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향기] 중세로 떠나는 '마법의 문'이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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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여행자의 도시 '에스토니아 탈린
아름답고 웅장한 성벽·첨탑…'아픈 역사' 가 숨어 있었네
주변 강대국 침략받은 수도 탈린
구시가 전체가 세계문화유산, 곳곳에 중세시대 건축물 즐비
창업자·예술가 모인 복합공간 '크리에이티브 시티'도 눈길
아름답고 웅장한 성벽·첨탑…'아픈 역사' 가 숨어 있었네
주변 강대국 침략받은 수도 탈린
구시가 전체가 세계문화유산, 곳곳에 중세시대 건축물 즐비
창업자·예술가 모인 복합공간 '크리에이티브 시티'도 눈길
에스토니아의 수도 탈린은 탑이 보이고 파도소리가 들리는 항구 도시다. 중세 한자동맹 해상 무역항으로 쌓아 올린 영광은 탑이 돼 빛나고 있다. ‘탑의 숲’이란 뜻의 이름처럼, 16세기까지 존재했던 46개의 성탑 중 26개가 도시 곳곳에 여전히 솟아 있다. 상인이 드나들던 항구에는 거대한 크루즈 선과 페리가 정박해 수많은 승객을 내려놓는다. 중세와 현대가 공존하는 탈린의 눈부신 장면들을 포착하기 위해 찾아온 여행자들이다.
항구도시 탈린을 키운 8할은 한자동맹
발트해가 고요하게 깨어나는 아침, 탈린행 메가스타 호에 올랐다. “헬싱키에서 꼭 해야 할 일 중 하나는 페리를 타고 탈린에 다녀오는 것”이라는 말을 여러 번 듣기도 했거니와 미지의 도시로 다가가기에 배만큼 낭만적 이동수단도 없다. 에스토니아 수도 탈린은 발트해를 사이에 두고 핀란드 수도 헬싱키와 마주한 항만도시다. 낯선 이름이라 생각하겠지만, 탈린은 세계사 수업 시간에 배운 ‘한자동맹’의 주요 도시로 꼽힌다. 한자동맹이란 13세기부터 독일 뤼베크를 중심으로 북해·발트해 연안의 70여 개 도시가 결성한 일종의 자유무역 협정이다. 해상 무역 중심지로 성장할수록 탈린에는 길고 단단한 성벽이 들어서고, 그 안에는 도로가 놓였다. 15세기에 들어 한자동맹은 쇠락했지만 탈린은 무역항으로 번성했다. 시청과 교회가 건물을 새로 짓고 상인들의 건물도 목조에서 석조로 재건하거나 점점 화려하게 치장했다. 이후 독일, 러시아 등 주변 국가의 침략과 전쟁의 소용돌이에도 성벽과 건축물은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2차 세계대전 중에도 늘 자욱한 안개 덕에 폭격을 피할 수 있었다. 이처럼 중세도시의 원형이 잘 보존된 탈린 구시가는 1997년 구시가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어느새 창밖으로 바다와 하늘이 맞닿은 망망대해 대신 해안을 따라 늘어선 탈린 구시가가 아른거렸다. 멀리서 봐도 오랜 세월을 머금은 풍경이다. 페리로 겨우 2시간을 달려왔을 뿐인데 수백 년의 시간을 훌쩍 뛰어넘은 것 같다. 국경만 넘은 게 아니라 시대를 거슬러 중세 무역상이 된 기분으로 항구에 발을 내디뎠다.
중세로 가는 마법의 문, 비루 게이트
항구를 벗어나 20분쯤 걷자 견고한 성벽으로 에워싸인 요새 같은 구시가가 모습을 드러낸다. 두께 3m, 높이 16m에 달하는 성벽은 중세에는 누구도 감히 들어갈 수 없는 철옹성이었지만, 지금은 여행객들을 향해 활짝 열려있다. 그중 ‘비루 게이트(Viru Gate)’는 탈린 구시가로 들어서는 관문이다. 쌍둥이처럼 서 있는 탑 사이를 통과하면 반지르르 윤이 나는 자갈을 따라 걸어서 중세 속으로 시간 여행이 시작된다. 발걸음을 뗄 때마다 중세복장을 한 사람들이 시선을 끈다. 한자동맹 시절의 분위기를 재현한 ‘올드 한자(Old Hansa)’라는 식당 앞에서는 중세 복장을 한 악사들이 악기를 연주하는가 하면, 중세식 아몬드 판매대 점원도 시식을 권한다. 점원이 내미는 아몬드 몇 알을 먹어보니 달콤하게 볶았다. 맥주가 생각이 났다. 구시가는 크게 고지대와 저지대로 나뉜다. 예부터 고지대는 권력층의 거주지였고 그 아래로 형성된 저지대에는 상인과 서민들의 생활 터전이었다. 지금은 긴 다리(Pikk Jalg)와 짧은 다리(Luhike Jalg) 2개의 길로 저지대와 고지대가 연결되지만 중세에는 완전 다른 도시처럼 분리돼 있었다. 마차가 지나다녔을 만큼 널찍한 ‘긴 다리’는 성벽을 따라 이어지는 길로 거리 화가들의 작업실이자 갤러리가 됐다. 저마다 성벽에 그림을 걸어놓고 그 앞에서 그림을 그린다. 시청 앞 유서깊은 카타리나 골목
저지대의 중심에는 시청 광장이 있다. 여기서 매년 여름엔 중세 카니발 축제가, 겨울엔 크리스마스 마켓이 열린다. 광장 중앙에 자리한 시청은 북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고딕 양식 건물로 1404년에 완공됐다. 첨탑을 올려다보면 그 끝에 탈린의 수호자라 불리는 토마스 모양의 풍향계가 달려 있다. 전설에 따르면 토마스는 석궁이 꿈이었지만 미천한 신분 탓에 파수병이 됐다. 토마스는 평생 파수병으로 살며 매일같이 시청 광장에서 아이들에게 사탕을 나눠 줬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사람들은 시청 첨탑에 토마스 모양 풍향계를 달아 그를 기렸단다. 풍향계 하나에도 이야기가 깃든 시청을 중심으로 3~4층 높이의 파스텔 톤 건축물이 광장을 빙 두른다. 지금은 상점과 노천카페 레스토랑이 됐지만, 중세에는 대부분 상인의 공동조합인 길드(guild) 건물이었다. 시청 광장 모퉁이에는 1422년에 문을 연 약국이 성업 중이다. 그 안에는 말린 두꺼비 가루, 불에 그을린 벌 등 중세 약재를 전시해 놓았을 뿐 아니라 진짜 약도 판다. 시청광장에서 뻗어있는 골목 중 중세 카타리나 길드의 본거지였던 ‘카타리나 골목’이 가장 오래되고 운치 있는 길로 꼽힌다. 카타리나는 종교개혁 전까지 구시가지 내에서 있던 카타리나 수도원 가는 길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수도원은 사라졌지만, 이 골목엔 지금도 유리 공예, 모자, 도자기 등을 만드는 예술가의 공방 14개가 있다. 문화가 살아 숨 쉬는 카타리나 골목을 뒤로 한 채 저지대 끝자락 세인트 울라프 교회로 향했다. 중세에는 탈린을 드나들던 상인들이 이정표로 여길 만큼 높은 교회로 통했다. 원래 탑 높이가 159m였는데, 번개를 세 번이나 맞아 무너지고 지금은 124m 높이의 탑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구소련 시절에는 케이지비(KGB)의 무선 송신과 감시탑으로 이용되기도 했던 탑이다. 첨탑 꼭대기까지 나선형 계단 258개를 걸어 오르자, 성벽 안에 고이 안긴 구시가 풍광이 한눈에 들어왔다. 가장 먼저 시선을 끈 것은 하늘을 향해 뾰족 솟은 교회의 첨탑들. 그 아래로 주황색 지붕이 물결이 햇살을 받아 반짝였다. 저지대부터 고지대까지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구시가를 내려다보기 더할 나위 없는 장소였다.
고지대에 서면 에스토니아의 역사가 보인다
고지대에는 분홍빛 외벽이 돋보이는 툼페아 성을 중심으로 거대한 성당과 저택이 포진해 있다. 저지대보다 건축의 규모가 크고 면면이 화려하다. 자세히 보면 건축 양식이 제각각인데, 스웨덴, 러시아 등 에스토니아를 침략한 나라들이 남기고 간 아픈 역사의 흔적이기도 하다.
에스토니아는 늘 주변 강대국에 늘 시달려 왔다. 한자동맹에 발끈한 덴마크가 쳐들어 왔다. 이후 스웨덴과 러시아가 호시탐탐 탈린을 넘봤다.
웨덴의 지배를 받다가 1710년에는 러시아에 병합됐다. 러시아 제국 표트르 대제는 수도를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옮기고, 에스토니아의 탈린과 발트해 너머 핀란드의 헬싱키를 꼭지점처럼 묶어 러시아의 중심축으로 삼으려 했다.
영토를 빼앗길 때마다 내주었던 툼페아 성은 현재 에스토니아 국회의사당으로 쓰인다. 툼페아 성은 중세 십자군에 의해 지어져, 13세기 14세기 탈린의 황금기에 바로크 양식의 궁전 모양을 갖췄다. 한편, 툼페아 성의 남쪽 가장자리에는 헤르만 탑(Pikk Hermann)이 있는데, 매일 아침 해가 뜰 때마다 이곳에 에스토니아 국기를 내걸고 국가를 연주하며 국기게양식을 거행한다.
덴마크 국기가 생겨난 왕의 정원
툼페아 성 앞엔 19세기 러시아가 탈린을 점령하던 시절에 러시아 제국주의를 과시하기 위해 세운 알렉산더 넵스키 대성당이 우뚝 서 있다. 거대한 구형 지붕부터 벽화와 모자이크 장식까지 상트페테르부르크 출신 건축가 미하일 프레블라지네스키가 디자인한 교회로 당시 러시아의 건축 양식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 뒤편으로는 덴마크가 통치하던 시절의 자취인 ‘덴마크 왕의 정원’이 있다. 덴마크 왕 발데마르 2세가 지은 성탑과 정원이 남아 있다. 19세기에는 어시장, 꽃시장 등으로 쓰였다가 다시 도시의 공원으로 탈바꿈한 곳이다. 고대 전설에 따르면 여기서 덴마크 국기가 생겨났단다. 1219년 7월15일 에스토니아를 침략한 덴마크군이 전쟁에 지고 있었는데, 갑자기 하늘에서 흰 십자가를 그리 붉은 깃발이 떠올랐다. 덴마크군은 이를 거룩한 계시로 여겨 전투를 역전으로 이끌었고 그 결과 에스토니아는 100년간 덴마크의 지배를 당했다.
한편 13세기에 건립된 성모 마리아 대성당은 이름은 대성당이지만 스웨덴에 의해 루터 교회로 바뀌었다. 그래서 웅장한 규모에 비해 내부는 소박한 편이다. 1779년에 추가로 지은 첨탑에 오르면 고지대의 전망을 한눈에 담을 수 있다. 이처럼 고지대에는 전망 좋은 첨탑도 많다. 이번엔 슬렁슬렁 걸어서 오르는 코투오차 전망대를 택했다. 세인트 울라프 교회 첨탑과는 또 다른 높이에서 바라본 구시가의 풍경도 여행자의 혼을 쏙 빼놓을 만큼 아름답다. 그림 같은 전망대 한쪽 벽에는 ‘Time We had’라는 글귀가 쓰여 있다. ‘과거를 잊지 않고 기억하며 미래로 나아가자’고 다짐이라도 하듯이.
탈린의 미래, 크리에이티브 시티
“탈린에는 구시가만 있는 게 아니에요. 구시가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크에이티브 시티가 나와요. 여기를 가야 현지인들의 삶을 엿볼 수 있어요.” 탈린에 다녀온 지인이 말했다. 구시가에서 도보로 15분이면 갈 수 있는 크리에이티브 시티(Creative City)는 기차역 옆 폐공장 지대를 예술가와 젊은 창업자의 아지트로 변신시킨 복합 공간이다. 그라피티가 그려진 공장 건물에는 창업가들의 사무실과 예술가들의 작업실이 자리한다. 그들이 자유롭게 아이디어를 주고받는 카페와 레스토랑에선 구시가보다 가격은 저렴한 가격에 맛있는 식사와 멋스러운 분위기를 즐길 수 있다. 이 밖에 젊은 예술가의 작품을 전시하는 갤러리, 에스토니아 디자인을 엿볼 수 있는 작은 가게나 서점, 극장도 둥지를 틀고 있다. 토요일에는 공터에서 벼룩시장도 열린다. 어딜 가나 비슷한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이 모여 있는 취향 공동체의 분위기가 감돌았다. 옛것을 잘 보존하면서도 새것을 받아들이는 데 소홀하지 않는 것이 탈린의 매력이자 강점이구나 싶었다. 그 덕에 중세에서 현대로 순간 이동한 듯 시간 여행자의 기쁨을 맘껏 누렸다.
여행정보
서울에서 탈린까지 직항은 없다. 비행기를 갈아타고 갈 수도 있지만, 헬싱키까지 직항으로 핀에어를 타고 가서 페리를 타고 가는 것도 색다른 방법이다. 헬싱키 항구에서 탈린 항구까지는 85㎞ 거리로 페리로 약 2시간이 걸린다. 페리는 여러 종류가 있는데 친환경 동력에너지 LNG로 운항하는 ‘메가스타’를 타면 이동 시간마저 잊지 못할 여행이 된다. 메가스타에는 선상 면세점을 비롯해 핀란드 유명 디자이너 베르티 키비가 디자인한 레스토랑과 바 등 즐길 거리가 가득하다. 티켓은 홈페이지에서 예약할 수 있다. 이왕이면 당일치기보다 1박 이상 탈린에 머물며 곳곳을 둘러보는 여유로운 일정을 추천한다. 탈린 언어는 에스토니아어지만, 영어와 러시아어가 잘 통한다.
화폐는 유로, 전압은 220V를 쓴다. 시차는 한국보다 7시간이 느리다.
탈린= 글·사진 우지경 여행작가 traveletter@naver.com
발트해가 고요하게 깨어나는 아침, 탈린행 메가스타 호에 올랐다. “헬싱키에서 꼭 해야 할 일 중 하나는 페리를 타고 탈린에 다녀오는 것”이라는 말을 여러 번 듣기도 했거니와 미지의 도시로 다가가기에 배만큼 낭만적 이동수단도 없다. 에스토니아 수도 탈린은 발트해를 사이에 두고 핀란드 수도 헬싱키와 마주한 항만도시다. 낯선 이름이라 생각하겠지만, 탈린은 세계사 수업 시간에 배운 ‘한자동맹’의 주요 도시로 꼽힌다. 한자동맹이란 13세기부터 독일 뤼베크를 중심으로 북해·발트해 연안의 70여 개 도시가 결성한 일종의 자유무역 협정이다. 해상 무역 중심지로 성장할수록 탈린에는 길고 단단한 성벽이 들어서고, 그 안에는 도로가 놓였다. 15세기에 들어 한자동맹은 쇠락했지만 탈린은 무역항으로 번성했다. 시청과 교회가 건물을 새로 짓고 상인들의 건물도 목조에서 석조로 재건하거나 점점 화려하게 치장했다. 이후 독일, 러시아 등 주변 국가의 침략과 전쟁의 소용돌이에도 성벽과 건축물은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2차 세계대전 중에도 늘 자욱한 안개 덕에 폭격을 피할 수 있었다. 이처럼 중세도시의 원형이 잘 보존된 탈린 구시가는 1997년 구시가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어느새 창밖으로 바다와 하늘이 맞닿은 망망대해 대신 해안을 따라 늘어선 탈린 구시가가 아른거렸다. 멀리서 봐도 오랜 세월을 머금은 풍경이다. 페리로 겨우 2시간을 달려왔을 뿐인데 수백 년의 시간을 훌쩍 뛰어넘은 것 같다. 국경만 넘은 게 아니라 시대를 거슬러 중세 무역상이 된 기분으로 항구에 발을 내디뎠다.
중세로 가는 마법의 문, 비루 게이트
항구를 벗어나 20분쯤 걷자 견고한 성벽으로 에워싸인 요새 같은 구시가가 모습을 드러낸다. 두께 3m, 높이 16m에 달하는 성벽은 중세에는 누구도 감히 들어갈 수 없는 철옹성이었지만, 지금은 여행객들을 향해 활짝 열려있다. 그중 ‘비루 게이트(Viru Gate)’는 탈린 구시가로 들어서는 관문이다. 쌍둥이처럼 서 있는 탑 사이를 통과하면 반지르르 윤이 나는 자갈을 따라 걸어서 중세 속으로 시간 여행이 시작된다. 발걸음을 뗄 때마다 중세복장을 한 사람들이 시선을 끈다. 한자동맹 시절의 분위기를 재현한 ‘올드 한자(Old Hansa)’라는 식당 앞에서는 중세 복장을 한 악사들이 악기를 연주하는가 하면, 중세식 아몬드 판매대 점원도 시식을 권한다. 점원이 내미는 아몬드 몇 알을 먹어보니 달콤하게 볶았다. 맥주가 생각이 났다. 구시가는 크게 고지대와 저지대로 나뉜다. 예부터 고지대는 권력층의 거주지였고 그 아래로 형성된 저지대에는 상인과 서민들의 생활 터전이었다. 지금은 긴 다리(Pikk Jalg)와 짧은 다리(Luhike Jalg) 2개의 길로 저지대와 고지대가 연결되지만 중세에는 완전 다른 도시처럼 분리돼 있었다. 마차가 지나다녔을 만큼 널찍한 ‘긴 다리’는 성벽을 따라 이어지는 길로 거리 화가들의 작업실이자 갤러리가 됐다. 저마다 성벽에 그림을 걸어놓고 그 앞에서 그림을 그린다. 시청 앞 유서깊은 카타리나 골목
저지대의 중심에는 시청 광장이 있다. 여기서 매년 여름엔 중세 카니발 축제가, 겨울엔 크리스마스 마켓이 열린다. 광장 중앙에 자리한 시청은 북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고딕 양식 건물로 1404년에 완공됐다. 첨탑을 올려다보면 그 끝에 탈린의 수호자라 불리는 토마스 모양의 풍향계가 달려 있다. 전설에 따르면 토마스는 석궁이 꿈이었지만 미천한 신분 탓에 파수병이 됐다. 토마스는 평생 파수병으로 살며 매일같이 시청 광장에서 아이들에게 사탕을 나눠 줬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사람들은 시청 첨탑에 토마스 모양 풍향계를 달아 그를 기렸단다. 풍향계 하나에도 이야기가 깃든 시청을 중심으로 3~4층 높이의 파스텔 톤 건축물이 광장을 빙 두른다. 지금은 상점과 노천카페 레스토랑이 됐지만, 중세에는 대부분 상인의 공동조합인 길드(guild) 건물이었다. 시청 광장 모퉁이에는 1422년에 문을 연 약국이 성업 중이다. 그 안에는 말린 두꺼비 가루, 불에 그을린 벌 등 중세 약재를 전시해 놓았을 뿐 아니라 진짜 약도 판다. 시청광장에서 뻗어있는 골목 중 중세 카타리나 길드의 본거지였던 ‘카타리나 골목’이 가장 오래되고 운치 있는 길로 꼽힌다. 카타리나는 종교개혁 전까지 구시가지 내에서 있던 카타리나 수도원 가는 길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수도원은 사라졌지만, 이 골목엔 지금도 유리 공예, 모자, 도자기 등을 만드는 예술가의 공방 14개가 있다. 문화가 살아 숨 쉬는 카타리나 골목을 뒤로 한 채 저지대 끝자락 세인트 울라프 교회로 향했다. 중세에는 탈린을 드나들던 상인들이 이정표로 여길 만큼 높은 교회로 통했다. 원래 탑 높이가 159m였는데, 번개를 세 번이나 맞아 무너지고 지금은 124m 높이의 탑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구소련 시절에는 케이지비(KGB)의 무선 송신과 감시탑으로 이용되기도 했던 탑이다. 첨탑 꼭대기까지 나선형 계단 258개를 걸어 오르자, 성벽 안에 고이 안긴 구시가 풍광이 한눈에 들어왔다. 가장 먼저 시선을 끈 것은 하늘을 향해 뾰족 솟은 교회의 첨탑들. 그 아래로 주황색 지붕이 물결이 햇살을 받아 반짝였다. 저지대부터 고지대까지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구시가를 내려다보기 더할 나위 없는 장소였다.
고지대에 서면 에스토니아의 역사가 보인다
고지대에는 분홍빛 외벽이 돋보이는 툼페아 성을 중심으로 거대한 성당과 저택이 포진해 있다. 저지대보다 건축의 규모가 크고 면면이 화려하다. 자세히 보면 건축 양식이 제각각인데, 스웨덴, 러시아 등 에스토니아를 침략한 나라들이 남기고 간 아픈 역사의 흔적이기도 하다.
에스토니아는 늘 주변 강대국에 늘 시달려 왔다. 한자동맹에 발끈한 덴마크가 쳐들어 왔다. 이후 스웨덴과 러시아가 호시탐탐 탈린을 넘봤다.
웨덴의 지배를 받다가 1710년에는 러시아에 병합됐다. 러시아 제국 표트르 대제는 수도를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옮기고, 에스토니아의 탈린과 발트해 너머 핀란드의 헬싱키를 꼭지점처럼 묶어 러시아의 중심축으로 삼으려 했다.
영토를 빼앗길 때마다 내주었던 툼페아 성은 현재 에스토니아 국회의사당으로 쓰인다. 툼페아 성은 중세 십자군에 의해 지어져, 13세기 14세기 탈린의 황금기에 바로크 양식의 궁전 모양을 갖췄다. 한편, 툼페아 성의 남쪽 가장자리에는 헤르만 탑(Pikk Hermann)이 있는데, 매일 아침 해가 뜰 때마다 이곳에 에스토니아 국기를 내걸고 국가를 연주하며 국기게양식을 거행한다.
덴마크 국기가 생겨난 왕의 정원
툼페아 성 앞엔 19세기 러시아가 탈린을 점령하던 시절에 러시아 제국주의를 과시하기 위해 세운 알렉산더 넵스키 대성당이 우뚝 서 있다. 거대한 구형 지붕부터 벽화와 모자이크 장식까지 상트페테르부르크 출신 건축가 미하일 프레블라지네스키가 디자인한 교회로 당시 러시아의 건축 양식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 뒤편으로는 덴마크가 통치하던 시절의 자취인 ‘덴마크 왕의 정원’이 있다. 덴마크 왕 발데마르 2세가 지은 성탑과 정원이 남아 있다. 19세기에는 어시장, 꽃시장 등으로 쓰였다가 다시 도시의 공원으로 탈바꿈한 곳이다. 고대 전설에 따르면 여기서 덴마크 국기가 생겨났단다. 1219년 7월15일 에스토니아를 침략한 덴마크군이 전쟁에 지고 있었는데, 갑자기 하늘에서 흰 십자가를 그리 붉은 깃발이 떠올랐다. 덴마크군은 이를 거룩한 계시로 여겨 전투를 역전으로 이끌었고 그 결과 에스토니아는 100년간 덴마크의 지배를 당했다.
한편 13세기에 건립된 성모 마리아 대성당은 이름은 대성당이지만 스웨덴에 의해 루터 교회로 바뀌었다. 그래서 웅장한 규모에 비해 내부는 소박한 편이다. 1779년에 추가로 지은 첨탑에 오르면 고지대의 전망을 한눈에 담을 수 있다. 이처럼 고지대에는 전망 좋은 첨탑도 많다. 이번엔 슬렁슬렁 걸어서 오르는 코투오차 전망대를 택했다. 세인트 울라프 교회 첨탑과는 또 다른 높이에서 바라본 구시가의 풍경도 여행자의 혼을 쏙 빼놓을 만큼 아름답다. 그림 같은 전망대 한쪽 벽에는 ‘Time We had’라는 글귀가 쓰여 있다. ‘과거를 잊지 않고 기억하며 미래로 나아가자’고 다짐이라도 하듯이.
탈린의 미래, 크리에이티브 시티
“탈린에는 구시가만 있는 게 아니에요. 구시가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크에이티브 시티가 나와요. 여기를 가야 현지인들의 삶을 엿볼 수 있어요.” 탈린에 다녀온 지인이 말했다. 구시가에서 도보로 15분이면 갈 수 있는 크리에이티브 시티(Creative City)는 기차역 옆 폐공장 지대를 예술가와 젊은 창업자의 아지트로 변신시킨 복합 공간이다. 그라피티가 그려진 공장 건물에는 창업가들의 사무실과 예술가들의 작업실이 자리한다. 그들이 자유롭게 아이디어를 주고받는 카페와 레스토랑에선 구시가보다 가격은 저렴한 가격에 맛있는 식사와 멋스러운 분위기를 즐길 수 있다. 이 밖에 젊은 예술가의 작품을 전시하는 갤러리, 에스토니아 디자인을 엿볼 수 있는 작은 가게나 서점, 극장도 둥지를 틀고 있다. 토요일에는 공터에서 벼룩시장도 열린다. 어딜 가나 비슷한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이 모여 있는 취향 공동체의 분위기가 감돌았다. 옛것을 잘 보존하면서도 새것을 받아들이는 데 소홀하지 않는 것이 탈린의 매력이자 강점이구나 싶었다. 그 덕에 중세에서 현대로 순간 이동한 듯 시간 여행자의 기쁨을 맘껏 누렸다.
여행정보
서울에서 탈린까지 직항은 없다. 비행기를 갈아타고 갈 수도 있지만, 헬싱키까지 직항으로 핀에어를 타고 가서 페리를 타고 가는 것도 색다른 방법이다. 헬싱키 항구에서 탈린 항구까지는 85㎞ 거리로 페리로 약 2시간이 걸린다. 페리는 여러 종류가 있는데 친환경 동력에너지 LNG로 운항하는 ‘메가스타’를 타면 이동 시간마저 잊지 못할 여행이 된다. 메가스타에는 선상 면세점을 비롯해 핀란드 유명 디자이너 베르티 키비가 디자인한 레스토랑과 바 등 즐길 거리가 가득하다. 티켓은 홈페이지에서 예약할 수 있다. 이왕이면 당일치기보다 1박 이상 탈린에 머물며 곳곳을 둘러보는 여유로운 일정을 추천한다. 탈린 언어는 에스토니아어지만, 영어와 러시아어가 잘 통한다.
화폐는 유로, 전압은 220V를 쓴다. 시차는 한국보다 7시간이 느리다.
탈린= 글·사진 우지경 여행작가 traveletter@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