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기업 활력 외면하는 기술규제는 안돼
한국에는 2만여 건의 기술규제가 존재한다. 기술규제가 지닌 법적 구속력은 대부분의 국민에게는 최소한의 안전장치지만 피규제자에겐 엄청난 재정적 부담으로 작용한다. 일례로 한국은 올 상반기 자동차 누적 등록대수가 2200만 대를 돌파했다. 배기가스 관련 기술규제가 없었다면 공기가 오염돼 숨쉬기조차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자동차 제조사로선 기술 기준을 충족하기 위해 상당한 재원을 투자해야 했고 이 비용은 자동차 가격의 상승 요인이 됐다. 이처럼 기술규제는 경제성과 안전성이 충돌하는 현장에 있다.

최근의 4차 산업혁명 물결로 인해 기술규제는 근본적으로 재검토될 시점에 놓여 있다. 과거와 다른 기술이나 융합제품이 쏟아져 나와 적절한 규제방안이나 수준을 신속하게 마련하기가 어렵다. 이런 상황에서 규제당국은 ‘무위험 원칙’을 추구하며 보수화되기 쉽다. 그러나 지나치게 보수적인 규제는 우리 기업들의 경쟁력을 잠식할 것이다. ‘기업의 활력’과 ‘국민의 안전’이 균형을 이루는 규제가 필요한 시점이다.

이런 규제를 만들기 위해서는 무엇을 고려해야 할까. 이와 관련해 네 가지 요인을 고려해볼 것을 제안한다. 첫째, 시장변화의 반영이다. 과거에는 제조사-유통회사-소비자로 이어지는 비교적 단순한 생산·소비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최근엔 전자상거래, 해외직구, 병행수입 등 다양한 경로로 제품이 유통되고 있다. 이런 변화를 반영하지 않은 규제는 사회적 편익은 증가시키지 않고 비용만 발생시킬 것이다.

둘째, 피규제자의 전문성 활용이다. 기업인은 기술규제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다. 국내 기업은 산업화와 세계화를 거치면서 국내외 산업규제에 상당한 지식과 정보를 축적하고 있다. 또 이들은 규제 완화가 절실히 필요한 집단이기도 하다. 따라서 기술규제 정책과정에서 피규제자인 기업의 역할을 대폭 강화할 필요가 있다.

셋째, 규제방식의 전환이다. 국민안전을 일정 수준 보장하면서 기업의 창의성과 자율성을 제약하지 않는 방향으로 규제의 방식을 전환시키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정부가 ‘가능한 사항’을 적시에 모두 열거하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따라서 법적으로 불가한 사항을 명시하고 나머지 사항은 자율로 할 수 있도록 풀어주는 방식을 도입할 필요가 있다. 이런 전환은 기업 활력을 제고해 산업 활성화로 이어지게 될 것이다. 제품에 대한 제조업체의 최종 책임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보완한다면 안전을 크게 위협하지도 않을 것이다.

넷째, 공무원의 전문성 강화다. 기술규제를 강화하는 것도, 완화하는 것도 최종적으로는 공무원의 몫이다. 당연히 지식과 정보를 갖춘 공무원만이 올바른 결정을 내릴 수 있다. 그러므로 공무원은 자신이 주도한 규제가 나쁜 규제 사례로 지적되지 않도록 연구하는 자세를 갖춰야 한다. 정부도 이들의 전문성 강화를 위한 전문직 제도 도입 등 다양한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

소위 ‘좋은 기술규제’는 정부가 독자적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국민을 포함한 사회 모든 구성원이 함께 노력해야 만들어진다. 특히 우리 국민은 최근 발생한 대형 안전사고로 규제제정과 관련해 안전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사고들은 제도적 결함이 아니라 해당 원인 제공자가 제도를 준수하지 않아 발생한 것이다. 따라서 기업은 법제도를 준수해 국민의 우려를 불식시켜야 하고 그 이익은 다시 자신에게 돌아갈 것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이용규 < 중앙대 교수·행정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