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의 향기] 배우 김주혁의 따뜻한 말 한마디
작년 봄, 대전 세트장에서 촬영 중이던 영화 ‘공조’의 현장을 찾았다. 한참 어두컴컴한 세트장에서 액션 촬영하는 것을 지켜보다 카메라 세팅을 바꾸는 동안 볕이 좋은 밖으로 잠시 나왔는데, 마침 배우 김주혁도 잠시 쉬는 시간을 즐기던 터였다. 음료수를 나눠 마시며 잡담을 하던 중 갑자기 김주혁이 필자와 필자 회사 동료에게 짧은 한마디를 툭 던졌다. “너네도 참 오래 한다.” 어떤 뜻에서 그런 말을 했는지 너무 잘 알 것 같았다. 영화 일을 오래 한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새삼 떠올려보니 우리가 서로 오랫동안 봐왔다는 깨달음의 표시이자, 또 이렇게 다시 만나 작품을 함께한다는 것이 반갑고 좋다는 그만의 표현이었다. “그러게요. 또 같이하게 되니 저도 좋네요”라고 짧게 답했던 기억이 난다. 볕이 아주 좋았던 봄날의 오후였다.

처음 김주혁과 함께한 작품은 2002년 개봉한 ‘YMCA 야구단’이란 영화다. 월드컵이 열리는 해에 개봉하는 야구 영화라니, 쉽지 않은 것이 많다고 웃으며 이야기를 나눈 기억이 난다. 모든 배우가 야구연습을 오랫동안 한 영화여서 함께 보낸 시간이 유독 많았다. 한강변 야구장에서 흙먼지를 휘날리며 뛰던 기억도 선명하다. 가장 기억에 남는 하루는 당시 한국야구위원회(KBO) 홍보위원이던 선동열 선수가 연습장을 찾은 날이다. 취재팀이 지켜보는 가운데 투수 역을 맡은 김주혁에게 선 위원이 다가와 자세 교정을 지도했을 때 왠지 모르지만 둘 다 꽤 긴장하던 모습이 기억난다. 키가 무척 큰 두 남자가 투구폼을 잡던 그 찰나의 공간과 공기가 잊히지 않는다.

지나간 해와 작품 수를 헤아려 보니 15년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 김주혁과 여섯 개 작품을 함께했다. 짧지만은 않은 시간이다. 가장 많은 사랑을 받은 작품이면서 20년 만에 첫 상(서울어워즈 남우조연상)을 안겨줬을 뿐 아니라 관객과 평단의 좋은 평가를 받은 ‘공조’를 함께할 수 있었던 것에 진심으로 감사하다.

배우 김주혁을 아끼고 사랑하는 관객에게 풋풋하고 젊은 청춘의 얼굴을 볼 수 있는 ‘YMCA 야구단’을 추천한다. ‘조선의 희망’ ‘조선 제일의 에이스’가 그곳에 있다. 가수 최호섭의 명곡 ‘세월이 가면’을 꿋꿋이 열창하는 소심한 남자 ‘광식’의 영화 ‘광식이 동생 광태’를 추천한다. 한 여자를 사랑한 순수하고 바보 같은 남자가 그곳에 있다. 언덕길에서 이별을 고하는 남자 ‘우진 109역’의 ‘뷰티 인사이드’를 추천한다. 아주 짧은 등장이지만 오래도록 잊을 수 없는 얼굴의 남자가 그곳에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공조’를 추천한다. 데뷔 이래 가장 강렬한 악역 ‘차기성’의 멋진 카체이싱 액션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얼굴을 마주하고 대화를 나눈 것은 ‘공조’의 흥행 축하 뒤풀이 자리였다. 스태프와 배우들 모두 모여 조촐하게 자축하는 곳에서 만난 그는 먼저 자리에서 일어난다며 인사하는 우리에게 또 한마디를 툭 던졌다. “이제 건강 생각할 나이다.” 나는 그 따뜻한 말 한마디를 아마도 오래도록 잊지 못할 것이다. 새파란 막내로 영화 일을 시작할 때 만나 내게 ‘선배’란 호칭보다 ‘오빠’라는 호칭이 더 편했던 배우 고(故) 김주혁을 이 자리를 빌려 추모하고 추억하고자 한다. 많은 사람이 오래도록 좋은 배우이자 좋은 사람이었던 그를 기억할 것이라고 믿는다.

이윤정 < 영화전문마케터·퍼스트룩 대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