 수 없는 장점은 바로 '대화'다. 요즘에는 온라인 게임도 헤드셋을 이용해 서로 대화를 나누며 플레이하는 경우가 많지만 보드게임에 비할 바는 아니다. 대화 없이 진행할 수 있는 보드게임은 없다. 사람들이 보드게임을 좋아하는 이유로 가장 많이 꼽는 것 역시 함께 플레이하며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것이 첫 손에 꼽힌다.
국내 최대 온라인 보드게임 카페 다이브다이스에서는 늘 함께 게임을 즐길 사람을 찾는 글이 올라온다. 이곳에서는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이라도 누구나 함께 게임을 즐길 수 있다. 나이도 성별도 관계 없다. 게임을 들고 가서 인사를 나누는 순간 이미 '보드게이머'가 되는 식이다.
◆ 진짜 손맛…내 손으로 직접 만들어 가는 게임
보드게임의 '손맛'은 게임을 수동적으로 즐기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간단하게는 게임에 이용할 구성물을 다른 아이템으로 대체하는 것만으로도 몰입도를 크게 높일 수 있다. 종이로 만든 엽전을 대신해 실제 엽전을 구해 사용하는 식이다.
아예 직접 게임 제작에 나서는 경우도 있다. 최근에는 크라우드펀딩을 통해 보드게임을 개발하는 사례도 적지 않다. 개인 혹은 단체가 만든 게임을 소개하고 투자를 받아 게임을 제작하는 방식이다. 크라우드펀딩 플랫폼인 텀블벅에는 보통 7~10개의 보드게임이 펀딩을 기다리고 있다. 최근에도 '던전 뒤편'과 '남극 The Antarctic'은 모두 펀딩 기간을 남겨두고 목표 금액을 달성, 제작이 확정됐다.
'남극 The Antarctic'을 제작 중인 창업동아리 KEPSC의 송민준 회장은 "오랫동안 사랑받는 스테디셀러처럼 보드게임 역시 콘셉트와 게임 디자인이 잘 돼 있다면 꾸준하게 소비될 수 있을 것"이라며 "일반인들에게 보드게임의 접근성이 점점 더 좋아지고 있어 경쟁력이 있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던전 뒤편' 펀딩에 성공한 박태우 씨는 회사 동료들과 보드게임을 즐기다가 이제는 회사를 그만두고 보드게임 개발에 몰두하고 있다.
박 씨는 "나뿐 아니라 크라우드 펀딩이나 퍼블리셔를 통해 게임을 출시하고자 하는 보드게임 개발자분들이 생각보다 많다"며 "십수 년 전부터 초창기 보드게임 관련자 분들이 길을 잘 닦아와 좋은 환경 속에서 작업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박 씨는 보드게임 시장의 미래에 대해 낙관했다. 미련 없이 회사를 떠날 수 있었던 이유다. 그는 "요즘은 학교에서도 교육용 보드게임을 많이 즐겨 친밀도가 높다. 그 세대가 성장해 구매력을 가지게 된다면 자연스레 보드게임 시장은 커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김아름 한경닷컴 기자 armijja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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