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농‧귀촌에 성공한 사람의 얘기는 뜨겁게 공유된다. 반면 실패한 사람들의 사례는 알기 힘들다. 마음의 상처를 입은 뒤 조용히 도시로 되돌아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농림축산식품부의 귀농귀촌 정착실태 등의 자료를 토대로 ‘더농부’ 블로그에 5회에 걸쳐 소개된 ‘실패에서 배운다’ 시리즈를 상·하 2편으로 요약해 싣는다.

1. 땅 계약 과정에서의 갈등

◆이장 말 들었다가 6억원 날린 사례=이형욱 씨(60‧가명)는 야생화 동호회 활동 중 찾았던 한 지역의 풍광에 매료됐다. 지역 이장과 만나 이야기를 나눠보니 말이 꽤 잘 통했다. 공동체 마을 및 야생화 단지 조성을 함께 논의했다. 이장 말을 믿은 이 씨는 개인적으로 공동체 마을 입주민을 모집했다. 이 씨는 이장으로부터 논밭 40만평을 빌리기로 하고 야생화단지에 3억원을 투자했다.

하지만 터를 닦는 과정에서 문제가 터졌다. 이장이 단지 입구의 땅을 사서 시세보다 비싼 가격을 요구했다. 이듬 해엔 빌린 논밭에 대한 계약 연장을 해주지 않았다. 이 씨는 종자대금 3억원을 날렸고 마을 입주 계약을 파기하면서 입주 예정자들의 계약금을 개인 돈으로 돌려줘야 했다. 총 6억원의 투자금을 손해봤다.

이후 이 씨는 다른 지역으로 이동해 빠가사리 다슬기 등을 잡아 팔면서 생계를 유지했지만 집안을 제대로 돌보지 못해 아내와 이혼하는 등 가정의 불화로 이어졌다.

◆‘지인 소개’ 믿었다가 아내가 우울증 걸린 경우=귀농을 준비했던 김태형 씨(64‧가명)는 아내 친구의 형제를 통해 살만한 임야를 소개 받았다. 2만3000평 규모의 임야를 원래 가격보다 500만원 싸게 판다고 했다. 아는 사람을 통한 소개라 별 의심없이 지역 내 법무사를 통해 땅을 구입했다.

하지만 이후 다른 사람으로부터 해당 토지의 주인이 두 명이며 땅 자체에 문제가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확인해보니 아내 친구의 형제들이 아내로부터 인감도장을 받아 해당 임야의 절반을 그 형제 중 한 명의 명의로 돌려놓았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김 씨는 사기죄로 형사 소송을 진행했지만 패소했다. 아내는 충격이 심해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다.
2. 산 다음에야 부적절한 땅임을 알게된 사람들

◆멧돼지 난입하는 땅을 빌리다=안성주 씨(35‧가명)는 땅을 빌린 사람에게서 다시 한번 땅을 빌렸다. 그래서 정식 계약과정을 거치지 않고 구두로 계약을 진행했다. 좋은 땅이라고 소개를 받은 땅이었지만 막상 확인해보니 전기나 물이 들어오지 않았다. 멧돼지가 난입해 묘목도 망가졌다.

친환경 농사를 지으려고 보니 걸림돌도 컸다. 친환경인증을 받기 위해서는 농지원부가 필요한데 땅에 대한 계약서가 있어야만 가능했다. 결정적으로 땅의 실제 주인이 재계약에 응해주지 않아 안 씨는 어쩔 수 없이 다른 땅을 찾아 재이주했다. 이 과정에서 시간적 금전적 손실이 발생했으나 하소연할 곳이 없었다.

◆산 위에서 농사를 짓게 된 사례=한귀주 씨(51‧가명)는 귀농을 앞두고 최대한 빨리 자리를 잡고 싶었다. 당시 싼 가격에 나온 땅을 집과 함께 사들였는데 결과적으로 신중하지 못한 선택이었다. 땅은 맹지(주변에 도로가 없어 통행할 수 없는 땅)였고 진입로 확보도 쉽지 않았다. 경사가 심해 농사를 짓기에도 굉장히 위험했다. 산 위에서 농사를 시도하느라 온갖 고생은 다 했지만 결국 농사 규모를 줄여야 했다.
3. 땅 주인이나 지자체의 개발계획에 밀려난 사람들

◆토착민 떼쓰기에 결국 이주=도시에서 자영업을 하던 송도백 씨(49‧가명)는 지역 유지들과 계약서를 쓰고 땅을 빌려서 마늘 농사를 시작했다. 그 시기 마늘 값이 많이 오르자 땅을 빌려준 유지들은 땅을 다시 회수하겠다고 했다. 물론 계약 만기가 돌아오지 않은 시점이었다. 법적으로 따지고 들려면 들 수도 있었다. 하지만 동네 사람들 얼굴을 아예 안 볼 생각을 해야했기 때문에 그러지 못했다. 노인이 대부분인 시골에선 계약서가 효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나중에야 알았다.

송 씨가 한 군데에서 계속 지은 농사 규모는 1000여평에 불과하고 나머지 1000~2000평은 계속 임차했다 내주고 다시 임차하는 방식으로 해마다 옮겨다녔다. 농사일 자체는 할만했지만 지역에 정을 붙이기가 힘들었다. 송 씨는 젊은 귀농인들 간 네트워크가 잘 구축돼있는 다른 지역으로의 이주를 준비 중이다.

4.농산물 판로 확보에 실패한 사람들

◆이색 농산물 키웠다가 판로 확보 실패=양모진 씨(67‧가명)는 귀농 예정 지역에서 많이 농사짓고 있는 작물을 추천 받았다. 하지만 양 씨는 지역 권장 작물보다 호두 체리 피칸 등에 더 관심이 많았다. 원래 논이었던 토지를 일부러 개량해 호두와 체리를 심었다. 하지만 판로를 확보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지역에서 대단위로 농사를 짓고 있거나 권장하는 작목의 작목반 소속이었다면 묘목 비용도 지원받고 농협 수매를 통해 싼 가격으로나마 판로가 보장될 수 있었지만 양 씨의 경우 그게 불가능했다. SNS 판매에 힘을 써보려 했지만 컴퓨터에 익숙하지 않아 지지부진했다.

양 씨는 귀농 초기 독불장군처럼 굴었다가 손해가 커졌다고 생각했다. 아내에게 함께 귀농하자고 설득하는 데도 실패하면서 결국 밭을 매물로 내놨다.

◆산세 좋은 땅 고집하다 실패한 사례=임지택 씨(71‧가명)는 땅을 알아볼 때 산세가 좋고 한적한 것을 우선순위로 뒀다. 이 조건을 충족하면서도 저렴한 집을 찾아 근처 땅까지 함께 사서 귀농했다. 땅에 몰입하다보니 재배환경이나 작목 선택, 소득창출 방법에 대한 고려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막상 농사를 지으려고 보니 선택한 땅의 일조 조건이 워낙 나빴다. 적합한 작목을 선택하는 일조차 힘들었다. 벼농사를 일부 했지만 판매할 정도의 물량이 되지 않았다. 대부분 자가 소비하거나 지인에게 나눠줬다. 모임을 통해 쌀을 팔기도 했지만 고정된 판로는 없었다. 농작물 판매 수익이 예상보다 크게 떨어지자 귀농 생활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5.싼 농산물 가격에 경제난 겪은 사람들

◆예상보다 낮은 농협 수매가에 좌절=노찬영 씨(57‧가명)씨는 한 중견기업에서 중국 주재원 생활을 20년 가량 했다. 오랜 타향 생활에 지쳐 귀농을 택했다. 아내의 반대에 부딪혔지만 귀향을 원하는 장인장모와 함께 아내를 설득, 퇴직금을 쏟아부어 장인 장모의 고향으로 내려왔다. 이렇게 노 씨와 아내 뿐 아니라 장인 장모까지 농사일에 뛰어들었다.

노 씨 가족은 농사를 열심히 지었지만 농협 수매가가 턱없이 낮았다. 연 순수익이 500만원도 채 안 됐다. 4인가구의 생활을 유지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노 씨는 고된 농사로 허리 수술까지 받았다. 사들인 땅과 주택을 내놨지만 바로 팔리지 않았다. 현재 장인 장모는 귀농지에 머물고 있고 노 씨와 아내는 일자리를 구해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경제난에 귀농 포기=이철경 씨(56‧가명)는 퇴직금을 투자해 2900평 규모 밭농사를 지었다. 하지만 귀농 5년 만에 포기하고 다시 도시로 돌아왔다. 결정적인 이유는 아내와의 불화와 이혼이었지만 그 계기를 제공한 건 고된 농사일에 비해 돌아오는 보상이 터무니 없이 적다는 점이었다.이 씨는 수확한 농산물 중 일부는 도매시장에, 일부는 지인을 통해 판매했다. 농산물 값이 많이 떨어졌을 때는 직거래 장터에도 내놓는 등 다양한 판로를 모색했다. 하지만 농자재 구입 등 추가로 들어가는 비용에 비해 농산물 가격 자체가 너무 낮았다. 부부가 힘들게 농사를 짓다보니 서로 배려하려는 마음의 여유도 사라졌다. 결국 가정의 불화로 이어졌고 이 씨는 귀농 생활을 접었다.

6. 임금 체불 등으로 농사 포기한 사람들

◆한달 50만원 월급에 귀농 접은 경우=변재환 씨(53‧가명)은 농촌에서 노동자로 취업했지만 세 달만에 도시로 돌아왔다. 변 씨는 직장의 구조조정으로 퇴직한 후 자녀 학비를 위해 제주에서 돈을 벌자는 생각으로 홀로 귀농했다. 농창업에 투자할만큼 큰 돈이 없어 제주시 귀농지원센터에서 소개받은 한 농가에 인턴으로 들어갔다.

인턴으로 들어갈 때 계약한 월급은 80만원. 하지만 농장주는 숙식을 제공한다는 이유로 월 50만원만 줬다. 몇 달 후엔 바로 그만두라는 통보를 받았다. 농가 인턴이란 제도는 있지만 사후관리나 검증 제도가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았던 탓에 제대로 된 도움을 받지 못했다. 변 씨는 부부가 함께 일을 하거나 가족이 함께 이주하지 않는 이상 홀로 귀농해 가족을 부양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느꼈다.

◆농장 경영난에 임금 못 받은 사례=목사 송신창 씨(62‧가명)는 농목회를 통해 여러 농부들을 알게 됐다. 현장에서 농업 노동 경험을 해보자고 결심하고 농장에 취업했다. 하지만 일했던 사회적 기업, 한우농가, 젖소농가 등은 경영난에 시달리고 있었다. 임금을 제대로 받지 못할 수 밖에 없었다. 금방 그만둬야 했다.

스스로 고추농사를 지어보려고 했지만 친환경 농업의 원칙을 지키려다 매해 탄저병에 시달렸다. 겨우 건진 고추는 개인 블로그와 도시 지인, 기존 인맥을 통해 100% 직거래했지만 수익을 제대로 내지는 못했다. 트랙터 씨앗 거름 농자재 하우스 및 농번기 인력조달 등에 필요한 영농비용을 계속 들어갔다.

FARM 에디터 고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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