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호기 건설중단 공약 불이행 공식 확인…"결과 승복 때 민주주의 완성"
공론화 과정 '숙의 민주주의 모범' 평가…"시민 의견, 정책추진과정에 활용"
6월 탈원전 선포식 내용 재확인…공론화, 다른 대형 갈등현안에 적용 시사

문재인 대통령이 22일 신고리 5·6호기 건설 재개 권고를 전폭적으로 수용하면서도 '탈원전' 정책기조는 흔들림 없이 추진하겠다는 의지를 재천명했다.

이날 오후 배포한 '신고리 5·6호기 공론화 결과에 대한 대통령 입장'이라는 서면 메시지를 통해서다.

공론화위원회의 권고에 따라 5·6호기 건설을 재개하겠지만, 신규 원전 포기와 기존 원전수명 연장을 불허하는 내용의 탈원전 정책기조는 변함없이 이어가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한 것이다.

문 대통령은 "정부가 이미 천명한 대로 탈원전을 비롯한 에너지 전환 정책을 차질없이 추진하겠다"며 "더이상의 신규원전 건설계획을 전면 중단하고 에너지 수급의 안정성이 확인되는 대로 설계수명을 연장하며 가동 중인 월성 1호기의 가동을 중단하겠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의 이 같은 입장 표명은 신고리 5·6호기 중단이라는 대선공약을 이행하지 못하게 됐음을 공식적으로 확인하면서 지지층을 다독이려는 성격이 강한 것으로 풀이된다.

공론화 결과에 따라 공약을 지키지 못하게 됐지만, 공약의 기본 정신과 정책기조 만큼은 확고히 지켜나가겠다는 뜻을 강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에 따라 정부는 24일 문 대통령 주재로 열리는 국무회의에서 원전 안전문제를 비롯한 탈원전 로드맵을 공식 의결할 예정이라고 청와대가 전했다.

문 대통령이 대선공약 불(不)이행의 가장 큰 이유이자 명분으로 내세운 것은 바로 '공론화 과정'이다.

시민들이 직접 참여해 토론하고 숙의하는 민주적 절차와 과정을 밟아 도출한 결론을 대통령으로서 수용할 수밖에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문 대통령은 "471명의 시민참여단은 작은 대한민국이었다"고 지칭하고 "우리 국민들은 이번 공론화 과정을 통해 한층 성숙한 민주주의의 모습을 보여줬다"고 평가했다.

이어 "자신의 의견과 다른 결과에 대해서도 승복하는 숙의 민주주의의 모범을 보여줬다"며 "반대 의견을 배려한 보완대책까지 제시하는 통합과 상생의 정신을 보여다"고 강조했다.

문 대통령은 이처럼 민주적 공론화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대선때부터 5·6호기 건설 중단에 찬성해온 지지층들을 향해 '대승적 수용'을 촉구했다.

문 대통령은 "민주주의는 토론할 권리를 가지고 결과에 승복할 때 완성된다고 생각한다"며 "공사 중단이라는 저의 공약을 지지해주신 국민들께서도 공론화 위원회의 권고를 존중하고 대승적으로 수용해주시길 부탁드린다"고 당부했다.

문 대통령이 이날 발표한 메시지는 신고리 5·6호기 건설을 조속히 재개하겠다는 내용을 제외하면 지난 6월 고리 1호기 영구정지 선포식 당시 원전정책을 재검토하고 탈핵시대로 가겠다고 했던 기념사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다.

특히 '탈원전'과 함께 '탈석탄'과 신재생에너지 확대를 아우르는 에너지 전환 정책에도 박차를 가하겠다는 뜻을 거듭 확인했다.

문 대통령은 이날 입장문에서 "정부가 이미 천명한 대로 탈원전을 비롯한 에너지 전환 정책을 차질없이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먼저 탈원전 정책의 구체적 방안으로 제시한 내용들은 이미 발표된 바 있다.

신규 원전 건설계획 전면 중단과 현재 수명을 연장해 가동 중인 월성 1호기의 폐쇄, 원전안전 기준 강화 등은 6월 기념사에도 포함됐던 사항들이다.

천연가스와 신재생에너지 확대를 추진한다는 내용은 물론, 원전해체연구소를 동남권에 설립해 원전 해체에 대비하고 외국 원전 해체시장을 선점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뒷받침하겠다는 내용도 이번에 재차 강조됐다.

눈에 띄는 점은 탈원전과 에너지 전환정책이 장기적인 과제라는 점을 새로이 언급했다는 것이다.

문 대통령은 "월성 1호기 가동을 중단해도 실제 원전의 수가 줄어드는 것은 다음 정부부터"라며 "다음 정부가 탈원전의 기조를 계속 유지할 수 있도록 천연가스와 신재생에너지 확대에 박차를 가하겠다"고 밝혔다.

공론화위원회의 결과에 따라 신고리 5·6호기 건설을 재개하더라도 장기적인 관점에서 추진되는 탈원전 정책기조는 정권이 바뀌더라도 추진돼야 한다는 점을 언급하고 에너지 정책 전환의 중요성을 다시금 강조한 것으로 풀이된다.

또 하나 주목할 대목은 시민참여단이 제시한 아이디어를 정책에 적극 반영하겠다는 뜻을 밝힌 것이다.

원전을 비롯한 국가 에너지정책에 있어 공론화 과정을 통해 표출된 숙의 민주주의적 요소를 고려해나가겠다는 의미다.

문 대통령은 "이번 공론화 과정은 원전정책의 주인도 우리 국민임을 분명하게 보여줬다"며 "시민참여단의 토론과 숙의, 최종 선택과정에서 나온 하나하나의 의견과 대안은 모두 소중한 자산이다.

향후 정책추진 과정에서 적극적으로 반영하겠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의 이날 메시지에서 가장 관심을 모았던 것은 이번에 성공한 공론화 방식을 앞으로의 정책결정 과정에 어떤 식으로 활용할지에 대한 방향이 나올지였다.

그러나 문 대통령은 '총론적으로' 공론화 방식을 다른 사회적 갈등 현안에도 확대 적용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하는 데 그쳤고 구체적인 밑그림을 언급하지는 않았다.

문 대통령은 "갈수록 빈발하는 대형 갈등과제를 사회적 합의를 통해 해결하는 지혜가 절실하다"며 "이번 공론화 경험을 통해 사회적 갈등 현안을 해결하는 다양한 사회적 대화와 대타협이 더욱 활발해지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다만 청와대는 국가가 당사자인 갈등현안에 대해 제한적으로 공론화 과정을 적용한다는 입장을 정리한 것으로 보인다.

청와대 관계자는 "모든 사회 갈등을 그렇게 풀 수는 없고 제한적으로 적용해야 한다고 본다"며 "국가가 갈등의 당사자로 돼 있는 현안들의 경우 정부가 책임있게 결정해야 하지만 공론화 과정의 필요성이 있을 경우 제한적으로 적용한다는 데 큰 틀의 컨센서스가 형성돼있다"고 설명했다.

청와대 주변에서는 신고리 5·6호기 공론화위원회가 건설재개에 따른 보완조치로 사용후 핵연료(고준위 방사성폐기물) 해결방안을 가급적 빨리 마련하라고 권고함에 따라 사용후 핵연료 문제가 다음 공론화 대상이 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한편, 문 대통령이 이날 직접 입장을 표명하지 않고 서면으로 메시지를 내놓은 것은 이미 공론화위원회의 권고로 큰 틀의 가닥이 잡힌 이상 굳이 대통령이 나서서 설명할 필요 없이 '낮은 목소리'를 유지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판단에 따른 것으로 풀이된다.

청와대 관계자는 "대통령이 직접 말씀하시는 것과 집무실에서 영상녹화하는 것, 대변인이 대독하는 것 등 다양한 형태를 건의드렸다"며 "그러나 많은 언론의 보도로 방향이 정리된 느낌이어서 차분하게 입장문을 내는 게 좋겠다고 결정했다"고 설명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