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현 CJ그룹 회장(왼쪽)이 22일 제주 서귀포시 클럽나인브릿지에서 막을 내린 국내 첫 PGA 투어 정규 대회인 ‘더 CJ 컵@나인브릿지’의 초대 챔피언 저스틴 토머스에게 우승 트로피를 전달하고 있다. 이 트로피에는 대회 출전 선수 78명의 이름이 한글로 새겨져 있다.  /연합뉴스
이재현 CJ그룹 회장(왼쪽)이 22일 제주 서귀포시 클럽나인브릿지에서 막을 내린 국내 첫 PGA 투어 정규 대회인 ‘더 CJ 컵@나인브릿지’의 초대 챔피언 저스틴 토머스에게 우승 트로피를 전달하고 있다. 이 트로피에는 대회 출전 선수 78명의 이름이 한글로 새겨져 있다. /연합뉴스
“이런 바람은 생전 처음이다!”(제이슨 데이)

“방향을 종잡을 수 없었다. 퍼팅 브레이크까지 바꿔놨다.”(저스틴 토머스·미국)

제주 바람은 파도 같다. 결을 지니지 않고 잠시 뭉쳤다가 금세 흩어진다. 바람 통로가 있는 긴 편백나무 숲 사이 어디든 헤집고 다녀 방향을 가늠하기 어렵다. 김시우(22·CJ대한통운)는 “낮은 바람이 빗자루처럼 그린을 쓸고 다녀 퍼트와 어프로치 거리를 판단하기 힘들었다”고 말했다.

◆깃대 잠잠해도 상공엔 돌풍

22일 제주 서귀포시 클럽나인브릿지(파72·7196야드)에서 막을 내린 국내 최초 미국프로골프(PGA)투어 정규대회 CJ컵나인브릿지대회(총상금 925만달러)가 그랬다. 선수들의 샷은 터무니없이 길거나 짧았다. 100야드 안팎에서 홀컵 1~2m 반경에 공을 쉽게 떨구는 세계 최고의 샷 고수들이 제주의 ‘미스터리한’ 바람에 쩔쩔맸다.

17번 홀(파3·195야드)이 대표적이다. 김민휘(25)의 아이언샷은 완벽했다. 하지만 공은 그린 20m 앞 벙커에 빠지고 말았다.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김민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만의 실수가 아니었다. 마크 리시먼(호주), 스콧 브라운(미국), 토머스도 똑같이 짧았다. 모두 보기를 적어냈다. 셋 모두 아이언샷 그린 적중률 80% 안팎을 자랑하는 아이언 달인이다. 김민휘는 “그린 위 상공에 바람이 불 줄은 몰랐다”고 했다.

선수들은 1m도 채 안 되는 짧은 퍼트에서도 그린의 고유 굴곡인 한라산 브레이크와 바람을 함께 읽어내느라 보통 15분 정도인 한 홀을 끝내는 데 20분 이상을 써야 했다.

◆송곳 장타자 토머스, 최후의 승자로

신비한 바람을 뚫어낸 주인공은 ‘1000만달러의 사나이’ 토머스였다.

그는 이날 버디 4개, 보기 2개, 더블보기 1개를 묶어 이븐파 72타를 쳤다. 최종합계 9언더파 279타를 기록한 토머스는 이날만 2타를 줄여 동타를 적어낸 리시먼을 2홀까지 가는 연장 혈투 끝에 꺾었다. 시즌 첫 승이자 통산 7승째다. 우승상금 166만5000달러(약 19억원)도 그의 몫이 됐다. 토머스는 지난 시즌 상금왕(992만달러)과 올해의 선수상을 휩쓴 차세대 주자다. 여기에 시즌 막판 페덱스컵 챔피언까지 따내 1000만달러의 보너스도 거머쥐었다. 상금과 보너스로 지난 시즌에만 약 225억원을 벌었다.

18번 홀에서 열린 연장 첫 홀은 무승부로 끝났다. 티샷이 오른쪽으로 크게 밀리면서 위기를 맞은 리시먼은 빽빽한 나무숲 사이로 공을 빼내는 진기한 장면을 연출한 뒤 세 번째 샷으로 공을 그린에 올려 파를 잡아냈다. 연장 경기가 처음인 토머스의 세 번째 샷은 그린과 벙커 경계선 둔덕에 맞고 벙커에 떨어졌지만 정교한 벙커샷으로 파세이브를 했다.

‘우드 대결’로 펼쳐진 연장 두 번째 홀은 토머스의 완승으로 싱겁게 끝났다.

2온을 노린 리시먼의 우드 샷이 오른쪽으로 크게 밀리면서 해저드에 빠진 것이다. 승부사 토머스의 정교한 ‘닥공(닥치고 공격)’이 빛을 발했다. 나흘간 감이 좋았던 5번 우드샷으로 그린 5m 앞 프린지에 정확히 공을 떨궈 2퍼트 버디로 승부를 확정지었다. 네 번째 샷 만에 그린에 공을 올린 리시먼은 더블보기로 다 잡았던 통산 4승째를 눈앞에서 날렸다.
'제주 강풍' 잠재운 토머스…연장혈투 끝에 CJ컵 거머쥐다
◆‘K골프’ 자존심 살린 김민휘와 안병훈

K골프의 초대 챔피언 등극 기대는 무산됐다. 김민휘와 안병훈(26·CJ대한통운)은 막판까지 뒤집기 한판을 노리며 분전했다. 각각 단독 4위, 공동 11위로 고국 팬들 앞에서 맞이한 국내 첫 PGA 대회를 아쉽게 마감했다.

투어 첫승을 기대했던 김민휘는 이날 버디 6개를 잡아냈다. 하지만 전날보다 거세진 바람에 발목이 잡혔다. 더블보기 1개, 보기 4개를 내줘 이븐파 72타(최종합계 6언더파)로 대회를 마무리했다.

전날까지 5언더파 공동 8위를 달리며 투어 첫 승을 노리던 안병훈은 이날 아이언 티샷 실수로 트리플 보기를 범해 실망스럽게 출발했다. 하지만 이후 집중력이 돋보였다.

5번 홀부터 7번 홀까지 세 홀 연속 버디를 잡아내며 첫 홀의 악몽을 떨쳐냈다. 원점으로 상황을 돌린 그는 10번, 11번 홀에서 두 홀 연속 버디를 적어내며 선두 추격 속도를 올렸다.

뒤집기 우승 기대가 커지던 13번 홀(파3) 티샷이 문제였다. 벙커 경사면 러프에 박힌 공을 그린으로 떠내려다 두 번이나 헛스윙에 가까운 실수를 범했다. 공을 감고 있던 러프가 너무 길었다. 네 번째 샷 만에 공을 그린에 올린 그는 2퍼트로 결국 이날 두 번째 트리플 보기를 범했다. 동력을 잃은 안병훈은 이후 버디 1개, 보기 1개를 맞바꾸며 최종합계 4언더파로 대회를 마무리했다.

최진호와 이정환, 이형준 등 PGA투어 직행 티켓을 꿈꿨던 국내 투어 선수들은 모두 중하위권으로 대회를 마쳤다.

서귀포=이관우 기자 leebro2@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