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영기 금융투자협회장(사진)이 ‘한국판 골드만삭스’ 육성을 가로막는 핵심 걸림돌로 증권업계 자율성을 침해하는 금융 규제를 지목했다. 자기자본 4조원 이상인 초대형 투자은행(IB)조차 미국 등 금융산업 선진국에서 가능한 사업을 하지 못할 정도로 손발이 꽁꽁 묶여 있다는 이유에서다.

“사고 친 금융사에는 징벌적 손해배상”

"한국판 골드만삭스 육성 걸림돌은 규제"
황 회장은 23일 서울 여의도 금융투자협회 사옥에서 ‘증권회사 국내외 균형발전 방안 30대 핵심과제’를 발표하면서 증권업을 옥죄는 금융규제를 조목조목 지적했다. 대표적 사례로 증권사가 지분을 5% 이상 투자한 비상장회사의 기업공개(IPO)를 단독으로 주관할 수 없도록 한 제도를 꼽았다.

황 회장은 “골드만삭스 같은 미국의 대형 IB들은 사업성이 있는 작은 회사에 지분을 투자하고 기관투자가도 유치하면서 회사를 키운 뒤 IPO까지 주관한다”고 설명했다. 미국 IB의 일반적인 비즈니스 모델이 한국에선 허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증권사가 지분을 보유한 채 상장을 주관하면 주가를 인위적으로 높여 일반 주주에게 피해를 줄 것이란 우려 때문”이라며 “이런 일을 저지르면 회사가 망할 정도로 징벌적 손해배상을 가해 ‘불법의 싹’을 자르면 될 일”이라고 강조했다.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그는 격으로 무조건 막는 게 능사는 아니라는 주장이다.

기업이 합병할 때 적용하는 가격 산정도 자본시장법(165조4항)으로 규제할 게 아니라 해당 회사 이사회에 맡길 것을 제안했다. 그는 “미국과 영국 일본 등은 이사회가 합병가액을 정하는데 우리는 법에 따라 정하다 보니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보듯 시장 상황을 반영하지 못하는 사례가 발생한다”고 지적했다. 이사회에 실질적 권한과 책임을 부여하면 IB나 회계법인을 통해 합병 대상 기업의 가치를 더욱 정밀하게 분석하고 시장 친화적인 결정을 내릴 수 있다는 논리다.

"한국판 골드만삭스 육성 걸림돌은 규제"
금융 소비자별 보호체계 갖춰야

황 회장은 이날 발표에서 사모펀드 시장을 키우기 위해 투자자 모집 제한을 ‘49인까지 청약권유 가능’에서 ‘49인까지 청약가능’으로 바꿔야 한다고 제안했다. 현행 자본시장법에서는 사모펀드를 구별할 때 청약자가 아니라 청약권유자를 기준으로 하고 있다. 49명에게 청약을 권유했는데 10명이 투자하지 않겠다고 하면 39명만 펀드에 참여할 수 있는 구조다. 추가 투자자를 모집할 수 없다. 사모펀드 투자 광고를 할 수 없는 것도 청약권유 규정에 걸리기 때문이다. 미국은 사모펀드를 나누는 기준을 실제 청약인 수(기준 150명)로 하고 있다. 황 회장은 “사모펀드 기준을 실제 청약자 수로 하는 것은 물론 사모펀드의 인적 기준에서 벗어나 있는 전문투자자 범위도 크게 늘려야 한다”고 했다.

유망 스타트업(초기 벤처기업)에 돈이 몰릴 수 있도록 투자자의 자금 회수를 좀 더 수월하게 해야 한다고도 했다. 비상장기업 주식을 거래할 때 양도소득세를 없애줘야 한다는 주장이다. 유가증권시장과 코스닥시장, 코넥스시장에서 주식을 거래할 때 소액주주는 거래세만 내고 양도세를 물지 않지만 비상장기업의 주식을 거래하는 K-OTC에서는 10~20% 양도세가 부과된다. 황 회장은 “자금을 제대로 회수할 수 없다면 스타트업에 돈이 몰리기 어렵다”며 “상장에 따른 부담을 크게 느끼는 우량 중소기업이 원활하게 자금을 조달할 수 있도록 세법 개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금융소비자 보호를 투자자의 금융지식에 따라 다르게 접근해야 한다는 의견도 밝혔다. 80대 노인을 대상으로 하는 규제와 ‘슈퍼개미’로 불리는 전문 개인투자자에게 적용하는 규제를 달리해야 한다는 얘기다. 그는 “지금은 자기 책임 아래 고위험·고수익 상품에 투자할 수 있는 전문투자자에까지 여러 제약을 두고 있다”며 “천편일률적 보호장치가 시장의 역동성을 헤치고 있다”고 했다. 황 회장은 “엄격한 금융규제가 금융투자회사에 대한 신뢰 부족에서 비롯됐다는 점은 반성해야 한다”며 “이제는 시장의 힘과 정화작용을 믿어볼 때”라고 말했다.

박종서/나수지 기자 cosmo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