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G 가전 혁신 이끈 한마디 "모듈화 못하면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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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G전자의 '모듈 혁신'
모든 공정 뜯어고치는 고통
"이렇게까지 해야하나" 비명
이젠 영업이익률 세계 1등
모든 공정 뜯어고치는 고통
"이렇게까지 해야하나" 비명
이젠 영업이익률 세계 1등
1990년 일본 나고야의 도요타자동차 공장. 한 한국인 견학자가 세심하게 라인 하나하나를 살피고 있었다. LG전자 세탁기사업부의 조성진 엔지니어(현 부회장)였다. 당시 도요타는 모듈 생산방식을 도입해 현장에 막 적용하고 있었다. 아직 가전에는 도입한 사례가 없었지만 조 엔지니어는 “우리도 한번 해보자”며 동료 연구원들과 의기투합했다. 협력사와 공정이 제각각인 여러 개의 부품을 한 덩어리로 묶는 모듈화는 제품 기획부터 협력업체 관리까지 모두 뜯어고쳐야 하는 고통스러운 과정이다. 당장 “이렇게까지 해야 하느냐”는 볼멘소리가 터져나왔다.
그로부터 27년이 지나 모듈 생산은 LG전자의 가전제품 모든 라인에 적용되고 있다. 세탁기는 2009년에 비해 제품당 생산시간은 40%, 생산라인 길이는 절반으로 줄었다. 모듈화는 획기적인 생산성 향상으로 이어졌다. 현장 엔지니어들이 “2000년 이후 최고의 혁신이 일어났다”고 자평할 정도다. LG전자에서 가전사업을 담당하는 H&A사업본부의 올해 3분기까지 누적 매출은 14조8966억원, 영업이익은 1조4283억원으로 영업이익률이 9.4%에 이른다. 같은 기간 글로벌 경쟁사인 월풀은 5.6%, 일렉트로룩스는 6.0%의 영업이익률을 올리는 데 그쳤다.
모듈 생산은 부품을 따로 뭉쳐서 제작한 뒤 나중에 조립하는 방식이다. 냉장고를 예로 들면 컴프레서를 돌려 냉기를 만드는 구동계, 냉기를 냉장고 내부에 순환하고 악취를 빼내는 순환계, 전체 냉장고 외관과 문 등이 각각 하나의 모듈이 된다. 냉장고 하나에는 모델에 따라 200~400여 가지 부품이 들어간다. 하지만 모듈 기준으로는 4~5종류에 불과하다. 부품 수백개를 모듈 4~5개로…세탁기·오븐·냉장고 줄줄이 '제조 혁신'
수백 개의 부품을 일일이 조립하지 않기 때문에 제조시간과 불량률이 크게 떨어진다. 20여 종의 모듈만 있으면 이를 서로 조합해 수백 개의 다른 모델을 제조할 수도 있다. 특정 모듈이 여러 종류의 세탁기 모델에 들어가면서 구매력도 높아진다. 모델 단위로 부품을 구매할 때보다 조달 비용을 크게 낮출 수 있다. 수백 종류의 부품을 일일이 관리하지 않아도 돼 현장 조직의 업무 효율 역시 높아진다.
모듈 생산은 폭스바겐과 포드 등을 중심으로 1980년대 초 자동차업계에서 도입하기 시작했다. 부품이 수천 개에 이르는 자동차 제조 현장의 특성상 공정을 단순화해 효율을 끌어올려야 할 필요가 컸기 때문이다. LG전자는 1990년대 들어 본격적으로 모듈 생산 전환을 위한 연구를 시작했다. 2000년부터 세탁기 일부 부품을 모듈화했으며 2009년에는 모든 부품의 모듈화를 끝내고 세계 가전업계에서 처음으로 모듈 공정을 세탁기 생산라인에 적용했다. 조성진 부회장이 가전사업을 총괄하게 된 2013년부터는 모든 가전제품에 확대 적용하기 시작했다.
적자 확대로 한때 ‘철수설’에 시달리던 오븐 및 전기레인지(인덕션) 사업이 가장 먼저 덕을 봤다. LG전자는 광파와 전자파 등 작동원리에 따라 복잡하게 나뉘어 있던 생산라인을 모듈 중심으로 단순화했다. 그리고 각 모듈을 해외 거래처에 공개해 소비자가 원하는 조합의 모듈로 다양한 오븐을 생산했다. 회사 관계자는 “모듈화를 통해 생산비용을 줄이고 해외 시장을 늘려 지난해부터 완벽한 흑자체제를 구축하는 데 성공했다”고 평가했다.
얼핏 보면 생산현장에 한정된 혁신으로 보이지만 모듈 생산으로의 전환은 사업 전체에도 영향을 준다. 모듈 생산이 도입되면 제품 개발자로서는 한정된 모듈을 조합해 새로운 제품을 설계해야 해 개발의 ‘자율성’이 떨어진다는 느낌을 받는다. 모듈화의 약점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 초기 모듈화를 시도할 때 시장 조사에서 제품 개발, 협력업체 관리에 이르는 모든 분야에서 혁신적 노력이 뒷받침돼야 성공할 수 있다. 부품 하나가 잘못되면 과거에는 해당 부품만 교체하면 됐지만 모듈 공정에서는 모듈을 통째로 들어내야 하기 때문이다.
정진우 LG전자 세탁기연구개발실 상무는 “모듈 전환 초기에는 제약이 지나치게 늘어난다고 느껴져 개발자들끼리 ‘왜 우리만 이렇게 유난을 떨어야 하느냐’는 푸념이 나왔다”며 “하지만 경영진을 중심으로 ‘이렇게 해야만 산다’는 확고한 의지가 있었고, 모든 직원이 공감했기에 모듈화 혁신이 성공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지난해 말 조 부회장이 LG전자 최고경영자(CEO)를 맡으면서 스마트폰과 TV 등에도 부품 모듈화가 적극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올해 초에는 H&A사업본부에서 모듈 생산을 담당한 임원들이 MC사업본부(모바일 담당)로 옮겨갔다. LG그룹 차원에서도 모듈 생산 확대를 모색하고 있다. 구본준 (주)LG 부회장은 올해 5월 LG그룹 계열사 임원 4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임원 세미나를 처음으로 주재하며 ‘모듈러 생산 혁신 사례 소개’를 직접 세미나 주제로 선정했다.
LG전자가 모듈 생산으로 성과를 보면서 가전제품을 생산하는 경남 창원 공장에는 다른 업종 기업들이 찾아와 벤치마킹에 나서고 있다. 최근에는 글로벌 기업 한 곳도 모듈 생산을 배우기 위해 창원 공장을 방문했다. LS산전 등은 이 같은 모듈 생산을 B2B(기업 간) 제품 생산에 적용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가전, 자동차와 비교해 다품종 소량 생산이 많은 B2B 제품은 모듈 생산 적용이 불가능한 영역으로 여겨져 왔다. 이들 업체는 대량 생산이 가능한 부분까지만 모듈화하고 나머지는 고객사 요구를 반영하는 방식으로 제조 비용 절감에 나설 계획이다.
김상훈 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모듈화를 통해 제조 프로세스가 간결해지면서 관련 데이터를 생산하고 분류한 뒤 다시 제조 라인을 혁신하는 것이 한층 쉬워졌다”며 “모듈 생산을 도입한 기업들이 스마트팩토리 도입 등 4차 산업혁명에 따른 제조 혁신에도 앞서갈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노경목 기자 autonomy@hankyung.com
그로부터 27년이 지나 모듈 생산은 LG전자의 가전제품 모든 라인에 적용되고 있다. 세탁기는 2009년에 비해 제품당 생산시간은 40%, 생산라인 길이는 절반으로 줄었다. 모듈화는 획기적인 생산성 향상으로 이어졌다. 현장 엔지니어들이 “2000년 이후 최고의 혁신이 일어났다”고 자평할 정도다. LG전자에서 가전사업을 담당하는 H&A사업본부의 올해 3분기까지 누적 매출은 14조8966억원, 영업이익은 1조4283억원으로 영업이익률이 9.4%에 이른다. 같은 기간 글로벌 경쟁사인 월풀은 5.6%, 일렉트로룩스는 6.0%의 영업이익률을 올리는 데 그쳤다.
모듈 생산은 부품을 따로 뭉쳐서 제작한 뒤 나중에 조립하는 방식이다. 냉장고를 예로 들면 컴프레서를 돌려 냉기를 만드는 구동계, 냉기를 냉장고 내부에 순환하고 악취를 빼내는 순환계, 전체 냉장고 외관과 문 등이 각각 하나의 모듈이 된다. 냉장고 하나에는 모델에 따라 200~400여 가지 부품이 들어간다. 하지만 모듈 기준으로는 4~5종류에 불과하다. 부품 수백개를 모듈 4~5개로…세탁기·오븐·냉장고 줄줄이 '제조 혁신'
수백 개의 부품을 일일이 조립하지 않기 때문에 제조시간과 불량률이 크게 떨어진다. 20여 종의 모듈만 있으면 이를 서로 조합해 수백 개의 다른 모델을 제조할 수도 있다. 특정 모듈이 여러 종류의 세탁기 모델에 들어가면서 구매력도 높아진다. 모델 단위로 부품을 구매할 때보다 조달 비용을 크게 낮출 수 있다. 수백 종류의 부품을 일일이 관리하지 않아도 돼 현장 조직의 업무 효율 역시 높아진다.
모듈 생산은 폭스바겐과 포드 등을 중심으로 1980년대 초 자동차업계에서 도입하기 시작했다. 부품이 수천 개에 이르는 자동차 제조 현장의 특성상 공정을 단순화해 효율을 끌어올려야 할 필요가 컸기 때문이다. LG전자는 1990년대 들어 본격적으로 모듈 생산 전환을 위한 연구를 시작했다. 2000년부터 세탁기 일부 부품을 모듈화했으며 2009년에는 모든 부품의 모듈화를 끝내고 세계 가전업계에서 처음으로 모듈 공정을 세탁기 생산라인에 적용했다. 조성진 부회장이 가전사업을 총괄하게 된 2013년부터는 모든 가전제품에 확대 적용하기 시작했다.
적자 확대로 한때 ‘철수설’에 시달리던 오븐 및 전기레인지(인덕션) 사업이 가장 먼저 덕을 봤다. LG전자는 광파와 전자파 등 작동원리에 따라 복잡하게 나뉘어 있던 생산라인을 모듈 중심으로 단순화했다. 그리고 각 모듈을 해외 거래처에 공개해 소비자가 원하는 조합의 모듈로 다양한 오븐을 생산했다. 회사 관계자는 “모듈화를 통해 생산비용을 줄이고 해외 시장을 늘려 지난해부터 완벽한 흑자체제를 구축하는 데 성공했다”고 평가했다.
얼핏 보면 생산현장에 한정된 혁신으로 보이지만 모듈 생산으로의 전환은 사업 전체에도 영향을 준다. 모듈 생산이 도입되면 제품 개발자로서는 한정된 모듈을 조합해 새로운 제품을 설계해야 해 개발의 ‘자율성’이 떨어진다는 느낌을 받는다. 모듈화의 약점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 초기 모듈화를 시도할 때 시장 조사에서 제품 개발, 협력업체 관리에 이르는 모든 분야에서 혁신적 노력이 뒷받침돼야 성공할 수 있다. 부품 하나가 잘못되면 과거에는 해당 부품만 교체하면 됐지만 모듈 공정에서는 모듈을 통째로 들어내야 하기 때문이다.
정진우 LG전자 세탁기연구개발실 상무는 “모듈 전환 초기에는 제약이 지나치게 늘어난다고 느껴져 개발자들끼리 ‘왜 우리만 이렇게 유난을 떨어야 하느냐’는 푸념이 나왔다”며 “하지만 경영진을 중심으로 ‘이렇게 해야만 산다’는 확고한 의지가 있었고, 모든 직원이 공감했기에 모듈화 혁신이 성공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지난해 말 조 부회장이 LG전자 최고경영자(CEO)를 맡으면서 스마트폰과 TV 등에도 부품 모듈화가 적극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올해 초에는 H&A사업본부에서 모듈 생산을 담당한 임원들이 MC사업본부(모바일 담당)로 옮겨갔다. LG그룹 차원에서도 모듈 생산 확대를 모색하고 있다. 구본준 (주)LG 부회장은 올해 5월 LG그룹 계열사 임원 4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임원 세미나를 처음으로 주재하며 ‘모듈러 생산 혁신 사례 소개’를 직접 세미나 주제로 선정했다.
LG전자가 모듈 생산으로 성과를 보면서 가전제품을 생산하는 경남 창원 공장에는 다른 업종 기업들이 찾아와 벤치마킹에 나서고 있다. 최근에는 글로벌 기업 한 곳도 모듈 생산을 배우기 위해 창원 공장을 방문했다. LS산전 등은 이 같은 모듈 생산을 B2B(기업 간) 제품 생산에 적용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가전, 자동차와 비교해 다품종 소량 생산이 많은 B2B 제품은 모듈 생산 적용이 불가능한 영역으로 여겨져 왔다. 이들 업체는 대량 생산이 가능한 부분까지만 모듈화하고 나머지는 고객사 요구를 반영하는 방식으로 제조 비용 절감에 나설 계획이다.
김상훈 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모듈화를 통해 제조 프로세스가 간결해지면서 관련 데이터를 생산하고 분류한 뒤 다시 제조 라인을 혁신하는 것이 한층 쉬워졌다”며 “모듈 생산을 도입한 기업들이 스마트팩토리 도입 등 4차 산업혁명에 따른 제조 혁신에도 앞서갈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노경목 기자 autonomy@hankyung.com