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조선통신사 5000리 길
‘에도(도쿄)로 향하는 30리 길이 인파로 빈틈없이 이어져 있으니 대체로 수백만 명에 이르렀다.’ 조선 문인 김인겸이 1764년 조선통신사(朝鮮通信使)로 일본에 갔을 때의 모습을 묘사한 대목이다. 조선통신사는 조선이 일본 막부(幕府)에 보낸 외교사절이다. 1413년부터 약 400년간 20차례 파견했다.

임진왜란 전에는 왜구 금지를 요구하기 위해 보냈으나 왜란 후엔 포로 송환과 일본 정세 탐색 등의 목적이 더 컸다. 여정은 한양에서 육로로 출발한 뒤 부산에서 쓰시마 번주의 안내로 해로를 이용했고 시모노세키와 오사카를 거쳐 교토로 향했다. 조선 후기부터는 막부가 있는 도쿄까지 갔다. 약 2000㎞(5000리)를 가는 데 6개월~1년이 걸렸다.

파견 인원은 400~500명에 이르렀다. 이들의 대규모 행차에 일본 전역이 들썩였다. 막부의 쇄국정책 때문에 외국과의 교류가 줄어든 상황에서 이렇게 거창한 사신 행렬은 최대의 볼거리였다. 일본은 이들을 ‘섬이 가라앉을 정도’로 성대히 맞았다. 통신사가 지나는 곳에는 1년 전부터 특별세를 부과했다. 부담이 너무 커서 농민반란이 일어날 정도였다. 쓰시마에서 합류한 현지 수행원을 합쳐 2000여 명을 1년 가까이 대접했으니 비용이 엄청날 수밖에 없었다.

막부 측으로선 조선통신사를 조공사절로 선전하면서 국가적 자부심을 높일 수 있었다. 조선으로서도 일본의 국정을 엿보면서 왜구의 폐해를 줄이고 수행 무관들을 통해 서양 신무기를 몰래 탐색하려는 속셈이 있었다.

대개의 통신사는 왜란 등의 상처 때문에 일본을 부정적으로 보려 했으나 1719년 파견된 신유한(申維翰)은 《해유록(海游錄)》에서 일본인의 질서정연함과 기록 습성, 발달된 출판문화, 청결한 위생 등을 높이 평가했다. 앞서 체류한 강홍중은 ‘시장에 물건이 가득하고 여염집에 쌀이 넘친다’며 경제력에 감탄했다.

아픔도 많았다. 1703년에는 통신사 일행이 쓰시마에 도착하기 직전 풍랑으로 모두 희생되고 말았다. 수행 인원이 많다 보니 하인들이 행패를 부려 원성을 사기도 했다. 닭을 훔치다 들켜 패싸움을 벌이거나 현지인을 심하게 모욕했다가 칼에 찔려 죽는 사고까지 일어났다.

마지막 사행은 1811년이었다. 그로부터 65년 뒤인 1876년 강화도조약이 체결되고 나서는 통신사 이름이 수신사(修信使)로 바뀌었다. 문화 전수자에서 수용자로 변한 것이다. 고종은 1882년까지 4차례 수신사를 파견하며 외교적 국면 전환을 꾀했으나 결국 나라를 빼앗겼다.

어제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조선통신사 기록물의 이면에는 이런 역사의 명암이 함께 드리워져 있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