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포기와 군대 보유 금지를 골자로 하는 일본 평화헌법이 ‘존망지추(存亡之秋)’의 상황을 맞이했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이끄는 자민당이 지난 22일 치러진 중의원(하원의원) 선거에서 압승하며 개헌 추진에 속도가 붙었기 때문이다. 이번 중의원 선거에서 집권 자민당과 연립여당인 공명당은 개헌 발의선인 중의원 의석의 3분의 2(310석)를 가뿐히 넘는 313석을 확보했다. 아베 총리도 선거 압승 일성으로 “여야는 물론 국민과 개헌에 대해 폭넓은 합의를 형성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힐 정도로 개헌에 적극적이다. 주변국 침략과 2차 세계대전 발발의 책임을 물어 1946년 탄생한 일본 헌법이 공포 70여 년 만에 대변화의 기로에 선 것이다.
일본 의회 장악한 개헌 찬성파… 아베 정권 "하늘이 준 기회" 속도전
“당선자 84%가 개헌 찬성”

중의원 선거가 치러진 직후인 25일 요미우리신문은 “중의원 당선자의 84%가 개헌에 찬성하는 것으로 조사됐다”고 보도했다.

여당인 자민당과 공명당만으로도 개헌 발의가 가능한 수준일 뿐 아니라 야당 내에서도 희망의당과 일본유신회의 등 개헌에 우호적인 세력이 의석의 절대다수를 점한 영향이 컸다. 요미우리신문이 431명의 설문조사 답변을 분석한 결과 자민당 당선자의 97%, 공명당 당선자의 92%가 개헌에 찬성했다. 제2야당인 희망의당 소속 당선자의 대다수(87%)도 개헌에 우호적이었다. 일본 유신회는 조사 대상 전원이 개헌에 찬성했다.

반면 제1야당인 입헌민주당 소속 당선자 중 개헌에 반대 의사를 밝힌 경우는 61%에 불과했다. 개헌 최대 저지세력이라는 입헌민주당 내에서조차 40% 가까운 당선자가 개헌 여부를 두고 유보적인 태도를 보인 것이다. 진보성향인 아사히신문 설문에서도 조사 대상의 82%가 개헌에 찬성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등 큰 흐름에는 차이가 없었다.

전쟁을 금지하고, 군대를 보유할 수 없도록 한 평화헌법 개정은 2011년 말 아베 총리가 집권한 이래 줄기차게 추진해온 숙원 정책이다. 개정을 추진하려는 핵심 내용은 헌법 9조의 전쟁 포기 조항(1항)과 군대 보유 포기 조항(2항)이다. 다만 두 개 조항을 모두 없애거나 내용을 전면적으로 바꾸는 것은 명분도 약하고, 국민 여론상 반대가 적지 않은 까닭에 자위대의 존재 근거를 명확히 하는 제3항을 신설해 1항과 2항을 사실상 무력화하는 쪽으로 준비 중이다. 그리고 ‘전쟁할 수 있는 나라’ ‘보통국가화’라는 명목을 포장으로 내걸었다.

개헌세력에는 최적의 조건

이번 중의원 선거 이전에도 자민·공명 연립여당은 개헌선을 크게 웃도는 324석을 점유하고 있었던 만큼 개헌 추진이 이론적으로는 가능했다. 하지만 의회에서 개헌을 발의하더라도 국민투표라는 벽을 넘을지 자신할 수 없었던 데다 ‘모리토모학원 스캔들’ ‘가케학원 스캔들’ 등 각종 사학 비리에 아베 총리가 연루되면서 개헌 추진은 후순위로 밀렸다.

하지만 이번 선거 압승을 계기로 개헌 문제가 빠르게 추동력을 얻는 모습이다. 당장 아베 총리부터 군불 때기에 여념이 없는 모습이다. 지난 23일 선거 압승 직후 열린 기자회견에서도 아베 총리는 “여야를 포함해 폭넓은 합의를 형성하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거듭 강조했다.

개헌 지지세력의 움직임도 노골화하고 있다. 25일에는 개헌 추진 보수단체인 일본회의 관련 모임인 ‘아름다운 일본의 헌법을 만드는 국민의 모임’이 주도하는 7000여 명이 참여한 집회가 도쿄에서 열렸다. 자민당 의원도 9명이 참여했다. 이 자리에서 아베 총리의 측근인 에토 세이이치 총리 보좌관은 “하늘이 준 기회를 얻은 만큼 개헌안 처리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개헌 추진을 위한 최적의 조건이 갖춰진 만큼 ‘쇠뿔도 단김에 뽑는다’는 식으로 개헌 작업이 조만간 본격화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아사히신문 등 일본 언론에 따르면 아베 정권은 이번 총선 결과를 토대로 올가을 특별국회 이후 임시국회를 열어 헌법 개정안을 제안할 가능성이 높다. 늦어도 내년 정기국회에서 개정안을 발의해 통과시킨 뒤 곧바로 국민투표를 거쳐 헌법 개정을 마무리할 것으로 본 것이다.

고삐 풀린 일본…급변하는 동북아 정세

아베 총리가 추진해온 개헌 작업이 현실화되면 동북아시아 안보 지형에도 큰 변화가 있을 것이란 관측이다. 2015년 집단적 자위권(동맹국이 공격받으면 자국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해 반격하는 권리)을 행사할 수 있도록 안보법제를 개정한 데 이어 헌법까지 바뀔 경우 ‘전쟁 가능한 일본’을 제어할 수단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동안 일본은 사실상 군대인 자위대를 보유하고 있었지만 평화헌법 탓에 그 기능을 국내 치안 유지에 한정해야 했다. 자위대는 1954년 발족 이래 일본이 공격받았을 때 필요한 최소 범위의 방위력만 행사한다는 전수방위(專守防衛)의 원칙을 고수해왔다. 이에 따라 최근 강도가 세지고 있는 북한의 위협에도 군사력을 동원하지 못했다.

하지만 개헌이 이뤄지면 미국이 아닌 직접 당사자인 일본이 북한을 겨냥한 군사 옵션을 취할 수 있다. 유사시에는 한반도에 자위대 진입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앞서 일본 정부는 지난 8월 방위비를 역대 최고 수준인 5조2551억엔(약 52조107억원)으로 확대하겠다는 방침을 확정했다. 아베 정권은 2013년부터 매년 방위비를 늘려왔다. 이를 두고 개헌에 대비한 전초작업이라는 시각도 적지 않다.

다만 아베 총리의 개헌 작업 속도를 늦출 변수로는 부정적인 국민 여론이 우선 거론된다. ‘자위대 존재 명기’에 대한 일본 국민의 시각은 여전히 곱지 않다. 보수 성향의 요미우리신문이 지난 10~11일 시행한 여론조사에서도 개헌에 대한 여론은 찬성 35%, 반대 42%로 반대가 더 많았다. 무리하게 개헌을 밀어붙일 경우 ‘역풍’을 맞을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다.

이와 함께 센카쿠열도 등에서 영토 분쟁을 경험한 중국이나 북방영토 마찰이 잠복 중인 러시아 등 주변국과의 긴장이 높아질 가능성도 아베 정권의 개헌 속도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요인으로 거론된다.

도쿄=김동욱 특파원 kimd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