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음악극은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대금 명인 박종기(1879~1941)와 김계선(1891~1943)의 기구한 삶과 예술세계를 그린다. 두 명인은 젊은 시절 인연을 맺은 뒤 연락이 끊긴 기생 산월을 그리워하며 산다. 산월은 절륜의 재주를 가진 인물로 두 명인의 절절한 음악혼을 알아본다. 그러던 어느 날 두 명인 앞에 홀연히 인력거 한 대가 나타난다. 이 인력거를 타고 가자 그곳에는 산월의 딸이 두 명인을 기다리고 있다. 딸의 이름도 어머니와 똑같다.
두 명인은 딸과 얘기를 나누며 마치 어머니를 만난 듯한 느낌을 받는다. 과연 이 사람은 정말로 그 산월의 딸일까. 혹시 과거의 산월이 젊은 몸을 입어 다시 태어난 건 아닐까. 두 명인이 시간을 뛰어넘어 산월을 만났던 과거로 간 건 아닐까. 무대에는 흰 연기를 피우거나 뒤에 어두컴컴한 숲을 조성하는 등 이런 의문이 들게 하는 몽환적 분위기가 흐른다.
극은 두 명인의 험난했던 지난 세월과 인연의 기구함을 돌아보는 내용 위주로 흘러간다. 박종기는 이렇게 말한다. “다 팔자소관이라. 생각해 보면 말이여, 내가 어쩌고 싶다고 해서 뭣이 그렇게 된 것이 아니란 말여. 그냥 그렇게 되두룩 돼 있던 거라. 그냥 그렇게 떼밀려 갖고 여그꺼정 온 것이라.” 언뜻 보면 ‘운명에 저항하기보다 순응하며 살아야 한다’는 세계관이 반영돼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두 명인은 비극을 겪으면서도 대금을 불고 어깨춤을 추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지난 세월 이들은 항상 대금을 손에 꼭 쥐고 살았다. 대금에 대한 열정을 바탕으로 쓰러져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용기를 얻었다. 이들에게 예술은 ‘운명의 기구함에 맞서 나를 다시 일으켜주는 지팡이 같은 존재’였던 셈이다.
무대가 화려하지는 않다. 극은 줄곧 두 명인과 산월의 술상머리에서 진행된다. 배우의 숨소리가 들릴 만큼 무대와 객석의 거리가 가까워 몰입이 잘 된다는 건 장점이다. 국악은 물론 20세기 초 유행한 스윙재즈 등 대중음악까지 풍성한 음악을 선보인다. 배경음악을 연주하는 악기 가운데는 대금, 아쟁, 소리북 등 전통악기뿐만 아니라 신시사이저, 드럼, 클라리넷 등도 있다. 대금을 연주하는 박명규 씨가 박 명인의 고손자다. 공연은 오는 24일까지, 전석 2만원. 한복을 입고 가면 단돈 1000원에 공연을 볼 수 있다.
양병훈 기자 h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