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완 칼럼] 호랑이 등에 올라탄 '여민정치(與民政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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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대사를 중론에 맡기는 건 무모한 일
부도사태 맞았던 그리스 등 반면교사 삼아
지속가능한 국리민복의 책임정치 절실
박재완 < 성균관대 교수·한반도선진화재단 이사장 >
부도사태 맞았던 그리스 등 반면교사 삼아
지속가능한 국리민복의 책임정치 절실
박재완 < 성균관대 교수·한반도선진화재단 이사장 >
공정률이 30%에 가까웠던 신고리 원전 5, 6호기 건설을 놓고 진행된 공론조사가 마무리됐다. 다행히 공사는 재개하기로 가닥이 잡혔지만, 뒷맛이 개운치 않다. 정부가 이런 방식의 공론조사를 앞으로 확대할 뜻을 내비쳤기 때문이다.
원자력이든 화석연료나 신재생에너지든 비용과 효과를 비롯한 타당성을 분석하려면 고도의 전문성이 필수다. 일반인이 짧은 기간에 이런 전문성을 습득하기는 어렵다. 게다가 국가에너지 수급은 세대를 뛰어넘어 백년대계를 도모해야 할 사안이다. 이처럼 중차대한 정책까지 대중 눈높이에 따라 다수결로 결정하는 일은 부질없기도 하려니와 무모하다.
올해 초 다보스포럼의 의제는 ‘소통(responsive)과 책임(responsible)의 리더십’이었다. 소통, 곧 국민의 기대와 요구에 적극 대응하는 ‘여민(與民)정치’는 민주주의의 필요조건이다. 하지만 이처럼 참여와 대표성을 중시하고 중론(衆論)을 좇는 것은 절차적 민주주의에 그친다. 민주주의의 충분조건은 국리민복의 실체적인 관점에서 책임과 지속 가능성을 담보하는 ‘위민(爲民)정치’다. 충분조건까지 갖춘 정론(正論)은 필요조건만 채운 중론과 종종 배치된다. 어떤 정책이든 이해당사자는 ‘불합리한 편견’을 갖는 반면에, 한 발짝 떨어진 일반 국민은 ‘합리적으로 무관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문가의 자문, 검증과 중재는 국정 운영에 불가결한 보완재다.
‘철인(哲人)정치’를 하자는 뜻이 아니다. 소통에 치중하는 ‘여민’과 책임을 부각하는 ‘위민’이 조화를 이뤄야 성숙한 민주주의에 이를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출범 6개월을 맞는 문재인 정부는 지나치게 소통을 강조하고 상대적으로 책임은 소홀히 다루는 모습이다. 신고리 5, 6호기 사례가 대표적이다.
엄밀히 따지면 소통에 앞서 다수의 지지를 받을 것으로 예상되는 정책들이 서둘러 발표된 경우도 많았다. 공공기관 비정규직의 지위 전환, 최고세율 인상, 건강보험 보장성의 획기적 확대, 기초연금 인상과 아동수당 신설 등이 그런 범주에 속한다. 사실 ‘내 삶을 책임지는 국가’라는 새 정부의 국정 목표부터 철저히 중론을 겨냥한 정향을 띠고 있다.
이를 아무리 소통과 참여로 포장해도 그 본질은 표심 영합정책에 가깝다. 물론 역대 어느 정부도 이런 점에서 자유롭지는 않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분석에 따르면, 외환위기 이후 20년 동안 우리는 조세체계 왜곡이 심화되고 정부 지출 효율은 하락했다. OECD 회원국 가운데 악화된 정도가 가장 심하다. 정도 차이는 있겠지만 좌파와 우파정부를 막론하고 인기에 영합했기 때문이다.
우리만 그런 것도 아니다.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 국민투표에서 보듯이 최근 EU에선 반(反)난민 등을 내세운 포퓰리즘 성향의 정당들이 약진하고 있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표방한 신고립주의도 그 연장선에 있다. 그렇다고 해서 문재인 정부의 정책기조가 면책되지는 않는다.
‘위민’의 제동장치를 갖추지 않으면 ‘여민’은 호랑이(중론) 등에 올라탄 기세로 폭주할 수밖에 없다. 그 종착역은 어디일까. 21세기에 국가 부도 사태까지 이른 아르헨티나와 그리스, 그리고 최근의 베네수엘라를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아야 한다. 나라 살림이 어려워지자 그리스에선 2015년에만 20만여 명이 조국을 등졌다. 대부분 젊고 숙련기술을 지닌 전문가와 부유층이었다. 이는 20세기 중반 미국 보스턴시장을 네 차례나 지낸 제임스 컬리가 남발한 복지프로그램 실패 사례와 비슷해 21세기 ‘컬리 효과’로 불린다.
재정, 교육, 에너지 등 백년대계가 긴요한 분야엔 큰 틀을 결정하는 독립위원회를 설치하고 위원들 임기도 10년쯤 길게 보장하면 좋겠다. 금융통화위원회가 통화신용정책의 전권을 지닌 것과 같은 취지다. 특히 독립재정위원회는 급증하는 추세로 이미 40개 가까운 나라가 도입했다. 새삼 존 F 케네디 전 미국 대통령의 “국가가 내게 뭘 해 줄지가 아니라, 내가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지 물어라”는 명연설을 다 함께 곱씹어봤으면 한다.
박재완 < 성균관대 교수·한반도선진화재단 이사장 >
원자력이든 화석연료나 신재생에너지든 비용과 효과를 비롯한 타당성을 분석하려면 고도의 전문성이 필수다. 일반인이 짧은 기간에 이런 전문성을 습득하기는 어렵다. 게다가 국가에너지 수급은 세대를 뛰어넘어 백년대계를 도모해야 할 사안이다. 이처럼 중차대한 정책까지 대중 눈높이에 따라 다수결로 결정하는 일은 부질없기도 하려니와 무모하다.
올해 초 다보스포럼의 의제는 ‘소통(responsive)과 책임(responsible)의 리더십’이었다. 소통, 곧 국민의 기대와 요구에 적극 대응하는 ‘여민(與民)정치’는 민주주의의 필요조건이다. 하지만 이처럼 참여와 대표성을 중시하고 중론(衆論)을 좇는 것은 절차적 민주주의에 그친다. 민주주의의 충분조건은 국리민복의 실체적인 관점에서 책임과 지속 가능성을 담보하는 ‘위민(爲民)정치’다. 충분조건까지 갖춘 정론(正論)은 필요조건만 채운 중론과 종종 배치된다. 어떤 정책이든 이해당사자는 ‘불합리한 편견’을 갖는 반면에, 한 발짝 떨어진 일반 국민은 ‘합리적으로 무관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문가의 자문, 검증과 중재는 국정 운영에 불가결한 보완재다.
‘철인(哲人)정치’를 하자는 뜻이 아니다. 소통에 치중하는 ‘여민’과 책임을 부각하는 ‘위민’이 조화를 이뤄야 성숙한 민주주의에 이를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출범 6개월을 맞는 문재인 정부는 지나치게 소통을 강조하고 상대적으로 책임은 소홀히 다루는 모습이다. 신고리 5, 6호기 사례가 대표적이다.
엄밀히 따지면 소통에 앞서 다수의 지지를 받을 것으로 예상되는 정책들이 서둘러 발표된 경우도 많았다. 공공기관 비정규직의 지위 전환, 최고세율 인상, 건강보험 보장성의 획기적 확대, 기초연금 인상과 아동수당 신설 등이 그런 범주에 속한다. 사실 ‘내 삶을 책임지는 국가’라는 새 정부의 국정 목표부터 철저히 중론을 겨냥한 정향을 띠고 있다.
이를 아무리 소통과 참여로 포장해도 그 본질은 표심 영합정책에 가깝다. 물론 역대 어느 정부도 이런 점에서 자유롭지는 않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분석에 따르면, 외환위기 이후 20년 동안 우리는 조세체계 왜곡이 심화되고 정부 지출 효율은 하락했다. OECD 회원국 가운데 악화된 정도가 가장 심하다. 정도 차이는 있겠지만 좌파와 우파정부를 막론하고 인기에 영합했기 때문이다.
우리만 그런 것도 아니다.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 국민투표에서 보듯이 최근 EU에선 반(反)난민 등을 내세운 포퓰리즘 성향의 정당들이 약진하고 있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표방한 신고립주의도 그 연장선에 있다. 그렇다고 해서 문재인 정부의 정책기조가 면책되지는 않는다.
‘위민’의 제동장치를 갖추지 않으면 ‘여민’은 호랑이(중론) 등에 올라탄 기세로 폭주할 수밖에 없다. 그 종착역은 어디일까. 21세기에 국가 부도 사태까지 이른 아르헨티나와 그리스, 그리고 최근의 베네수엘라를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아야 한다. 나라 살림이 어려워지자 그리스에선 2015년에만 20만여 명이 조국을 등졌다. 대부분 젊고 숙련기술을 지닌 전문가와 부유층이었다. 이는 20세기 중반 미국 보스턴시장을 네 차례나 지낸 제임스 컬리가 남발한 복지프로그램 실패 사례와 비슷해 21세기 ‘컬리 효과’로 불린다.
재정, 교육, 에너지 등 백년대계가 긴요한 분야엔 큰 틀을 결정하는 독립위원회를 설치하고 위원들 임기도 10년쯤 길게 보장하면 좋겠다. 금융통화위원회가 통화신용정책의 전권을 지닌 것과 같은 취지다. 특히 독립재정위원회는 급증하는 추세로 이미 40개 가까운 나라가 도입했다. 새삼 존 F 케네디 전 미국 대통령의 “국가가 내게 뭘 해 줄지가 아니라, 내가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지 물어라”는 명연설을 다 함께 곱씹어봤으면 한다.
박재완 < 성균관대 교수·한반도선진화재단 이사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